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 세종
백기복 지음 | 크레듀
1. 안티 사랑
노랫소리가 듣기 싫다 하여 새를 죽이려 함은 옳지 않다
"그대는 정녕 나의 뜻을 알지 못한단 말인가?" 최만리는 세종의 냉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전하 언문은 지극히 신묘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선진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발전시켜야 할 때옵니다." "내가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만을 좋아하기라도 했더란 말이냐? 내가 새 글을 만든 이유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백성들에게 보다 쉽게 전하기 위함이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언문의 유포는 더욱 곤란하옵니다. 중국과 다른 글을 쓰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따르며, 상국에서도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사옵니다. 이런 폐단을 어찌 감당하시려 글을 달리한단 말입니까?"
세종 26년 2월 어느 날, 세종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군신관계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한바탕 격한 논쟁을 벌였다. 논쟁 배경은 한 해 전 왕명으로 창제된 훈민정음에 있었다. 실록에 나오다시피 세종이 감정을 드러낼 만큼 흥분한 것도 이채롭지만 그런 왕에게 지지 않고 소신을 펼치는 최만리의 고집 또한 여간하지 않다. 평생을 집현전에서 보낸 성리주의 원칙주의자 최만리는 한글 반대 상소뿐 아니라 임금이 틀렸다고 판단되는 일이라면 언제나 정연한 논리로 잘못을 지적했다. 부제학으로 있는 동안 14차례나 상소를 올렸으니 여간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최만리를 중용했다. 그는 최만리의 안티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원칙을 중시하는 엄격한 유학자의 신념을 근간으로 타당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세종은 학자이자 관료로서 그의 진정성을 아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반대파를 가까이 두기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인 바 이는 세종의 성군다운 면모를 엿보게 하는 일면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갈등은 세종의 한글창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최만리가 그 해 낙향하고 이듬해 목숨을 다하는 것으로 끝났다. 최만리가 한양을 떠난 후 세종은 3년이나 부제학 자리를 비워두고 그를 그리워했다 한다. 세종과 최만리의 논쟁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그들이 신분을 넘어서는 치열한 공방을 펼쳤지만 마음속에는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깔려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각자가 치밀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안티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안티는 효과적인 마음경영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마음경영에 성공하려면 비판받지 않고 결정된 사항들에 대해서 쉽게 신뢰를 보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자청해서라도 비판과 안티를 끌어들여야 한다. 특히 집단으로 의사결정을 할 때 안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란 다수를 모아 놓으면 반드시 좌중을 지배하는 이가 나타나고, 그러다 보면 구성원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솔직한 의견을 드러내기 힘들어지는 집단사고(Group thinking) 현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노랫소리가 싫다고 새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세종의 마음경영이 빛났던 것은 신하들이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구축하고, 스스로 안티와 더불어 토론하고 설득할 수 있는 탁월한 역량과 자세를 갖추었다는 데 있다. 그 확실한 증거를 우리는 최만리의 끈질긴 안티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자기절제
마음속 구석구석 빛을 비추어 탐닉의 덫을 다스리도록 힘쓸지어다
"전하 망극하옵게도 서연이 불가하게 되었나이다." "서연이 불가하다니" "서연을 맡은 부제학 윤회 대감께서 입궐을 아니 하였나이다. 급히 알아보니 부제학께서는 술에 취해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었나이다." 동궁전 내관의 말을 들을 세종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헌부 신료가 앞으로 나서서 가시 돋친 소리를 쏟아냈다. "전하, 그가 술로 인해 제 할 일을 작파한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아뢰옵기 민망할 지경입니다. 당장 잡아들여 그 죄를 다스려야 할 줄로 아옵니다."
서연은 왕에게 학문의 경지를 인정받은 신료만이 할 수 있는 영예로운 일이고 장차 왕이 될 세자를 가르치는 일이기에 그 소임이 막중했다. 그런 만큼 술에 취해 서연을 빼먹은 윤회의 행동은 임금에 대한 능멸에 해당하는 죄였다. 그러나 세종은 뜻밖에도 당장 그를 잡아들이라 명하거나 노기를 보이지 않았다. 세종이 천재라 불렀을 만큼 빛나는 재능을 가진 당대의 문사 윤회는 안타깝게도 그 학문적 경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잦은 음주로 세종에게 고민을 안겼다. 술에 빠지면 도무지 앞뒤 가늠이 안 되고, 때로는 실수가 커서 옥에 갇힌 일도 있었다. 그래도 그의 술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다음날 아직 술 냄새가 가시지 않은 윤회는 잔뜩 주눅 든 모습으로 세종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스승이 술에 취해 강론에 나오지 않는다면 제자인 세자가 무엇을 배우겠느냐? 과인이 내리는 술 이외에는 먹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거늘" "…" "그대는 정녕 이태백이 되려 하는가? 그대는 이백과는 달리 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그 차이조차 분간 못할 만큼 취기가 깊단 말인가?" "소신의 얕은 재주로 어찌 이백에 비하겠나이까. 허나 소신은 전하의 신하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크옵니다. 이백을 따라 주유천하하면서 사는 것이 소신에게 더 어울리니 소신을 벌하여 내치소서." 세종은 기가 막혔다. 술을 버릴 수 없어 사직을 하겠다니 말이다. "신하가 임금의 명이라면 불 속을 들어가라 하여도 피하지 않을 일이거늘, 주량을 생각해 스스로를 단속한다면 그렇게 체면을 잃기까지 하겠는가? 더 이상 나는 그대를 설득하지 않겠노라. 또다시 불경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때는 과인도 대신들의 주청을 물리칠 수 없다."
임금의 간곡한 당부에 윤회가 어찌 황송하지 않았겠는가. 하도 민망하여 골백번 금주를 다짐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서면 술 생각에 목이 타고, 술만 보면 무너지는 것을 그도 어쩌지 못했다. 세종과 윤회의 술 싸움은 결국 세종의 패배로 끝나고 만다. 왕명으로도 신하의 술버릇은 고칠 수 없었던 것이다. 말년의 윤회는 중풍을 앓으면서도 술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생전의 마지막 임무로 역사해설서 『통감훈의』의 집필을 주도했다. 끝까지 자신에 대한 신임을 저버리지 않은 세종에게 보답하려 했던 것일까? 병고와 싸우며 일하기를 두 해. 겨우 집필을 마친 윤회는 탈진하여 생명을 다하고 만다.
윤회가 술을 좋아했던 것처럼 무엇이든 너무 깊이 빠지면 자신을 잃게 된다. 자기절제의 중요성을 이르는 말이다. 자기절제는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만 있으면 된다. 자기절제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타고난 장점을 지키는 일, 둘째, 마음속의 유혹을 다스리는 일, 셋째, 상황의 압박을 이겨내는 일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탐닉을 다스리는 일이다. 윤회는 마음속에 숨어 있던 탐닉의 덫을 피해가는 데 실패하여 결국 자신의 천재적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자기절제의 실패는 마음속에 있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술에 취한 사람은 술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일에 취한 사람은 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그린다. 하지만 취함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헷갈리게 한다. 따라서 성공적인 자기절제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방법을 잘 습관화한다면 자기절제가 약해졌을 때 나를 다스리는 훌륭한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Tip〉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①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하나하나 꺼내 적는다. ② 유익한 일과 해로운 일을 구분한다. ③ 유익한 일들과 시간 약속을 한다. ④ 유익한 일들을 중심으로 미래의 일기를 쓴다. ⑤ 내일의 하루에 제목을 붙인다.
3. 마음의 균형
거센 풍파에 배가 흔들려도 중심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면 온전할 지어다
세종은 한글 반대 상소를 올린 6명을 편전으로 불러 한글 창제의 진정성을 호소하며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왕의 마음은 좀처럼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다 세종은 어느 순간 한글 창제의 옳고 그름을 넘어 그들의 태도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특히 김문과 정창손이 세종의 진노를 산 직접적인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 한글 창제를 찬성하다 돌연 반대론자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김문과 정창손, 그대들은 지난번에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전하, 그때는 소신이 미처 언문 제작의 옳고 그름을 살피지 못하여 그리 아뢰었나이다." "나라의 일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말을 바꾼다면 어찌 그대들을 믿고 정사를 돌보겠는가?" "망극하여이다. 전하. 하오나…" "그만두라. 사리를 돌보기보다 비판을 앞세우고, 또 말을 바꾼 연유조차 뚜렷이 대지 못하니 그 죄부터 물어야겠다. 정창손은 파직하고 김문은 말을 바꾼 연유를 국문을 통해 밝히도록 하라." 세종은 신하로서 진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두 사람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다음날 의금부가 국문 결과를 보고했다. "김문은 가장 가까이서 임금에게 자문을 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사실대로 아뢰지 않은 죄를 지은 바, 곤장 100대에 징역형 3년에 처하소서." 김문에 대한 국문 결과는 세종을 고민에 휩싸이게 했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다 해도 그간의 공을 생각하면 벌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문처럼 신조가 분명하지 않은 신하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결국 세종은 의금부에 명해 김문을 옥에는 두되 곤장 100대는 거두게 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김문은 양면성을 지닌 학자였다고 한다. "김문은 침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고, 경서와 역서를 연구하여 모르는 바가 없어 모두 탄복했으며 임금도 그를 중히 여겼다. 그러나 아집과 권모술수가 있어 안으로는 욕심이 많았고 아부하는 자를 좋아했다." 세종은 이런 김문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하여 썼다. 즉 장점인 학문적 성취를 살려 집현전을 통해 중히 쓰되 단점은 가급적 드러나지 않도록 이해득실이 따르는 위치와는 떨어져 있게 했다. 세종이 옥에 갇힌 김문을 두고 고민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잘못이 있다 하여도 그가 가진 재능과 그간의 공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결국 세종은 4개월이 지난 후 김문을 복직시키고 다시 집현전에서 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김문이 벌을 받은 것은 어찌 보면 세종의 개인감정이 앞선 결정일 수 있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의 내면을 추슬러 오래지 않아 이성적인 판단을 내놓았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마음 경영의 모습이다. 잘못은 바로잡되 그렇다고 신하가 가진 능력까지 사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통치철학을 실천한 것이었다. 김문은 이후 집현전 직제학에까지 올라 세종 시대를 아로새긴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았다.
마음경영의 핵심 중 하나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내면의 균형과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설령 감정적인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마음의 중심을 확고히 해야 한다. 살아가다 보면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머리는 똑똑한데 인간성이 영 엉망인 사람이 그렇다. 이런 사람과의 만남은 곧잘 우리 마음의 무게중심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시험한다. 이런 경우 세종은 그 사람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구분해서 보았다. 잘못에 대해서는 벌을 주더라도 그 사람의 좋은 점까지 사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면철학은 일견 쉬워 보이나 사실 따라 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구나 자신의 감정을 긁어놓는 인물이라면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곁에 두기 힘들다.
양면적 마음경영이 성공하려면 다음 세 가지를 잘 실천해야 한다. 첫째, 마음속 무게중심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래야 합리적 선택과 진취적 행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둘째, 성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웬만한 감정의 간섭 따위는 흘려보내는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이다. 셋째, 감정을 극복하는 방법과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따로 생각해야 한다. 전자가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라면 후자는 타인을 다스리는 일이다. 엄격한 자기관리를 통해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다스릴 수 없게 된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한쪽으로 기울었던 마음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마음속의 무게중심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4. 자기 적합화
나뭇잎에 꽃이 달릴 수 없듯 나뭇가지 끝에는 뿌리가 뻗어갈 수 없다
관직에 나아간 사람 치고 요직에 기용되는 것을 싫어할 이는 없다. 그런 면에서 강희안은 좀 별스러웠다. 그는 30대 젊은 나이에 의정부의 중요 직책에 추천된 일이 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끝내 자리를 마다해 그를 천거했던 대신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강희안은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고 불리었다. 특히 글씨는 중국 진나라의 서예가 왕희지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며 일면 괴팍스럽기까지 한 성격은 공직자로서 좀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세종은 이 개성 가득한 재주꾼을 어떤 자리에 기용할까를 두고 고심했다.
하루는 세종이 그를 불렀다.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 "소신이 어찌 보임을 청하겠나이까?" "너의 마음속에도 품은 뜻이 있을 터, 그것이 무엇이더냐?" "소신은 정치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더 좋사옵니다." "정사를 돌보는 일이 내키지 않는다. 너는 과인의 처조카이기도 하다. 그런 점이 불편한 것이냐?" "그런 게 아니오라 소신이 정사를 돌볼 만한 그릇이 못 되는지라." 강희안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네 입에서는 한 번도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구나." 세종은 강희안의 태도에 탄식을 머금었다. 원하는 직책이 없으니 마땅히 맡길 일을 찾기 어려웠다.
욕심 없고 능력이 뛰어난 인재라면 측근으로 쓰기 좋다고 한다. 사심 없이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은 강희안을 그렇게 쓰지 않았다. 높은 관직보다 오히려 그의 성격과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주려 애썼다. 실제 강희안은 사헌부나 형조 등 사람들과 부대낄 일이 많은 부서에 기용된 적이 없었다. 잠시 집현전 직제학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세종은 그에게 개인적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많이 주었다. 옥새에 들어가는 글을 쓰게 했고 『동국정운』을 편찬하는 일을 맡겼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일에도 참여시켰다. 부여된 일들은 대부분 그의 특기인 글쓰기와 그림, 글자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는 특히 풍경화를 잘 그렸는데 「여인도」와 「고사관수도」가 잘 알려져 있다. 저술로는 원예서인 『양화소록』이 유명하다. 세종이 신하로서의 역할로만 강희안을 썼더라면 그의 보석 같은 재능이 발휘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엔 제자리가 있다. 나뭇잎에 꽃이 달릴 수 없고, 가지 끝에서 뿌리가 뻗어날 수 없다. 사람에게도 제 자리가 있다. 영업직이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꼼꼼하게 관리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경영학에서는 사람이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는 것을 적합화라고 한다. 세종은 처음부터 일의 성격과 사람의 특성을 일치시키는 적합화 본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적합화 본능은 강희안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강희안은 뛰어난 자질에 비해 욕심이 없고 비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좋은 관직을 맡기고자 해도 시큰둥할 정도로 성격이 독특했다. 강희안은 세종이 그의 속성을 알아보아 적합한 곳에 기용하기 전에 이미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찾아내어 거기에 몰두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이를 자기적합화라고 부른다.
자기에게 적합한 일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 욕심을 앞세우고 둘째, 자리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