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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서 만나는 처칠

김형진 지음 | 기파랑
I. 20세기 최고의 영웅 처칠



처칠은 생전에 수많은 연설을 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이라는 제목의 연설이다. 그가 이 연설을 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어, 나치 독일이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을 파죽지세로 굴복시키고 유럽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쟁 준비에 소홀했던 영국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고립된 채, 끝이 보이지 않는 파국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자원을 수입에 의존했던 영국에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석유나 고무와 같은 자원도 없었다. 게다가 식량마저 부족했기 때문에 전쟁에 돌입한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영국에게 히틀러가 평화와 안전을 약속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처칠은 피가 끓는 20대나 30대가 아닌 예순다섯 살의 노령으로, 당시의 평균수명에 비추어 볼때 이미 사회에서 은퇴해야 할 나이에 있었다. 그러나 처칠은 "승리하지 못하면 죽음만이 남을 뿐"이라는 각오로 "어떠한 희생과 공포를 무릅쓰더라도" 싸우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한 처칠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히틀러는 그가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이상이 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전해진다. 히틀러는 처칠을 미치광이로 봤지만 오늘날 세인의 평가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미치광이는 히틀러이고 처칠은 영웅이자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처칠은 생전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던 인물이다.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시골 소녀가 편지겉봉에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분에게'라고 적은 편지가 영국의 처칠 수상에게 배달되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것은 처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평가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인류를 나치의 폭압으로부터 구한 영웅이며 전후 세계평화의 기반이 된 국제연합과 유럽연합을 제창한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많은 전기와 자서전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제 모습은 언제나 베일에 가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그것은 처칠이라는 인물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상적인 이해의 폭을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순다섯 살이 될 때까지,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지워져 가던 그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을 즈음에야 드디어 빛을 본 것도, 당시 사람들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부터 들어서는 정부마다 정체성의 위기를 언급하며, '나라 바로 세우기', '제2의 건국', '과거사 청산'을 부르짖고 있다. 우리의 과거와 과거 속의 인물들을 청산하다보니, 오늘날 우리에게는 지표를 삼고 따를 수 있는 큰 인물 하나 변변히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지난 십여 년간 '지지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위대한 대통령'들이 계속 나오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나는 처칠이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명문대학을 나오고, 부모 덕분에 순탄하게 살았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좌절에 빠져서 인생을 포기했을 만큼의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다. 그는 아무 흠도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완벽한 지도자가 아니라, 평생토록 고칠 수 없었던 수많은 결점을 가지고 고단한 삶의 고비를 넘어갔던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그는 결코 행복하게 자라지 못했고, 장년이 되었을 때 항상 위기와 도전의 나날을 보냈으며, 노년이 되어서까지 갈등과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처칠은 실패한 인생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책에서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처칠이라는 역할모델을 통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비결을 찾아보려고 했다.



II. 절망의 바다를 넘어서



가정환경

처칠의 아버지 랜돌프는 영민하고 유능하다는 평을 받았고 비교적 관운도 좋아서 37세에 영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재경부 장관이 되었다. 랜돌프는 분명 열심히 살았지만, 그의 사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에 대해서도 살갑고 따뜻한 편이 아니었고,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맏아들 처칠에 대해서도 그는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들을 격려하거나 용기를 북돋아 주기는커녕 항상 한심하게만 생각했다. 당시 영국 귀족 집안의 자제들은 목사나 변호사, 혹은 군인이 되어 사회지도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내에게 처칠이 목사가 되기에는 성격이 너무 안 좋고 변호사가 되기에는 머리가 나쁘니 군인밖에는 할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아들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다. 나아가 자기 아들을 '전혀 쓸모 없는 놈'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모든 증거를 검토해 보면 랜돌프는 자식에 대해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냉혹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어린 처칠이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조차 금지하고, 반드시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



혹시 랜돌프는 처칠을 자기 핏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처칠의 부모는 금슬이 썩 좋은 편도 아니었고 게다가 어머니 제니는 워낙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으므로 그런 의혹을 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자기 생활을 즐기기에 너무 바빴던 제니는 아이들의 양육을 유모와 하인에게 맡겨 버린 채,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들이 일곱 살 무렵이 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에 보낸 뒤, 찾아가지도 않았다. 아이들에게 돈을 보내 주고 가끔씩 편지를 쓰는 것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처럼, 아들을 사랑하긴 했어도 평범한 어머니들이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과는 많이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그 때문인지 장남 처칠과는 일찍부터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고 일체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편한 사이로 지냈다. 이미 귀족 사회의 사교모임이 주는 즐거움을 알아 버린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결코 씀씀이를 줄이지 않고 늘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



처칠의 아내 클레멘타인 호지어는 처칠보다 열한 살이나 어렸다. 그녀에게는 정치적 배경도, 재산도 없었지만 처칠은 그녀를 두 번째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처칠과 클레멘타인은 애초부터 성격이 달랐다. 처칠은 돈을 헤프게 쓰고 사치스럽고 친구들을 좋아했지만 클레멘타인은 구두쇠에 비사교적이었다. 또 처칠은 섬세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성격이었지만, 클레멘타인은 매사에 꼼꼼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리고 처칠은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잠들었지만 클레멘타인은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었다면, 불행하게도 두 사람 모두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는 점이다. 처칠은 가부장적이고 지나치게 남자다운 성격이었고, 클레멘타인 역시 얌전하거나 순종적인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혼 초부터 둘 사이에는 싸움이 잦았다. 이처럼 성격적인 차이가 두드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초기에 두 사람 사이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은 각방을 쓰기 시작했고, 다시는 같은 방을 쓰지 않았다.



냉담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처칠 자신은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했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항상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많지 않았으므로, 자녀 문제는 대부분 클레멘타인의 몫이었다. 특히 처칠 가의 사람들은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이 남달리 강했는데, 재능이 있었던 처칠과는 달리 그의 자녀들은 그런 욕망에 부합하는 재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늘 우울증, 알코올 중독, 불행한 결혼 생활과 이혼과 같은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았다.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불같은 성격과 추진력, 강한 자존심과 무모함뿐만 아니라, 술과 담배에 대한 탐닉과 같은 단점들도 공통적으로 물려받았다.



성적

위대한 인물의 개인사를 보면, 학창시절부터 뛰어난 능력과 출중한 면모로 주목을 받지만, 처칠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학창 시절의 처칠은, 훌륭한 인재를 배양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공교육의 전형적인 실패 사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처칠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게다가 수업태도마저 좋지 않아서 늘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문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제인스 흄스가 쓴 『처칠』에 따르면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에만 열중했기 때문에 학교 성적이 나빴고, 게다가 교사들에게도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자주 교장실로 끌려가 엉덩이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몇 시간 동안이나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체벌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처칠의 학교생활이 그토록 힘들었던 것은 물론 그가 공부에 소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집이 셌기 때문에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던 교사들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당시 학교교육에서는 무엇보다도 규율과 질서가 중요시되었지만, 처칠은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규칙은 지키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칠은 고등학교 성적이 나빴기 때문에 다른 명문가의 청년들처럼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과 같은 일류 학교를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샌드 허스트 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두 번이나 시험에 낙방했다. 아버지로부터 "전혀 쓸모없는 놈"이라는 심한 꾸지람을 듣고 난 처칠은 하는 수 없이 고시원에 들어가 6개월 간 과외 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으며 세 번째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수업의 내용을 전부 외울 수 없었던 처칠은 세 번째 보는 시험에도 합격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사관학교 입시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 중에서 하나를 정해 그 나라의 지도를 자세히 그리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처칠은 고민을 하다가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수많은 나라 중에서 뉴질랜드를 찍어서 집중적으로 준비했다. 그런데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입시에서 그 많은 나라 중 뉴질랜드를 그리라는 문제가 나왔던 것이다. 이 행운에 힘입어 처칠은 기적적으로 세 번째 시험에 간신히 합격했다. 만약 이때 처칠이 세 번째 시험에 낙방했다면 아버지가 취직을 주선해 준 런던의 어느 은행에서 평범한 은행원으로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처칠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26세 때부터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인으로 일생을 보냈지만 말년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 돈 문제로 고통을 받았다. 처칠은 그 당시 다른 정치인들처럼 병원이나 사회복지 시설에 기부를 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어떤 원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늘 돈 문제로 시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처칠의 문제는 바로 그의 소비성향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수입에 맞추어 돈의 씀씀이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씀씀이에 맞추어 수입을 조절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돈의 씀씀이가 매우 헤펐던 것이다. 수입이 별로 없을 때에도 잦은 국내외 여행, 값비싼 술, 쿠바산 시가 등 사치스럽게 살면서 듬뿍 듬뿍 돈을 써댔다. 뿐만 아니라 사교 파티도 자주 열고 원정 도박에도 빠졌기 때문에, 항상 돈이 모자랐던 것이다. 사실 처칠의 이런 낭비 습관은 집안 내력이다. 낭비벽이 심했던 처칠의 부모도 절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글을 많이 써도, 1931년부터 10년 동안은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실업자로 살았기 때문에 생활은 점점 더 곤궁해져만 갔다. 처칠이 수상이 되기 직전인 1938년에는 빚에 몰린 나머지 그토록 아꼈던 차트웰 저택을 경매에 내놓고, 월급이 나오지 않는 하원의원 자리를 그만두고 무슨 일이든지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다. 이때 만약 돈 문제 때문에 하원의원직을 그만두었다면 1940년에 그는 결코 수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수상으로 재직한 동안에는 빚 문제가 그토록 심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1945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다시 실업자가 되자, 빚 독촉이 더욱 심해졌고 다시 차트웰 저택을 경매에 내놓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세계를 구한 영웅 처칠이 집 한 칸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를 딱하게 여긴 독지가가 차트웰 저택을 사서 처칠이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월세로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평생 그를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빚 독촉과 돈 걱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여든 살이 넘어서였다. 그제야 비로소 처칠은 책의 판매수입으로 빚을 갚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격

처칠은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정치계에 뛰어들어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사귀며 항상 사회의 유명인사로서 살았지만 결코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는 내성적이고 외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보수당에서 자유당, 다시 보수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인도, 쿠바, 수단, 남아프리카 등 많은 지역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지만 평생 동안 절친한 친구란 없었다. 처칠이 히틀러나 루스벨트와 같은 그 시대의 다른 지도자와 달랐던 점은 의회 안이나 의회 밖에 자신을 위한 상근 조직도 없었고 맹목적 충성을 바치는 추종자도 없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은 마당발이어서, 아는 사람도 많고 친한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 드러내놓고 혐오의 감정을 나타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정치인은 붙임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지역구에 형님, 아우가 수백 명씩 되기도 한다. 그런데 처칠은 평생 지역구 의원을 했고 수많은 선거를 치렀지만, 좋고 싫음이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느니 차라리 혼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처칠의 주치의였던 모란 박사는 훗날 회고록을 통해서 처칠이 평생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처칠의 우울증은 이미 서른일곱 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배를 타고 여행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바닷물 속에 뛰어들까 봐 여객선의 난간 근처에 있기조차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행로가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이가 든 뒤에도 우울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 다녔지만 증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세계의 영웅이 된 노년에도 우울증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1945년에 총선에서 패배했을 때는 물론이고, 1955년에 마침내 공직에서 완전히 은퇴한 뒤에도 수시로 찾아오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일을 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토록 열심히 일에 몰두했던 이유도 사실은 언제 닥쳐올지 모를 우울증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처칠은 무척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쉽게 흥분했고, 감정이 격해지면 공식 모임에서도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예나 지금이나 무릇 위대한 지도자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 정치가가 아니더라도 성인 남자가 그처럼 공공연히 눈물을 흘리는 것은 누가 봐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영화를 보다가도 눈물을 쏟고, 연설 도중에도 감정이 고조되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성격은 전쟁 중에도 드러나서, 장군들에게 전투개시 명령을 내릴 때에도 사상자들부터 먼저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처칠과 맞서 싸웠던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강한 자는 항상 옳다. 약한 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잊어라." 외모관리에 철저했던 히틀러와는 달리, 처칠은 세밀한 자기 연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처칠이 누구 앞에서나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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