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 황하를 거스른 개혁자
미우라 쿠니오 지음 | 책세상
희세(希世)의 이인(異人)왕안석은 보기 드문 걸물이었다. 11세기 중국에 돌연 혜성처럼 나타나, 미증유의 대개혁을 단행하고 구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어버린 후, 긴 여운을 남기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간 정치가이다. 한 번 읽은 것은 곧바로 암기하여 평생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고, 유불도(儒佛道) 삼교에 통달한 학식은 넓으면서도 간결했으며, 왕학(王學, 왕안석의 학문 체계)이라 불리는 학문 체계를 수립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또 정치적 적대파조차 경탄시켰던 시인이자,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문장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천재는 평탄한 생애를 보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관료로서 최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것에 만족할 만큼 세속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실제로 재상의 지위에도 집착하지 않았으며, 때가 오면 마치 헌신짝 버리듯 재상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강녕(남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끊임없이 세속과 싸워야 했던 60년 폭풍의 생애를 요란한 비난 속에서 마쳤다. 왕안석의 불행은 자신과 현실의 괴리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현실과 원만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지 못한 데 있었다.
목련꽃왕안석이 태어난 곳은 임강(지금의 강서성 청강현)이지만, 왕씨 일가는 대대로 무주 임천(강서성 임천현)에 정착해 살았다. 그러나 왕안석과 임천의 인연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그가 일종의 감상과 함께 떠올렸던 것은 언제나 어머니의 마을인 금계였는데, 금계는 임천에서 약 6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오석강은 안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근처에 오당이라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가득 차 있었고, 그 부근은 목련꽃의 명소로, 봄에는 마치 눈이 내리는 듯했다. 눈을 감으면 안석의 머릿속에는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 꽃그늘 밑에 늘어서서 산책하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곤 했는데, 안석이 산문의 가작 <중영을 슬퍼하다(傷仲永)>의 착상을 얻은 곳도 금계였다.
어머니 오씨는 학문을 좋아했고 대담했으며 상냥했다. 아버지인 왕익(王益)은 성실한 관리였는데, 지방관을 전전했고, 강녕부 통판으로 재직하던 중에 아들의 과거 급제조차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때 안석은 겨우 19세였는데, 이복형이 있었지만 냉엄한 현실은 그에게 가장으로서의 자각을 강요했다. 조모도 아직 건재해 있었고 아래로 네 명의 남동생과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이듬해 안석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로서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것은 사회라는 외부의 현실과 가정이라는 내부의 현실 쌍방에 걸친 긴 분투의 시작이었다. 안석의 결혼으로 부양해야 할 가족은 더 늘었다. 아내는 외가 쪽 먼 친척으로 역시 오씨였다. 오 부인은 총명하고 기품이 있었으며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안석은 부인과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첫 딸은 요절했다. 안석이 34세 때, 서주 통판의 임기가 만료되어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안석으로서는 다시 한번 더 지방관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했지만, 조정은 그를 집현교리(集賢校理, 경적(經籍) 관리 담당)라는 관직(館職, 특전적 영예직)에 임명하고자 했다. 매우 명예로운 자리였고 장래를 생각하면 더더욱 배명해야 했지만, 안석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왜냐하면 지방으로 나가 백성들의 생활에 좀 더 가깝게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집안 노인과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생각도 절실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안국(安國), 안세(安世), 안례(安禮), 안상(安上) 네 명이었는데, 안석이 41세 때 셋째인 안례가 먼저 과거에 합격하고, 48세 때는 바로 아래의 안국이 진사로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했다. 둘째와 막내는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관료로서 자립했다. 아이는 넷을 두었는데 모두 개성이 강했다. 안석은 화려하면서도 예리한 도시풍의 장남 방을 특히 사랑했는데, 안석이 47세 때는 진사에 급제했다. 그 후 왕방은 순조롭게 승진하여 아버지에게 가장 믿음직스러운 협력자가 되었다. 차남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고, 오안지(吳安持)에게 시집간 장녀는 풍부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그만큼 상처 입기 쉬운 감수성도 갖고 있었다.
마음의 벗을 찾아서왕안석에게는 특정한 스승이 없었다. 아마도 훌륭한 정훈(庭訓, 가정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왕안석에게는 선(禪)에서 말하는 무사독오(舞師獨梧, 스승의 가르침 없이 혼자 힘으로 깨닫는다는 뜻) 같은 데가 있어, 그의 스승은 오히려 책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잠을 자고 밥을 먹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독서에 대한 이런 정열은 평생토록 시들지 않았다.
책 다음으로 왕안석의 스승은 훌륭한 친구들이었다. 증공(曾鞏)은 그 가운데 가장 오랜 친구다. 증공은 관리로서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문학가로서는 불후의 인물이 되었는데,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당대의 한유, 유종원(柳宗元), 송대의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왕안석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만년에 결별하게 된다. 증공이 안석보다 3년 일찍 죽었을 때, 안석이 이 오랜 친구를 추모하는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손모는 안석이 이십대 초반 사귄, 증공 다음으로 오래된 친구인데, 그는 안석보다 2년 일찍 태어나 2년 일찍 죽었다.
왕안석에게 또 다른 친구로 왕령이 있는데, 두 사람이 막역한 사이가 된 것은 안석이 서주(안휘성)에서 임기를 마치고 서울(하남성의 개봉開封)로 돌아가는 길에 고우에 들르면서부터다. 이때 34세의 안석에 비해 왕령은 23세의 백면서생이었다. 아무리 인격과 학식에 경탄했다 하더라도 장유유서가 철저했던 당시 사회에서,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에서 왕안석이라는 인간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왕안석은 왕령이 죽고 나서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에 새삼 놀랐다. <왕봉원 묘지명(王逢原 墓地銘, 봉원은 왕령의 자)>, <왕봉원 만사(王逢原挽詞)>, <봉원에게 곡하다(哭逢原)>를 연이어 썼으며, 또 그를 추모하는 시를 4수나 썼지만, 슬픔은 오히려 깊어질 뿐이었다.
청장년기의 안석이, 정치적 당파나 이해를 넘어서 교유한 친구로는 그밖에도 왕회(王回), 상질, 손각 등이 있는데, 상질은 당시 신법이 시행되기 시작하여 세론이 들끓고 있었지만 안석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손각은 안석의 신법에 이의를 제기하여 한때 지방 관리로 전출된 적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간 적은 없었고, 친구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교제했다. 지금까지 소개한 안석의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고대에 대한 동경, 시대에 대한 비판 정신, 영달을 좇지 않는 반골 기질, 보기 드문 학식 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젊은 시절 안석의 모습이기도 했다.
백성의 목숨은 천하에서 중하다왕안석의 세 번째 스승은 현실 그 자체였다. 현실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난관을 뚫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안석은 22세라는 젊은 나이로 그 난관을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그것도 435명 가운데 4등이라는 극히 우수한 성적이었다. 일설에는 실제로는 수석이었지만, 답안 가운데 시세를 비판하는 글이 있어 순위가 내렸다고도 한다.
과거에 합격한 안석은 첨서회남판관(僉書淮南判官, 회남 지방 장관 보좌관)에 임명되어, 그해 8월 근무지인 양주(강소성)에서 관리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다. 안석이 자부심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고 현실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이 시기(1041~1048)는 송대 역사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시기다. 송 왕조가 들어선 지 이미 100년이 지나, 각종 모순이 사회 여기저기에 누적돼 있었고, 안석이 신법을 시행하기에 앞서, 이때 이미 신진 관료들에 의해 개혁이 시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석도 지방에서 시대 상황이나 중앙의 정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경력 5년, 안석은 25세의 나이로 회남판관의 임기를 마치고 일단 변경으로 돌아오는데, 이 양주 시절에 왕안석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듬해 경력 6년에도 부임지가 정해지기를 기다리며 계속 수도에 머무르다가, 경력 7년 은현 지사로 임명되어 가족을 데리고 부임지로 향했다. 은현, 즉 지금의 절강성 영파는 광주, 친주와 더불어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어 있는 국제 무역항으로 특히 일본이나 고려 등과 교역하고 있었는데, 왕안석은 은현 곳곳에서 수많은 사회적 모순을 목격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은의 근해는 다도해였는데, 섬들에서는 은밀하게 소금이 만들어졌다. 당시 소금은 전매이므로 밀조나 밀매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불법적인 소금거래가 끊이지 않았다. 상급 관청의 전운사(轉運使)들은 결국 밀고자에게 현상금을 내걸기로 했고, 그 재원을 관리와 백성들에게서 징수했다. 그러나 안석은 이런 방식에 대해 상급 관청에 서면으로 항의했다. 안석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전매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생업을 빼앗지 말라, 소금의 불법 거래를 눈감아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석은 적극적으로 행정에 뛰어들어, 제방이나 둑을 쌓고 강바닥을 파내는 수리 공사를 진두에서 지휘했다. 또 단경기(端境期)에는 곡물을 원하는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수확기에 이자를 붙여 갚도록 했다. 치안을 정비했고 공자묘를 학교로 이전해 현립학교를 창설했으며, 명망 있는 선비 두순(杜醇)을 초청하여 교수로 삼았다. 이러한 시책들은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은현의 사람들은 안석이 떠난 후에도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워 유능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행정관을 추모했다. 은현 시절, 안석은 이미 서리(胥吏)에게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관료의 경우, 유교와 문학의 교양을 몸에 익혀 백성들 위에 군림할 뿐, 기술 기능은 전통적으로 천시되었다. 그런데 서리는 바로 관료와 백성 사이에서 실제 업무를 수행했던 존재로, 사대부들에게 완전히 무시당했다. 안석은 상급 관청에 서리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현실과 마주한 안석의 자세로 두 가지 정도의 추측이 가능한데, 하나는 안석이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능인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안석의 이러한 생각은 줄곧 그의 뇌리 속에 간직되었다가 인종에게 올렸던 <만언서>에서 선명한 형태로 표명되었고, 재상이 되어서는 신법의 일환으로 하창법(河倉法)을 실시하여 서리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한편, 그들에게 관리로서의 책임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 사이 우환도 있었다. 재임 중에 태어난 장녀가 은의 흙이 된 것이다. 1년 2개월의 삶이었다. 안석은 배에 오르기 전에 딸의 무덤으로 가 그 앞에서 이런 시를 나지막하게 읊조렸다고 한다.
은녀와 이별하다 (別鄞女)
나이는 이제 서른인데 벌써 힘 빠진 노인이다. (行年三十己衰翁) 무엇을 보아도 가슴이 아파서 나 자신을 책망할 뿐 (滿眼憂傷只自攻) 오늘밤 작은 배를 타고 너에게 작별을 고하러 왔다. (今夜扁舟來訣汝) 죽은 너와 살아 있는 나는 이제 동서로 헤어진다. (死生從此各西東)
그 뒤 황우 3년(31세), 서주(안휘성 회녕현 일대) 통판(부지사)을 맡아 임지로 향했다. 이 때부터 현실을 보는 안석의 눈은 점점 더 날카로워져, 그의 눈은 백성들의 가난한 생활과 그들의 삶을 그렇게 만든 원인으로 향했다. 송대에는 사대부들의 토지 겸병과 빈농의 소작농화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안석은 소수만 부유하고 다수가 빈곤에 시달리는 부의 불균형에 커다란 사회적 모순을 느끼고 있었다. 지화(至和) 원년(34세) 임기를 마친 안석 일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한편 서울 변경에서는 안석에 대한 평판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까지 안석은 세 번(양주-은현-서주)이나 지방관을 감내했고, 모두가 원하는 관직을 한번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이미 서주 시절에 재상 문언박(文彦搏)은 서울로 올라와 관직을 위한 시험을 치라고 강하게 권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때 그가 조정에 제출한 사퇴장은 아래와 같다.
신은 자신이 염퇴(명리에 집착하지 않는 것)라는 말을 들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만 약 신에게 형을 장사지내야 하고, 누이를 결혼시켜야 하며, 늙은 조모나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 다는 등의 위급한 사정이 없으면서, 그처럼 훌륭한 지위가 제게 적합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사 퇴했다면 신을 염퇴라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은 일가의 사적인 절박한 사정을 타개 하기 위해 관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염퇴라고 하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조정은 단념하지 않고, 안석이 서울에 도착하자 집현교리를 명했다. 안석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서울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며 지방 근무를 청했다. 결국 이 사퇴극은 군목사판관이라는 관직을 수락하는 것으로 낙착되었고, 이때부터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구양수를 만나게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인데, 구양수의 인간적인 장점은 우수한 후배를 발굴하여 그들에게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려고 한 점이었다. 그러나 안석은 모처럼 증공이 힘을 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쪽에서 먼저 구양수에게 접근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사마광, 여공저, 한유 등과 좋은 친구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가우 2년(37세) 지방으로 가고 싶다는 안석의 청이 간신히 받아들여져 상주 지사에 임명되었다. 상주는 소동파가 열한 번이나 찾았고 결국 거기서 종언을 맞이한 유서 깊은 곳이다. 다음 해 가우 3년(38세) 2월, 상주 지사에서 제점강동형옥(提點江東刑獄, 강동 지방 감찰관)으로 옮겼다. 근무지는 강서성 파양이었다. 안석은 형벌의 남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임기 중 다섯 명의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죄가 큰 자는 강등시키고, 죄가 작은 자에게는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 서울로 불려 올라가 탁지판관(度支判官, 재정부서기관)을 임명받았다.
황제에게 올린 만언서가우 3년(안석 38세) 10월,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왕안석은 인종에게 보고서를 올리게 된다. 송대에는 일로(一路, 로(路)는 오늘날의 성(省)과 같다)를 감독한 사람이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복귀할 때 천자에게 복명서(復命書)를 제출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그것을 '만언서'라 불렀다. 강남 동로 감독관에서 중앙으로 돌아온 안석은 그 관례에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만언서는 통상의 형식적인 틀을 넘어 자신의 현실 인식과 정치 이념을 혼신의 힘을 다해 피력한 것이었다. 이를 살펴보자.
만언서는 인종의 총명함과 근면함을 칭송하는 말로 시작하여, 이런 명군을 모시면 '집집이 넉넉하여,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며, 천하는 크게 다스려질 것이다'라 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내용은 급변하여 이것과는 정반대의 현실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기탄없이 지적하고 있다.
안을 살펴보면 국가에 중환이 없는 것이 아니며, 밖을 살펴보면 오랑캐가 쳐들어올 위험이 없 는 것이 아니고, 그 위에 전하의 재력은 날로 쇠퇴해가고 있습니다.
그 원인으로 '법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안석은 말했다. 그런데 안석은 지금 그 법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법도가 '선왕의 정치'에 위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선왕의 뜻(정신)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리 말해두자면, 신법이란 바로 선왕의 정신을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