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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병법

오기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오기의 생애와 오자병법 개요

위나라의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오기는 타고난 집념의 싸움꾼이었다. 약관의 나이를 넘기면서부터는 병법에 심취해 병법서를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벼슬을 하지 않고서는 재능을 발휘할 방법이 없던 때였다. 그때부터 오기는 권세가들을 찾아다니며 친분을 쌓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아버지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으면서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자신을 험담하는 것을 알고는 모멸감을 이기지 못해 칼을 뽑아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그러고서 노나라로 피신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노나라에서 공자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증삼의 아들 증신의 문하에 들어가 재능을 펼치며 유력 인사들과의 교분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증신의 집을 자주 출입하던 제나라 대부 전거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증신의 적극적인 천거 덕분이었다. 오기는 노나라 변방의 군영에 막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장병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일하는 것도 병사들과 똑같이 했다. 처음에는 거리감을 두던 병사들도 오기의 진심을 알고는 차츰 호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기는 군사들을 이끌고 체계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군사들이 어느 정도 훈련이 되었다 싶었을 때 오기는 장수를 찾아가 자신이 훈련시킨 부대를 이끌고 제나라 군을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실패하면 자신의 목숨을 걸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허락을 받았다. 밤중을 이용해 제나라 군의 한 진영을 공격한 그는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서 수십 명의 포로와 병장기를 노획해 왔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오기의 군대에 굴욕을 당했던 제나라가 다시 노나라를 공격해왔다.



오기는 노나라 대장군이 되어 싸움에 출전했다. 오기가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영웅으로 떠오르자, 오기를 시기하는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노나라 군주 목공에게 오기의 과거사를 들추면서 당장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 길로 오기는 말을 몰아 위나라의 수도인 안읍으로 갔다. 위나라의 문후가 현군이며 인재를 아낀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위나라 곳곳을 둘러본 오기는 위나라 원로대신 중 한 사람인 적황의 집을 찾아갔다. 적황을 통해 자신의 소식을 문후에게 전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오기가 위나라의 문후를 배알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오기가 문후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 바로 『오자병법』의 서장이다.



첫 만남에서 오기의 그릇을 알아본 문후는 그를 서하의 태수로 임명했다. 오기는 서하의 태수로 임명되자 곧 진나라의 성 5개를 빼앗았으며, 진나라는 그가 위나라에 머무는 25년 동안 여러 차례 반격을 가했지만 한 번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오기가 서하에 온 지 14년째 되던 해 문후가 세상을 떠났다. 문후는 50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나라 안팎을 굳건히 다진 전국 칠웅의 으뜸 군주였다. 오기는 침식을 폐하고 도성을 향해 사흘을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문후는 오기가 일생 동안 진심으로 존경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문후의 뒤를 이어 태자 무후가 즉위한 때는 기원전 395년이었다. 그는 총명하고 대담한 성격으로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가졌으나, 창업자의 후계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성격이 과격하고 덕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오기는 문후의 은혜를 갚으려고 무후를 보필해 대업을 이루고자 다짐했다.



손자병법과 오자병법

『손자병법』과 『오자병법』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손자병법』이 다분히 추상적인 '도가'의 영향을 받은 데 비해, 『오자병법』은 좀 더 현실적인 '법가'와 '유가'에 사상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 『손자병법』이 원론적이며 관념적인 개념을 다루는 반면, 『오자병법』은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다. 손무가 전쟁의 도를 말했다면, 오기는 전쟁의 기술을 설명했다고 할 수 있다. 손무는 전쟁을 속임수로 보았으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가장 훌륭한 승리라고 했다. 이에 반해 오기는 전쟁을 현실로 보고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손무가 전쟁에서 군의 사기나 기세를 중시했다면, 오기는 전쟁 이전에 정치적인 인화나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 등 심리적인 요인을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다. 손무는 '신상필벌'의 원칙을 강조했으나, 오기는 공이 있는 자는 물론 없는 자에게도 기회를 주면 이들이 큰 공을 세운다고 했다.



오기와 문후의 만남

오기의 기본사상은 전쟁 이전에 훌륭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안으로는 문과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무로써 방비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려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문덕은 부드러움이요, 무는 강함이다. 백성은 부드러움으로 감싸고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강함으로 대비해야 한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대개 이 두 가지의 균형이 깨어지는 경우다. 칼로 천하를 얻은 자는 또 다른 무장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문무를 겸비한 군주들

문후는 갑옷을 만들고 창과 수레를 만드는 등 전쟁에 대비했으나, 군대를 훈련시키고 통솔할 대장군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오기를 만남으로써 문후는 명실상부하게 문무를 겸비한 군주가 되었고, 50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위나라를 전국 칠웅의 으뜸으로 세울 수 있었다.



21세기 기업으로 본 무사안일, 부정부패, 공리공론

IBM은 기업사례 중에서 무사안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한 기업이다. 1911년 설립된 이래 승승장구하던 IBM은 비만증에 걸렸다. IBM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뒤뚱거리던 1993년경에는 40만 명의 종업원들이 무사안일에 빠져 있었다. 말하자면 문약했던 것이다. 문약한 국가나 기업의 특징은 공상주의자와 이상주의자가 많아 말이 많다는 점이다. 당시 IBM에서는 아인슈타인도 해내지 못한 초전도체를 만들겠다며 수많은 인력이 수십 억 달러의 예산을 쓰고 있었다. 공상주의였다. 중국의 송나라나 우리나라의 조선조에 유난히 공리공론이 많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무리한 영토 확장은 기업에도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잘나간다고 소문났던 벤처기업들이 한동안 뜸하다 싶어 내막을 들여다봤더니, 거의가 무리한 '확장의 덫'에 걸려 고전 중이거나 기업마저 넘겨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초음파 진단기로 혜성같이 나타났던 메디슨은 지나치게 빨리 재벌들의 문어발 경영을 흉내 내다가 부도를 냈고, 그 후 혹독한 시련을 겪고 나서야 본업이었던 초음판 진단기 분야로 돌아왔다.



기업이 나아갈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존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좁은 영역을 뛰어넘어 업종을 다각화할 경우에는 일을 벌인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진출한 분야에서 최소한 3위의 위치를 확보한 다음에 다시 다른 분야로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일본이나 이탈리아에는 몇 백 년을 이어오는 노포들이 많이 있다. 100년 넘은 기업이 1만 5,000개나 된다고 한다. 일본과 이탈리아 기업들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이 주제를 연구한 일본의 히라마츠 요치다 교수에 따르면, 당수기업들은 그들만의 '철학'이 있다. 단순히 돈이 된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하는 게 아니라, 한 분야에서 최고를 꿈꾸는 장인정신이 있다는 뜻이다.



제1편 도국, 부국강병의 길

오자병법은 앞의 서장을 제외하고는 문후가 아닌 그의 아들 무후와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무후는 아버지인 문후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창업자의 후계자들이 대개 그렇듯, 무후도 총명하기는 했지만 교만하고 독선적이었다. 또, 창업의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좌절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전쟁을 일으키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 전쟁에 있어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는 전쟁의 명분이 뚜렷하지 못하거나, 군사를 일으키려 하거나, 군주나 몇몇 간신들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경우다.



명분의 중요성

십자군 전쟁을 보자. 1095년부터 200년 가까이 이어졌던 십자군 전쟁은 '십자가'와 '초승달'의 싸움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지를 여행하던 기독교인들이 초승달, 즉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구실로 '성지회복'의 명분을 내세워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처럼 거창한 명분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여전히 미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슬람교도들의 박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비잔틴 황제가 꾸며낸 것들이었다. 11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은 국력이 쇠약해진 반면, 이슬람권의 셀주크튀르크는 나날이 세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명분이 중요한 또 다른 분야는 정치다. 정치에서는 명분이 궁색해지면 정체성이 없어지고, 정체성이 없어지면 나아갈 길도 막아버리는 결과가 초래된다.



임진왜란과 조선의 국론분열

16세기 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요구했다. 그러나 외교문서가 오만하다는 이유로 사신의 파견을 거절하자. 다시 교섭을 청하면서 이번에도 응하지 않으면 조선을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돌이켜 보면 임진왜란은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싸움에 대해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과 국론마저 양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해전에서 승승장구하던 이순신 장군을 모략해 옷을 벗게 함으로써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의 경우처럼 싸움에서 공을 세웠을 때 그 공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으로 전쟁을 그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군이 적진분열 되면 전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적진분열이 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명분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이기는 자, 황제가 되리라

전쟁을 좋아해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의 루이 14세다. 전쟁에서 강화조약 체결까지를 합치면 32년 동안 전쟁에 몰두했던 사람으로, 재임기간 54년의 3분의 2를 전쟁으로 보낸 인물이었다. 영토를 확장하고 콜베르식의 중상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파로 국고는 비어버렸고 국민은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했으며 질병까지 창궐했다. 이에 비해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를 구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것으로 생각되는 터키의 '케말파샤'라는 인물이다. 그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신격화된 사람일 것이며, 터키에서는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대역죄가 성립될 정도다.



속임수의 심리학

'강병'은 군사적인 힘만 믿고 뚜렷한 명분 없이 전쟁을 일으킨 군대를 가리킨다. 소위 말하는 침략전쟁이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대부분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나의 힘이 강해지면 힘이 약한 이웃을 넘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군대는 비위를 맞춰주면서 시간을 끌어 흥분을 가라앉게 해야 한다. 일단 유화정책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면 싸울 필요도 없게 되는 게 이런 군대다. 즉, 강군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외교인 것이다. 도의를 저버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군대를 '폭병'이라고 부른다. 오기는 이런 적에게는 속임수를 쓰라고 가르친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 이들은 명분이나 정의감과는 상관이 없다.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 속임수에 있다. 손무는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택하라고 가르친다. 꼭 전쟁을 해야 한다면 속임수라도 쓰라고 했다. 그러나 오기는 대부분의 전쟁은 힘으로 이기라면서 그 방법을 제시했지만, 이들 폭병에게만은 속임수를 써도 좋다고 가르쳤다. 권모술수라 하면 조조가 빠질 수 없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나갔을 때였다. 싸움이 길어지자 군량미가 부족하게 되었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조조는 보급 담당 장수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됫박을 적게 해서 군량미 배급을 줄이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다음날부터 군량미 배급이 대폭 줄어들자 병사들의 불평이 고조되었다. 그러자 조조는 보급 담당 장수를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병사들의 노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자네가 죽어야겠네!" 그리고는 그의 목을 베어 진중에 내걸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자가 작은 됫박을 사용해 군량미를 빼돌렸기에 그 죄로 목을 베었느니라.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 진정하라!" 이것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다.



부국강병에 이르는 길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군신 간에 예절을 세우고, 상하의 질서를 세우는 한편, 국민의 관습을 존중하고 올바르게 가르치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정예군을 키워야 한다. 군신 간의 예절과 상하의 질서는 나라의 기강이다. 그런 다음에는 국민을 교화시켜야 한다. 소위 말하는 국민총화다.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있지 않으면 부국도 강병도 있을 수 없다.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무섭다

진지를 안정시키는 방법이 뭐냐고 무후가 묻자 오기는 "유능한 자를 위에 두고 무능한 자를 그 아래에 두라"고 대답한다. 1930년대 맥아더가 필리핀 주둔 사령관으로 있을 때 아이젠하워는 그의 참모였다. 그러나 그 이후 두 사람의 인생은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휘하를 떠나 마샬 사령부에 합류해 작전참모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51세에 대령, 52세에 준장, 같은 해 7월에 중장, 그 후 다시 7개월 만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일개 중령이 4년 만에 대장으로 승진한, 이는 미군 역사상 가장 빠른 초고속 승진 기록이다. 연합군 총사령관이 된 아이젠하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자신의 초고속 승진이 실력에 의한 것임을 입증했다. 마침내 그는 미국의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그 후 아이젠하워는 1952년 선거에서 34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지만, 맥아더는 1948년과 1952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서 탈락하고 만다. 능력 위주의 문화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스타일의 차이였다.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만 믿은 나머지 남의 말을 듣지 않았고 자기주장만 강요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부하들의 업적까지 빼앗아 자신의 공으로 돌리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자신보다 잘난 부하를 그대로 두지 못하는 유형이었다. 그의 참모로 있던 아이젠하워가 한 번도 진급을 하지 못한 것이 그 예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와는 달리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휘하 장군들의 능력을 키워주고 격려했으며 부하들의 전공을 챙겨주는 점에서 맥아더와는 반대되는 스타일이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만년 운을 바꾼 원인이었다.



제2편 요적, 상대를 정확히 파악함

'요적'이란 적의 강약과 허실을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적을 정확히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오기는 적의 군사적 사정뿐 아니라 적국의 지세, 국민성, 정체,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장단점과 허실, 백성들의 심리상태까지도 예리하게 꿰뚫고 있었다. 유비무환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할 게 없다. 유비무환과 비슷한 말로 『춘추좌씨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평안히 지낼 때에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게 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입니다.' 조선조 실학의 대가였던 정약용은 저서 『목민심서』에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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