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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리더십

이주흠 지음 | 박영사
이주흠 지음

박영사 / 2007년 11월 / 366쪽 / 15,000원

지도자의 고전 - 샤를르 드골



이단의 전사


군인 드골은 계층사회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프랑스군의 전략과 전술을 거리낌 없이 비판한다. '프랑스군은 그 역사에 있어 늘 잘못했다'고 탓한다.

샤를르 드골은 1890년 프랑스 북부의 도시 리유에서 태어난다. 고등학교에서 철학과 수학을 가르친 앙리 드골의 4남매 중 차남이다. 아들이 영향 받은 행동주의 철학자 베르그송의 친구였던 부친은 역사에 관심을 보이고 스스로 생각하려 한 그에게 플라톤, 소크라테스, 칸트, 니체를 읽힌다. 소년 드골은 수줍음 타고 말수 적으나 옳다고 믿는 것을 주장할 때는 공격적이다.



드골은 그의 생애를 통해 조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품는다. 역사를 즐겨 읽은 소년 기부터 이성과 감성이 이룬 것이다. 선두에 서지 않는 프랑스,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며 고통의 순간에도 프랑스는 높은 곳을 향해 굳건히 서야 한다는 것이 다. 그리고 그에게는 언젠가 큰 시련을 겪게 될 조국을 구할 사명이 있다는 믿음이다. 1871년에는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의 계략에 걸려들어 벌인 전쟁에서 진 프랑스가 알사스·로렌을 빼앗기고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 수치의 기억이 뚜렷한 시대에 자란 드골은 특별한 생각을 갖게 된다.



파리에서 자란 그는 1909년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간다. 그후 육군사관학교 교관,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페땅 원수의 부관, 보병대대장, 최고국방회의 사무국 서기, 육군전략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1937년 대령이 되어 기갑연대장을 맡는다. 이 사이에 책도 여러 권 쓴다. 군사와 정치의 리더십을 다룬 『칼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원인을 분석한 『적의 불화』, 프랑스군의 발자취를 그린 『프랑스와 프랑스군』,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군대와는 별개로 상비군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직업군대를 위하여』, 과학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전투수단으로 등장한 기갑부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미래의 군대』를 낸다.



드골의 주장은 프랑스군의 군사이론과 다르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다. 기갑부대에 의한 기동전이다. 드골의 전법은 유연성이 생명이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써먹을 '교범'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 노예가 되어 변화에 따르지 못한다고 한다. 교범이 쓸모 있으려면 상황에 맞춰야 하는데, 이것은 변수를 있는 그대로 보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사고가 유연해야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 드골은 이러한 자질을 청년장교 시절부터 엿보인다. 그래서 상관들과 부딪힌다. 그의 안목과 용기가 버거운 동료들로부터도 따돌림받는다. 드골은 진급도 늦다. 낡아빠진 생각의 윗사람들과 다투며 소신을 안 굽혀 눈 밖에 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프랑스는 지난 전쟁의 경험에 따라 고정방어에 매달린다. 정부, 정당, 군의 지도자들에게 마지노선이 신앙이 된다. 1932년부터 5년간 총리직속의 최고국방위원회 사무국에서 일하며 이 사실을 알게 된 대령 드골은 벅찬 통념의 벽에 도전한다. 그는 직전의 전쟁경험(1차 세계대전)에 매달리는 나라는 이것을 뛰어넘는 나라에 늘 졌다며 이것을 '패자의 전략'이라고 한다. 드골이 보기에 고정방어는 자기무덤을 파는 것이다. 먼저 공격할 여지를 없애 주도권을 적에게 넘기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여 히틀러가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부터 독일군이 쳐들어오는 1940년까지 프랑스는 정권이 스물네 번 바뀐다. 프랑스의 덧없는 패배는 정치, 군, 사회의 풍조가 어우러져 빚는다. 정당들이 때도 없이 헤쳐모여 이루는 하루살이 정권이 의욕과 원칙을 정책에 담을 수 없다. 군사도 예외가 아니다. 권위에 자신 없는 정치인은 주관이 뚜렷하기보다 말 잘 듣는 군인이 좋다. 군이 기회주의에 기우는 것이다. 권력다툼으로 지새는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은 나라와의 일체감을 잃는다. 비전 없어 정치를 외면하는 사회는 변화도 꺼린다. 여기에 정치인이 영합하여, 다음으로 군인이 그 풍향에 스스로를 맞춘다. 파국을 향한 악순환이다. 드골의 외침에 메아리가 없었던 이유다.



나신의 저항자

국민은 독일에 패한 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정부와 군도 싸우자는 그의 호소를 외면한다. 그래서 저항의 불길을 외로이 홀로 당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빼면 걸친 것 없는 벌거숭이다. 그러나 결코 고개 숙이는 일 없이 투쟁에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주권', '제국', '칼'을 조국에 찾아준다.

1940년 6월 16일, 프랑스 정부가 합법적으로 독일에 굴복한다. 거의 모든 국민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드골은 계속 싸우겠다고 한다. 그래서 부관 한 명만 데 리고 영국 공군기로 망명길에 오른다. 6월 18일 조국을 향한 라디오 연설에서 "우 리는 전투에 패했지, 전쟁에 진 것은 아니다"며 저항을 호소한 그는 6월 24일 '자유프랑스'를 세운다. 드골은 시련이 거세지면 투지도 그만큼 드세지는 사람이다. 4년여 망명시절 드골은 침략자 나치독일과는 무력투쟁, 후원자 미·영과는 권리투쟁, 그리고 같은 프랑스인들과는 정통성 투쟁을 벌인다.



드골은 미국과 권리투쟁에서 '벌거숭이 저항자'이다. 미국의 루즈벨트가 도와 나라를 찾는다. 그러나 은혜 입은 약자답게 고개 숙이지 않아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진다. 루즈벨트와 드골은 합법성을 두고 다툰다. 루즈벨트가 드골과 '자유프랑스'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민주절차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상가동하는 나라의 지도자가 주권을 빼앗겨 비상가동하는 나라를 위한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 싸움은 '나신의 저항자'가 져야 할 멍에다. 런던의 유럽망명정부 지도자들도 드골에게서 주권을 찾으려고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다윗 드골은 루즈벨트라는 골리앗과 끝까지 맞서 이겼다. 1944년 8월, 마침내 드골의 임시정부(자유프랑스)가 주권을 행사하여 연합군을 돕게 된 것이다. 그가 외세의 꼭두각시였다면, 아니 그렇게 비치기라도 했다면, 그는 '프랑스 주권'의 깃발이 되어 국민에게 투지와 긍지를 심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굽히고 물러섰더라면 누더기만 걸친 조국에 '주권'과 '제국'과 '칼'을 가지고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1944년 8월 귀국한 드골은 9월에 임시정부 지도자가 된다. 그는 권력부터 세운다. 이후 국가재건, 정치가들이 벌이는 환멸의 드라마를 보고 은둔, 예순 아홉에 대통령이 되어 다시 재집권 과정을 거친다.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안고 간 드골은 1970년 11월 9일 복부대동맥 파열로 생을 마친다. 80세였다.



거부의 인간

자기 나라 사람이 싫다는 내셔널리스트, 강자를 조롱하는 약자, 추종자를 멀리하는 지도자. 행동하는 몽상가. 환호를 탐내며 고독에 희열하는 모순가, '거부의 미학'을 즐기는 독선가.

다음은 드골의 개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자유프랑스' 시절의 드골은 툭하면 미·영의 결정에 시비 걸어 처칠, 루즈벨트와 부딪힌다. 그와 루즈벨트의 잦은 충돌에 지친 처칠이 드골에게 융통성을 보이라고 한다. "성급하지 마라! 나는 루즈벨트에게 양보하고 비껴가지만 돌아서 목표에 이른다". 드골이 대꾸한다. "그럴 수 있다. 단결된 나라와 제국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건 내게 너무 무겁다. 나는 가진 것이 없어 고개 숙일 수 없을 뿐이다." 드골은 '거부의 인간'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좌파지식인 샤르트르는 식민지전쟁을 맹렬하게 비난한다. 어느 날 경찰과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드골에게 달려와 그가 프랑스군과 싸우는 알제리아 독립군에게 자금을 대준다며 잡아들이자고 한다. 드골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그냥 놔두지! 내가 '프랑스'인 것처럼 그도 '프랑스'야." 생각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노벨상까지 거부하고 휴머니즘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위대한 프랑스인이다. 통념의 잣대로 재고 다룰 수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비록 법에는 어긋나더라도 드골이 그리는 지도자상은 그 정도는 넘어서야 했는지 모른다.



드골에겐 사람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 그를 믿고 신념을 같이하는가, 개성이 있어 뜻을 일관하는가, 문제의 본질을 신속하고 명확하게 파악하는가, 주의가 깊어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기다릴 줄 아는가,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부하가 헌신적일수록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드골의 말이다. 쏟은 만큼의 애정을 바라 공평무사를 막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드골은 1940년 6월 자기와 단둘이 영국행 비행기를 탔던 부관을 2년 뒤 전선으로 보낸다. 1958년 5월 비서실장을 다시 부르나 곧 대사로 내보낸다. 드골과는 '끈끈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지도자의 멍에'에 갈등을 느낀다.



드골이 '도덕성'을 들먹인 흔적이 없다. 그의 명예가 곧 국가의 그것이었던 만큼 '도덕 성'은 그저 당연했을 것이다. 재물에 대한 태도도 경멸에 가까웠다. 전직 군인, 대통령 으로서의 연금도 사절한다. 나라를 위한 기여를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드골 은 사생활도 드러내지 않는다. 감출 게 있어서가 아니다. 공과 사의 구분이다. 남 앞 에 서기를 꺼린 부인은 자선활동을 뒤에서 돕는다. 드골이 죽은 후 부인은 남편 뜻이 아니라며 대통령 미망인으로서의 예우를 사양한다. 자녀들도 잊힌 듯 산다. 숨겨진 인간 드골의 모습이 있다. 둘째 딸 안느는 다운증후군 환자였다. 드골은 그녀를 끔찍이 위한다. 시간을 내서는 무릎에 앉히고 '대화'한다. 누구와도 통할 수 없는 안느가 아버지와 '마음의 대화'를 한다. 스무살 때 죽은 딸을 묻은 드골은 그가 원해 안느 옆에 묻힌다. 드골의 회고록이 가져온 수입은 선천성 정신지체환자를 위한 '안느 재단'에 보낸다.



오늘의 많은 유럽인들은 드골을 '어제의 인물'로 제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부활하는 드골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답을 못 찾는 수수께끼를 풀어 보일지 모른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이 독주하며 독일이 하나가 된 이 세계에서 프랑스를 영광으로 이끌 '제4의 길'을 펼쳐 보일 것이다.



유럽의 지도자들



'싸움꾼'과 '평화꾼' - 제2차 세계대전과 처칠, 챔벌린


챔벌린은 희생을 마다 않고 타협하며 '평화의 황금시대'를 꿈꾼다. 처칠은 '이길 희망이 없어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노예로 살기보다 죽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역사는 그것을 위해 싸울 의지가 있는 자에게만 평화를 주었다.

윈스턴 처칠은 1874년 11월 20일, 영국 하원의원 랜돌프 처칠과 미국 출신 어머니 사 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기 명예혁명의 주역인 존 처칠, 즉 초대 '말보로 공작'의 8 대손이다. 그러나 허울좋은 이름일 뿐, 아버지의 낭비벽이 심해 어렵게 자랐다.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처칠은 명문사립 해로우 스쿨에 들어간다. 역사와 작문은 뛰어났 으나 수학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시험에서 겨우 붙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합격자 102명 가운데 92등이었다. 장교가 된 후에는 인도, 이집트, 수단 등의 식민지를 옮겨 다닌 끝에 1899년 정계로 나가기 위해 군을 떠난다. 이 때 책도 많이 읽었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역사, 철학, 정치서적을 수백 권 섭렵해 지식을 쌓고 시야를 넓혔다.



처칠은 스물다섯 살 때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곧 누구보다 많이 낙선한다. 보수당원이면서도 사회복지와 무역에 관해서는 진보주의의 자유당에 가까웠다. 노동자계급에 동정적이었다. 서민대책에 열심이었으며 값싼 식료품 공급을 위해 농산물 관세를 낮추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보수당과의 갈등이 커진 끝에 1904년 자유당으로 옮긴다. 자유당 내각에서 상무장관, 내무장관을 거쳐 1911년 해군장관이 된 처칠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1924년 자유당이 외교정책과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취하자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당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처칠은 보수당에서도 찬밥신세였다. '완고한 제국주의자'인 탓이 컸다.



술을 무척 좋아해 하루를 '위스키 소다'로 시작한 그는 자주 논리적 사고에 앞서 직관적으로 판단했다. 위인들에게서 흔히 보는 '본능의 힘'이다. 아이디어도 많았다. 탱크를 생각해 내고 로켓에 빠졌으며 적의 레이더를 혼란시킨다며 비행기에서 금속파편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행동을 앞세우면서 문장을 즐겼던 처칠은 책을 쓴다는 것은 '편하고 즐거운 친구를 옆에 두는 격'이라고 했다. 글이 수수하면서도 힘과 멋이 있던 그는 평생 쉰여섯 권의 책을 냈다. 빈틈없는 채비로 명연설도 남겼다. 짧고 분명한 단어와 문장을 좋아하고 리듬을 중시했다. 길게 설명하는 대신, 비유로 의미를 압축해 전달했다.

처칠은 앞날을 내다보는 것이 남달랐다. 나치 독일의 위협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누구보다 먼저 '철의 장막'을 찾아내고 '냉전'을 진단했다. "과거를 돌아볼수록 더욱 멀리 미래가 보인다"고 한 처칠의 선견지명은 쉬지 않고 탐구한 역사에서 얻은 것이다. 처칠은 히틀러의 도박이 차례로 먹혀드는 것을 맥없이 지켜보다가 모든 것을 잃고 전쟁이 시작된 후에야 비로소 여론의 부름을 받는다. 나치 독일이 출현한 1933년부터 전쟁이 막을 여는 1939년까지 처칠이 메아리 없이 외친 이 시기는, 그와 반대로 느끼고 행동한 네빌 챔벌린과 처칠이 승패를 가린 과정이기도 하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진 순간, '평화꾼' 챔벌린에 대신하여 '싸움꾼' 처칠이 등장한 것이다.

1937년 5월 28일 총리자리가 챔벌린에게 넘겨진다. 챔벌린은 자신 넘치는 사람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머리 좋고 돈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가로서도 좌절 겪는 일 없이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 정상에 이른다. 챔벌린은 그가 유럽정세를 꿰뚫는다고 믿는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상대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 독재자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한다. 이것을 그의 사명으로 여긴다.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양보를 해서라도 타협하려 한다. '평화를 가져온 지도자'로 역사에 남기를 원한다. 그래서 재무장관 시절부터 어떤 이유로도 군사비를 늘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처칠은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수중에 떨어진 다음날인 1938년 3월 14일 국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유럽에서는 잘 계산되고 시간에 맞춘 침략계획이 차례로 실천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오스트리아처럼 굴복하거나,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위험을 없애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태의 추이를 뒤쫓기에 급급한 동안 우리는 안전과 평화를 위한 자산, 그리고 우리의 동맹과 우방을 계속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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