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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VS 이명박

김규 지음 | 국일미디어
제1부 21세기 한국의 지도자는?



시대는 인물이다. 해방공간은 김구와 이승만, 김일성의 시대였으며 1960∼70년대는 박정희의 시대였다. 1980년대는 전두환, 노태우, 3김의 시대였고, 1990년대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시대였다. 이들은 해방 후의 우리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며 그 흐름을 주도해나갔다. 나아가 그들의 행보 하나하나가 역사적 사실로 기록될 만큼 중대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이름을 뺀 채 해방 후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 자체가 어려우리만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민중의 삶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주요인물의 궤적을 탐색하고 인과관계를 해석하는 추적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자명하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역사의 흐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집단의 이데올로기와 이익을 대변하며 그 정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얼마 후 새로운 인물을 선택해야 할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선택된 인물은 한 시대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시대를 만들어 가느냐는 바로 우리의 몫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정당사회학』이라는 저서에서 대표자와 국민들의 관계가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를 지배하고, 위임받은 자가 위임한 자들을 지배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맞는 이야기다. 민중들은 어렵사리 지도자를 뽑아놓고, 이번에는 그 지도자를 몰아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민중들이 권력을 교체하는 과정은 정말 처절하리만치 눈물겹다. 여기에는 엄청난 희생과 재화가 소모된다. 그들은 또다시 자기들이 뽑은 지도자에 의해 철저히 지배당하며, 또다시 "잘못 뽑았다"고 땅을 치며 후회한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음 주기의 선거를 위해 이를 갈며 투쟁을 전개한다. 이것이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빚어지고 있는 '국가지도자의 아이러니'다.

대의민주주의의 이런 부조리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현대 자본주의는 아직 더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이 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의 민주주의가 계속되는 한 '국가지도자의 아이러니'도 계속되고, 잘못된 선택이라고 여기는 집단들의 투쟁도 계속될 것이다. 반복적이고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할 대표자를 뽑지 못한다면, 그 대가는 국민 스스로가 치러야 한다.



각 기관의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해보면 국민들은 '경제회생'과 '각 집단의 통합과 조정'을 국가의 우선과제로 꼽고 있다. 맞는 이야기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만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 중 어떤 과제를 더 우선시하느냐는 결국 국민들의 선택이다. 만약 국민들이 경제문제를 상대적 우위로 설정한다면 차기 국가 지도자로 경제를 살릴 인물을 뽑을 것이다. 그보다 국가를 통합하고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인물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하면 통합형 국가지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에는 과연 어떤 국가지도자가 필요할까? 각종 조사결과를 종합해보면 주요 공통분모는 다음과 같다.

1) 경제를 살려야 한다.

2) 국가와 사회 각 집단을 통합, 조정해야 한다.

3) 강력한 리더십을 갖추어야 한다.

4) 국정관리능력을 갖추어야한다.

5) 국가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6) 전문성과 지적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7) 국제적 식견과 외교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과연 누가 이러한 국민의 여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국가지도자를 선택함에 있어 철저한 분석과 검증 대신, 정서적 친근성과 지역성 등에 크게 의존해왔다. 후보자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무엇인가, 어떤 경제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지향하는 국가적 비전은 무엇인가를 따지지 않고, 어디 출신이며 어떤 정치적 집단에 속해 있는지를 꼽아왔다. 즉 바람몰이에 휩싸여 표를 던지곤 했던 것이다. 국가지도자에 대한 검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 선진국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국가지도자의 자질을 검증한다. 그들의 검증방법은 지나치리만치 냉혹하다. 또한 이렇게 하여 검증된 내용은 숨김 없이 공개된다. 이런 과정을 어렵게 통과해야만, 지도자가 되기 위한 후보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국가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사상의 공개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이를 통해 도덕적 결백성과 자신의 정책방향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 우리 모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소주잔도 기울여가며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결국 실패한 지도자를 뽑아내는 국민은 실패한 국민이다.



제2부 고건 - 달인인가 신드롬인가



고건이 태어난 1938년의 시국은 몹시 어지러웠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대륙침략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연희전문학교 교수에 임용된 고형곤 교수의 집안은 비교적 안정돼 있었다. 부인 장정자 여사의 친정집이 비교적 부유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교수로 임용되면서 낳은 아들 이름을 직접 지으면서 고 교수는 놀랍게도 고려 태조 왕건의 이름자를 땄다. "어린애 보고 왕 되라고 한" 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와 대비해 볼 때 공격이나 싸움보다는 만 사람의 중지(衆志)에 따라 추대된 그 인생 역정의 모양새가 좋아 보여" 지은 이름이었다. 만약 이름이 사람의 역정에 영향을 미친다면 아버지의 예언대로 고건은 이름처럼 살고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특기할 만한 사항은 김구 선생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1946년 6월 26일 백범 김구는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때 장례식을 보면서 '김구 선생님 같은 애국자가 한번 돼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나중에 그때의 결심이 결과적으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경기고 졸업을 앞두고 고건은 서울대 정치학과 응시를 결심했다. 아들의 의견을 들은 고 교수는 "뭐 하러?" 하고 물었다. "김구 선생 같은 애국자가 되려고요." "그러려무나." 고 교수는 더이상 되묻지 않았다. 학생회장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졸업이 다가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졸업 후의 진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문리대를 나와서 시험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고등고시, 한국은행, 신문사 세 군데였다. 떳떳하게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디든지 시험을 보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를 들어갈까 고심한 끝에 고시 쪽으로 방향을 잡고 뒤늦게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1961년 12월 5일, 고건은 마침내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다. 고건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고건이 지역개발담당관을 맡을 무렵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때 박 대통령을 처음으로 직접 대면하게 된다. 그가 먼저 착수했던 일은 '산림녹화 사업'이었다. 고건은 성공사례를 슬라이드로 만들어 박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 석상에서 보고했다. 박 대통령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박 대통령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치산녹화 10개년계획'을 수립하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후 고건은 새마을운동의 전담자가 되어 박 대통령이 제시하는 방향에 따라 새마을운동을 설계하였다. 새마을운동 추진에 대한 고건의 기여도는 매우 높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새마을운동의 초석을 다지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많은 성과를 도출해낸 능력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어떤 분석가들은 새마을운동을 "박 대통령이 머리를 만들고 고건 국장이 몸통을 만들었다.", "박 대통령과 고건의 공동작품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고건은 1975년 11월 12일 전라남도 지사로 발령되었다. 그 때 나이 37세. 건국 이후 최연소 도지사였다. 고시 동기 중 가장 빠른 승진 기록이었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 파격적인 인사는 박 대통령이 고건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여와 업적을 보상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그간 쌓은 경험을 현장에서 직접 펼쳐보라는 의미도 숨어 있었다. 고건의 도지사 임명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고건이 전남도지사로 임명되자 아버지 고형곤 박사는 급히 가족, 친척을 서울 집으로 소집했다. 변호사였던 장남 고석윤과 고건은 물론 전북 옥구에 살던 중량급 친척 수명이 참석했다. 고 박사는 이 모임을 '비상계엄 가족회의'라 명했다. 고 박사는 돈의 유혹이 많은 도백이란 자리가 아들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일생 중 단 한 번의 훈시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첫째, 술 먹고 실수하지 마라.

둘째, 청렴해라. 부패의 과정을 살펴보면 로비하는 놈이나 그에 응하는 공무원 둘 다 나쁘지만 현실적으로 냉정히 따지자면 로비하는 놈이 더 나쁘다. 상대 공무원은 오히려 멍청한 놈이라고 봐야 마땅하다. 공무원은 몇 푼 받아먹고 어리석게 이름과 직위를 팔지만 로비하는 쪽은 그 몇 십 배 몇 백 배의 이익을 정확히 남기기 때문이다. 절대 '농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셋째, 파벌을 만들지 말고 줄서지 마라.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개인에게 충성하지 마라. 예전에는 충성의 대상이 군주였다면, 지금은 국가다. 대통령이나 상사가 아니다. 대통령 얼굴만 쳐다보는 고위관리들의 작태를 닮지 마라.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월 고건을 정무 제2수석비서관에 임명했다. 고건은 도지사 출신으로 처음으로 정무 2수석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러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졌다.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14일, 비서실을 개편하며 고건에게 정무 1, 2수석 자리를 합쳐 정무수석을 맡으라고 했다. 고 수석은 정치분야 중 제도와 공식적인 사안에 집중하였다. 1980년 5월 17일은 토요일이었다. 잠시 후 비서실장이 수석들을 불러모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국보위에 대한 건의는 연기시켰다."는 이야기를 했다.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는 군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표를 낸 고건은 성북구 장위동 집에서 외출을 삼가고 주로 독서를 하면서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뉴스와 광주로부터의 전화로 알게 됐다. 5월 20일경 밤늦게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추기경은 "고 지사가 청와대에 있는데 어떻게 광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라고 하소연하였다. 고건은 "사표를 제출하고 민간인 신분이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며 울먹였다.



고건은 1985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던 중 1987년 5월 26일 내무장관에 발탁되었다. 고건의 내무장관 입각 보도를 듣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정권말기인데 왜 거기에 들어가느냐고 다들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고건의 생각은 달랐다. 어려울 때일수록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경찰 병력을 투입해서 24시간 내에 명동성당 사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고 내무장관은 당시 대책회의에서 88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주고, 바티칸이 반발하면 경제에 큰 피해가 우려되며, 강경 진압이 되면 자칫 계엄령 사태로 번질 수 있다는 점 등 3대 불가론을 펼치며 이를 반대했다. 이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여 전두환 정권은 실질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고건 내무장관의 재임기간은 불과 49일이었다. 뒤늦게 막차를 타서 짧은 기간 동안 호된 고생을 치렀으니 내무장관 재임은 영화가 아니라 사서 한 고생이었다.



1988년 10월 2일 올림픽이 폐막한 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울시장직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지방행정은 그의 전문영역이었다. 누구누구 사람이라는 편 가르기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전문 행정관료로서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건설부는 1989년 3월 서울시 수서, 대치 지역을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지정했다. 수서사건은 당초 특별분양을 받은 민간조합에 경제기획원, 서울지방국세청, 군부대, 언론사 등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특혜의혹이 확산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고건 시장은 수서 부지 고도제한을 해제해 고층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하라는 청와대와 국회 쪽의 압력을 끝까지 뿌리쳤다. 그러다 1990년 12월 27일 노재봉 내각이 들어서면서 고건 시장은 전격 해임되었다.



고건은 1997년 3월 5일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당시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보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수성 총리의 후임이었다. 고 총리의 발탁은 임기만료를 앞두고 민심수습과 국정운영의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됐다. 김 대통령 역시 대북 문제 등 안보와 경제 살리기에 충실하고, 내각은 총리에게 맡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야당 역시 고건의 총리 지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국회임명동의안도 무난하게 처리됐다. 이로써 고 총리는 1962년 2월 공무원에 임용된 지 35년 1개월 만에 최고위직 공무원 자리에 올랐다. IMF 사태가 터진 직후인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고 총리는 선거관리에 집중했으며 경제문제는 주로 임창열 부총리가 맡았다.



정권이 바뀌면 총리를 비롯해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고 총리는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총리직을 그만둘 수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무총리로 지명한 김종필 씨의 국회 임명동의안 처리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국무위원 임명이 법적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무총리의 제청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주일간 총리직을 유지하면서 새 정권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하고 퇴임했다.



국무위원 제청 문제로 김대중 정부와 인연을 맺은 고건은 1998년 봄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제의받는다. 1998년 6월 4일에 실시될 지방선거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였다. 선거 결과 고건 후보 183만 8,348표(52.9%), 최병열 후보 151만 2,854표(43.5%)를 기록하여 32만 5천여 표 차이로 고건 후보가 제2기 민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취임 후 시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바로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였다. 상암동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축구 전용경기장을 만들고 쓰레기 매립지로 버려져 있던 난지도 땅 105만 평에는 월드컵 공원을 조성해야 했다. 그는 이 모든 사업을 차질 없이 수행해냈다.



고 시장의 퇴임을 앞두고 2002년 6.13 지방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전국 16개 광역 자치단체 가운데 현직 단체장이 스스로 불출마를 결심한 경우는, 고 시장이 유일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선택을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분위기는 달랐다. "당에 대한 애정이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이라는 등의 노골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2002년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월드컵 폐막식이 열리던 날, 고건 시장은 4년 동안의 시정을 마무리하고 조용히 집무실을 정리했다. 청렴을 신조로 삼는 고 시장의 손에는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나올 때도 달랑 가방 하나뿐이었다. 대신 그의 가슴 속에는 시청 앞에 메아리친 "오! 필승 코리아"라는 함성이 가득 차 있었다.



2003년 2월 25일 출범하는 참여정부는 총리 인선에 고심했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대선 때 '책임총리제'를 공약한 바 있었다. 대통령과 내각이 권력을 분점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의 전 단계를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개혁대통령, 안정총리를 기본 골격으로 적임자를 물색했다. 선상에 떠오른 사람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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