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와 찍새, 딱새들
손학규 지음 | 새로운사람들
01 대한민국의 희망을 쏘았다"헬기 띄워!"
LG필립스 수뇌부가 우리의 집요한 설득으로 파주를 저울질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확실하게 쐐기를 박을 요량으로 헬기 투어를 지시했는데, 헬기 투어를 지시한 데는 나름대로 몇 가지 숨은 뜻이 있었다. 우선,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입주 현장인 파주 전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고, 휴전선이 아주 가까이 있음에도 헬기를 마음대로 띄울 수 있을 만큼 안전하다는 걸 직접 체험하게 하고 싶었다. 또 파주에서는 휴전선 너머 북한지역도 가까이 보이기 때문에 만약 휴전선이 열린다면 북한을 통해 유라시아로 뻗어갈 육로 교통 역시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한편으로 인천공항과 인천 항만시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도 부각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침내 2003년 1월 28일, LG필립스 사장단의 최종 투자 결정을 유도하기 위해 헬기를 띄웠다. 헬기 투어를 통해 현장을 돌아본 구본준 사장과 론 H. 위라하디락사 부사장은 결국 100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를 대한민국, 파주 월롱에 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무조건 LG필립스를 잡아야 합니다!" / "저 손학규를 믿고 투자해주세요."
2002년, LG필립스는 총100억 달러를 투자할 만한 투자처를 찾고 있었다. 2002년 현실(우리나라 총 외자유치 규모는 91억 달러, 제조업은 24억3천2백만 달러)에 비추어볼 때 '투자예상액 100억 달러'는 도저히 놓칠 수 없는 대어(大魚)였다. 그런데 당시 LG필립스는 경기도 남부지역을 투자 대상 후보지의 하나로 꼽고는 있었지만, 중국과 대만을 우선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경기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한 전폭적인 행정지원과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인센티브를 바탕으로, 무조건 한국에 유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LG필립스의 투자와 관련하여 행정지원을 전담할 타스크포스팀(TFT)을 구성하면서, 특별히 'LG필립스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해석해 받아들이라.'고 거듭 당부했다. 각종 인허가나 중앙정부 협의 사항도 원 스톱으로 해결해주도록 하고, 더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중앙부처 책임자를 만나겠다고 공언했다. 외국인 투자지역으로 지정하여 국세와 도로용수 시설 등을 지원하는 대책도 마련했다.
그러면서 나는 LG필립스에서 후보지로 올렸던 김포나 화성지역 대신, 한강 이북인 파주지역을 새로운 투자처로 역 제안했다. LG필립스로서는 파주가 서울보다 개성에 더 가까운 접경지역이라 안보리스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라도 꼭 파주지역을 전략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만약 LG필립스 같은 세계 초일류기업이 파주에 큰 투자를 한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안보위험을 이유로 투자를 꺼리는 다른 외국자본을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전략적으로 파주 월롱지구를 선택한 이유는 또 있다. 경기도의 균형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남북교류협럭시대의 교두보 역할을 자임하여 중앙 정부의 협력을 얻어내는 데도 명분상 경기 북부지역이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한편 LG필립스는 마지막까지 대만과 한국을 놓고 저울질하면서 판단을 유보했다. 나는 매일같이 상황을 체크하며 조금이라도 LG필립스의 결정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 고심했다.
이때 나는 LG필립스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감춰진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 LG필립스는 우리가 유치를 추진하자 중앙 정부의 인맥을 통해 정황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랬더니 파주 일대가 군사 보호지역으로 묶여 있고 공배법(공업배치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개정되지 않는 한, 손학규와 경기도의 희망일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한 마디로 '파주 입지가 어렵다'는 얘기였다. 나는 실무자를 통해 "경기도, 아니 나 손학규를 믿어 달라."는 뜻을 강력하게 전했다. 그제야 다소 안심하며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MOU 내용에 '공배법 시행령이 개정되지 않으면 이 협약은 무효로 한다.'는 단서조항을 삽입하길 희망했다. 너무 이례적인 요구이기는 했지만 LG필립스의 불안감을 해소해주기 위해 조항 삽입에 동의했다. MOU가 체결된 후 나는 청와대와 직접 담판하여 공배법 시행령 개정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3년 7월 1일부터 12월 31까지 외국투자지분 50% 이상의 25개 첨단업종에 한해 수도권 입지가 가능하다'는 단서조항을 넣어 공배법 시행령을 개정함으로써 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어디 경기도 마음대로 되나 봅시다." / 실무자까지 직접 만나 설득하다
극도의 보안 속에 추진해온 사업인지라 사전에 중앙정부와 논의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예상대로 현실은 쉽지 않았다. 중앙부처의 협조도 협조지만, 군사보호지역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려면 군부대의 협조가 필수조건인데 사전에 약속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개인 토지 소유자들과도 의견이 조율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울러 LG필립스는 MOU 체결 당시 2005년 상반기까지 공장 착공이 이루어지길 희망했었는데, 얼마 후에 1년 단축을 요구하더니, 조금 지나자 6개월을 더 앞당겨 달라고 하였다.
나는 스피드 행정에 발동을 걸었다. 내가 일정 단축을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관련기관과의 협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경기도에 대외지원반을 구성한 것이었다. 실무를 맡은 경기도의 공무원들은 파주 LCD 산업단지 사업이 경기도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얼마나 크고 중요한 사업인지 설명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관계부처를 발이 닳도록 찾아다녔다. 나 역시 관계 장관을 수도 없이 만났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처음에는 싸늘하던 중앙부처에서도 적극적인 지원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정부합동지원반'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와 달리 군과는 문제 해결의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나는 군을 설득하기 위해 사단과 군단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고, 재정경제부와 산업자원부를 통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군 당국을 설득해줄 것도 요구했다. MOU를 체결한 지 꼭 한 달 보름이 지난 3월 말, 군 작전상 반드시 필요한 지역이라며 부동의 입장을 견지해오던 ○○군단장이 이날 입장을 바꿔 부지 입지를 수용했다. 군으로서도 고심의 흔적이 역력한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늘도 도왔다 / "천막 쳐요. 온풍기도 돌리고." / "땅 파요! 내가 책임지겠소."
2003년 7월 31일, 드디어 파주시 월롱면 일대 50만 평이 파주 LCD 지방산업단지로 지정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산업단지 지정 승인을 받았다고 한숨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업단지 조성사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실시계획이 승인되고 공장이 착공되기까지는 많은 난제가 놓여 있었다. 토지와 지장물의 보상 문제, 산업단지 내의 분묘이장 문제, 인프라 공사를 위한 국비 조기 확보 문제, 문화재 시·발굴조사 문제, 실시계획 승인 절차 등이 큰 문제였다. 그 중에서도 분묘 이장 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분묘 중에서도 경주 이씨, 안동 권씨, 장수 황씨, 밀양 박씨 등 4개 종중의 묘가 가장 설득하기 어려웠다. 실무를 맡은 담당자들은 수차례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제삿날이나 종중회의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참석하여 결정권이 있는 종중 어른께 넙죽 큰절을 올려가며 분묘 이장을 읍소했다. 심지어는 문전박대하는 종중 큰 어른 집 앞에서 사흘 동안 밤을 지새우며 기다린 적도 있었다. 결국 그 정성에 감복했는지 냉랭하기만 하던 종중 어른들의 마음도 서서히 녹아들어 절대로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종중 묘들도 이장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당월에 묘소 이전을 해야 한다며 10여 일 걸리는 행정 절차를 줄여달라는 식의 요구까지 들어왔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우연이었는지 그 달이 바로 음력 윤달이었던 것이다.
묘소 이장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이번에는 문화재 발굴 조사가 앞을 가로 막았다. 시간은 너무나 모자랐다. 작업 속도를 높일 대로 높였지만, 때는 바야흐로 겨울로 접어들어 땅은 얼어붙기 시작했다. 방법을 찾기 위해 대책회의에서 머리를 맞댔다. 그 때 경기지방공사 오국환 사장이 "천막을 치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비용이…” 하며 말끝을 흐렸다. '5천 평이 넘는 규모의 대형 천막을 만들자'는 말에 모두들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발굴 대상 지점에 5천 평이 넘는 초대형 천막을 치고 내부에 온풍기까지 동원해 언 땅을 녹이며 공사를 강행해 나갔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2004년 3월 18일, 기공식과 함께 LG필립스의 7세대 LCD 생산라인이 들어설 51만 평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첫 삽을 떴다. 통상적인 일정이었다면 2006년경에나 가능했던 공사 착공이 무려 2년 이상 앞 당겨졌던 것이다.
"현장에서 대책회의 합시다." / "좋습니다. 공청회 다시 합시다!" / "손 지사님, 기쁘시겠습니다."새로운 기술투자에 의해 업계 판도가 갈리는 첨단산업의 특성상 LG필립스에서는 계속 시간 단축을 요구해왔다. 당시의 인프라 공급 예정 일정은 2006년 6월경이었다. 그렇잖아도 빠듯한 일정인데 1년이나 더 줄여달라니 일정상 무리한 요구가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NO'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검토 결과 폐수처리장, 전력, 도시가스 등은 LG필립스가 요구하는 기한까지 겨우 맞출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으나 도로시설과 공업용수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범정부 차원의 협조체제 구축에 나섰다. 파주시, 한국수자원공사, 한국전력공사, 서울도시가스 등 유관기관과 건설교통부를 비롯한 중앙부처에 긴급 SOS를 타전했고, 현장 대책회의(경기도청이 아니라 직접 파주 현장에 모여 대책회의를 하는 것)를 제안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모든 관계자가 현장에 모여 회의를 하면, 절박성도 함께 공감하고 결정도 그 자리에서 내릴 수 있어 무척 효율적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덕분에 LG필립스가 제시한 2005년 6월까지 용수 문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항을 해결할 수 있었다.
본 단지 조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협력단지 조성이었다. 파주 LCD 지방산업단지와 가까운 문산의 당동(19만 평)과 선유(40만 평)가 대상지였다. 그런데 협력단지 조성 사업이 승인되자 토지 수용을 예상한 주민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당동의 경우, 지역 환경단체도 함께 나서서 거세게 반발했다. 이즈음 나는 직접 당동을 찾아 주민설명회를 갖기로 했다. 우리는 이미 공청회를 마쳐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상태이므로 주민들이 협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주민들은 수용할 수 없으니 공청회를 원천 무효로 하고 다시 논의하자는 입장이었다. 서로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다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만큼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을 때 나는 잠시 휴식을 하자고 제의했고, 휴식 시간을 이용해 실무 책임자와 상의했는데, 그들은 다시 공청회를 여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실무 책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공청회를 다시 열겠다고 선언했고, 이후 이뤄진 공청회에서 다소 시간은 걸렸지만 갈등 없이 주민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마침내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2006년 4월 27일, 파주 LCD 클러스터(단지)의 LG필립스 LCD 7세대 공장 준공식이 열리는 자리에서 나는 감격 어린 축사를 했다. LG필립스 프로젝트의 위대함은 결코 그 규모의 거대함에만 있지 않다. 투자의향서 체결 이후 통상 4년이 걸리는 공장 착공까지의 절차를 불과 13개월 만에 끝내고, 양산체계를 갖추기까지 만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분묘 이장, 엄동설한의 문화재 발굴,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이게 했던 월롱산 정상에서의 군 작전성 협의…….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건설교통부, 환경부, 국방부 등 중앙부처와 유관기관들, 그리고 파주시민들의 성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결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밤낮을 잊고 휴일도 없이 이 프로젝트를 위해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일한 경기도와 파주시의 공무원들, 경기지방공사 직원들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 파주가 웃는다고 한다. 일자리를, 그것도 고임금을 받는 첨단업종의 일자리를 만들어 국민들의 얼굴에 웃음을 주는 일이야말로 국민이 정치하는 이들에게 바라는 가장 소박한 바람일 것이다.
02 지구 열 바퀴, 투자유치의 현장에서"오우! 크레이지 스케줄"
외국 기업 투자 유치를 위한 출장 스케줄은 숨 돌릴 틈도 내기 힘들다. 티켓을 체크하던 미국의 항공사 직원들도 우리의 일정표를 보더니 "오우! 크레이지 스케줄!"이라며 기겁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기도 해외투자유치단에 한번이라도 동행했던 사람들에게 다음에 또 함께 가자고 하면 대부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사양한다.
스미토모와 (주)농심의 토지 맞교환
스미토모화학의 투자 프로젝트는 2003년 6월 산업자원부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미 포승국가공단 4만5천 평에 공장을 세워 운영하고 있던 스미토모화학의 한국 자회사인 동우화인켐이 5억 달러 규모로 공장을 확장하고자 하는데 경기도가 확장 부지를 물색해줄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부지를 물색하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만, 현재 가동 중인 공장의 인접지역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스미토모가 선호하는 그 인접 지역의 땅은 농심에서 공장 신설을 위해 이미 매입해버렸다는 점이었다. 당시 농심은 매도 가격으로 조성원가의 2배를 제시하는 스미토모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스미토모 입장에서는 추가 투자가 절실하지만 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한국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투자처를 옮기려는 계획을 검토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의논을 거듭했다. "토지 맞교환은 어떨까요?" 누군가의 제안에 무릎을 탁 쳤다. 그러니까 농심이 공장 설계를 마치기는 했지만 아직 빈 땅으로 남아 있으니, 농심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공단 부지를 제공하는 토지 맞교환이 이뤄질 수만 있다면, 스미토모의 투자를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낱같은 가능성으로 경기도가 어렵사리 찾아낸 대토는 토지공사로부터 매입 협상을 벌이고 있던 포승공단 가장자리 땅 9만 평이었다.
실무선을 통해 일차적으로 접촉해본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핵심은 오너인 신춘호 회장의 결단밖에 없었다. 한쪽으로는 신 회장과 가까이 지내는 기업인을 통해, 다른 한쪽으로는 신 회장의 가까운 인척을 통해 "내가 직접 만나 뵙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얼마 후 예상했던 대로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왔다. 나는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본격적으로 농심과 접촉하기로 하고, 2003년 9월 농심 사장을 직접 만나, 일자리 창출과 외국첨단기업유치에 있어서 경기도가 처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농심의 대국적인 용단을 부탁했다. 뜻을 전한 다음 성사 여부를 놓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마침내 농심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인 신춘호 회장으로부터 "토지 맞교환에 동의하겠다."는 고마운 말씀이 날아들었다. 외자유치와 일자리 창출이란 대의명분을 위해 내린 살신성인의 결단이었다. 한 민간기업 오너의 애국심과 1%의 가능성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던 공무원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맨땅에 헤딩하기 - 지멘스 R&D센터
2003년 외국첨단기업 유치 초기 단계에 경기도 투자진흥팀 직원들은 소위 맨땅에 헤딩하기식의 방법을 택했다. 신문기사를 살피고 국내외 첨단기기 박람회가 열리는 곳마다 직원들이 외판사원처럼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