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경
즈가오 지음 | 파라북스
제1편 치인(治人) - 사람을 다스리는 법인재는 많을수록 좋다. 이는 유능한 협력자를 그만큼 더 많이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재란 한마디로 능력에 다름아니다! 강희, 옹정 그리고 건륭 세 황제는 무엇보다 인재를 중시했고 천하의 인재를 최대한 등용하고자 했다. 이것은 큰일을 이루기 위한 그들의 크나큰 포부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세 황제는 인재 낭비는 천하에서 가장 큰 낭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인재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로 '천리마'였기 때문이다.
01 강희 - 사람을 기용하는 데 있어 완전무결을 구해서는 안 된다사람 사이에 일단 신뢰가 형성되면 만사가 순조로워진다. 강희제는 시종일관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않고, 쓴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인간관리의 신조를 성실히 지켰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 사람의 능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으며, 진심은 진심으로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을 중용할 줄 알았다. 사실 강희제 역시 전쟁 초기에는 만주족인 황족들을 각 전장의 최고 통사로 임명하는 전통을 따랐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이미 사치와 안일한 생활에 젖은 황족들은 전투경험은 물론이고 용기와 담력도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해 매번 패퇴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마침내 한족 장군들을 중용하여 군대 지휘관들의 대폭 교체를 강행함으로써 비로소 삼번의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사람은 항상 두각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강희제는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전장에서 진두 지휘하여 뛰어난 장수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반드시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춘 장수를 선발했는데, 이들이 바로 승리의 견인차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장수들에게 군사(軍事)와 군수물자 관리는 물론이고 전황을 파악하고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등 모든 면에서 능력을 갖출 것을 강조했다. 아울러 장수들은 물론 일반 군사들에게도 병서를 읽을 것을 독려하고, 무관 선발시험시 이에 관한 문제를 출제하는 규정을 새로 마련했다. 다만 병서를 단순히 읽고 외워서 이론에만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도록 했다. 군대의 지휘는 반드시 실전을 위주로 하되 병법지식을 결합하여 융통성 있게 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덕'은 한 사람의 품성을 가늠하는 근본으로서, 덕이 없는 사람을 중용해서는 안된다. 강희제의 인재등용 기준은 덕과 능력을 겸비하되, 전자를 우위에 두었다. 따라서 재능과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무덕한 소인배는 기용하지 않았다.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함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희제는 인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짐은 가장 먼저 사람의 마음을 보고 그 다음으로 재능과 학문을 본다.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재능과 학문이 있다한들 어찌 쓰겠는가. 짐이 직접 정치를 하다보면 스스로 재능이 있음을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가 있는데, 이는 실로 두려운 일이다. 재능이 덕을 능가하는 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그 사람이 현량(어질고 착한 사람)이라면 이는 곧 자기 일생의 대업을 실현시키는 길이 될 수 있다. 현량의 필요성에 관한 언급은 역대의 수많은 사서들 속에 자주 나타나곤 한다. 소위 '무는 나라를 강하게 하고, 문은 나라를 안정시킨다'라는 말이라든지, '문은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말이 그러하다. 역대의 명군들은 모두 학식이 뛰어난 인물들을 존중했다. 사실 그 당시 지식의 범주는 인문지식과 전통적인 이학(理學)이 전부였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문인들은 봉건적인 이학논리를 통한 사회관리와 문화발전에 있어 잠재적인 역량으로서 유용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강희제 역시 선비들을 국가의 가장 귀중한 재화로서 진심으로 대우하고 활용함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꾀하고자 했다.
사람을 사귈 때는 첫째도 신중, 둘째도 신중해야 하며 절대로 상대를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이는 인간관리에 있어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책략이기도 하다. 일을 도모함에 있어 항상 신중하고 어떤 일이든 세심하게 판단했던 강희제는 특히 사람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더욱 신중을 기했다. 또한 사람은 신이 아니기에 누구나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다. 만일 완전무결한 자를 구한다면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강희제는 인재를 쓸 때는 마땅히 각자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고 물건은 그 효용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하는 이치를 알고 있었다.
등용관문을 엄격히 해야만 우수한 인재를 발탁할 수 있다. 강희제는 학교 설립 등을 통해 교육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함과 동시에 과거시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청대의 과거시험은 실행 초기 비합리적인 부분이 많은데다 그 폐단 또한 매우 심각했다. 이에 강희제는 과거시험 방식의 변화를 통해 시험제도를 하나씩 개혁해 나갔다. 요컨대 학교와 서원을 세우고 과거시험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는 등 강희제의 일관된 교육진흥정책은 사회의 안정과 문화 발전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성과를 가져왔다. 특히 교육을 통해 유교사상이 널리 전파됨에 따라 국가 통일과 사회경제의 발전을 위한 사상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02 옹정 - 책임감 있는 사람을 중용하라치국(治國)은 용인(用人)에 있고, 용인은 면밀한 관찰에 있다. 옹정제는 "사람은 일을 만나서 겪어본 후에야 신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능력이야말로 신뢰의 출발점임을 뜻한다. 만약 청렴함을 잃고 재물을 탐하거나 거짓과 겉치레, 암투와 모략을 일삼으며 교활함과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순리를 거스르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크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크게 어지럽혀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조정이 위기와 혼란에 빠지고 민심이 동요할 때는 이 틈을 노리는 자들이 본색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옹정제는 이러한 자를 보면 그 가운데 한두 명을 죽여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옹정제는 사람 쓰는 일이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는 늙고 병약하고 무능한 관리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현직 관리들로 하여금 능력과 학식을 갖춘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는 한편, 이들 신진 관료들이 늙고 이목(耳目)이 어두운 신료들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그의 재임기간 중 많은 신진 신료들이 정책결정권을 가진 요직에 입성했고, 반면 기존의 많은 신료들이 파면되거나 면직되었다. 사실 이러한 조처는 조정에 새로운 피를 수혈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장점과 더불어 작은 실수에도 정국불안과 동요를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위험을 감내하고 과감히 신인을 기용한 옹정제는 탁월한 지도력을 통해 신속하게 혁신정책들을 추진하고 기존의 체제를 개선해 나갔다.
계급제도하의 권력체제에서는 관리들의 책임과 권한을 분명히 해야 한다. 권한이란 말 그대로 직무상의 권한을 말하며, 이에 상응하는 처벌방법을 만들어 스스로 임무를 완성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소위 책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않되, 일단 사람을 쓰면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충분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재능과 큰 뜻을 펼쳐 조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고무하고 격려해야 한다. 덕분에 옹정제의 통치 시기에는 나라가 안정되고 평안할 수 있었다. '사람을 쓰되 의심하지 않는' 지혜는 오늘날 기업의 경영자들도 마땅히 본받아야 할 용인(用人)의 지혜일 것이다.
역대 왕조의 군왕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람을 기용했지만 당대 무측천만큼 사람을 쓰는 데 능했던 인물도 그리 흔치 않았다. 옹정제 또한 그 드문 황제 가운데 1명이었다. 그가 기용하거나 내치기도 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적절한 이도, 그렇지 못한 이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옹정제는 그 모든 결정에서 경험과 교훈을 모두 취했다. 옹정제는 덕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되, 잘되고 못되고의 관건은 사람을 쓰는데 있음을 강조했다. 이처럼 옹정에게 있어 치국(治國)이란 곧 인치(人治)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옹정제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천하를 다스림에 사사로이 사람을 쓰면 천하를 다스릴 수 없고, 천하를 다스림에 공평하게 사람을 쓰면 오히려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청렴함을 지키는 것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원칙이다. 청렴에 대한 옹정제의 소신은 매우 분명해서 탐관오리에게는 어김없이 철저한 응징을 가했다. 향신들이 지방관리와 결탁하여 조정과 백성을 속이고 권력을 농단하는 것은 심각한 사회폐단이었다. 옹정제는 이들을 참수형에 처함으로써 본을 삼는 조처를 취했다. 민중봉기가 일어났을 때에도 구체적인 사정이 어떠하든 관에 대항하는 자는 모조리 반역죄로 다스리는 강경진압을 했지만 그와 함께 민중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악행을 저지른 관원들에 대해서도 결코 사정을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이처럼 악행을 일삼는 지방 세도가들에 대해 강력히 제재를 가하자 사회는 더욱 안정을 찾게 되었고 조정의 권위 또한 회복됨에 따라 청조의 통치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다.
일을 처리할 때는 과감해야 하며 때로는 변화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옹정제는 사람을 쓰는 데 있어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못한다, 때에 맞춰 정하라, 사람에 맞춰 정하라, 일에 맞춰 정하라'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다. 낚시터에 조용히 앉아 수많은 신료들을 자신의 뜻대로 부릴 수 있는 고도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신을 부르기는 쉽지만 귀신을 쫓기는 어렵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자기 손으로 발탁한 인재를 축출하는 것은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수는 관리하면서 자신과 같이 장단을 치고 같은 노래를 읊조리는 자기 사람은 관리하지 않는다. 옹정제는 '관인(官人)은 곧 관인(管人)'의 이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신료들에게 반드시 곧고 사심이 없는 마음으로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었다.
03 건륭 - 관건은 인재에 있다'제일 중요한 것이 인재다.' 이 말은 인재를 갈구하는 건륭제의 마음을 한마디로 대변하는 것이다. 나라에 인재가 없는 고충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늘 인재 찾는 일에 고심했다. 건륭제가 발탁한 관리들 중에는 명문가 출신이 많았다. 건륭제는 사람을 선택하는 데 있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그가 선택한 사람들은 대개 청렴하고 올곧은 관리들이었다. 건륭제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아가는 심정으로 인재를 갈구했고, 독특한 안목으로 인재를 구별해낼 줄 알았다. 그의 빛나는 문치무공(文治武功, 문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무로써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의 시대도 이렇게 인재를 구별할 줄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명군이었던 건륭제는 인재등용과 인재의 육성을 매우 중시했지만, 한편으로는 신료들에게 권력을 이관한 적이 없는 독재군주였다. 건륭제의 이러한 '보검을 손에 쥔 채 결코 위엄과 권력을 잃지 않았던' 통치방식이 바로 청(淸)을 전성기로 이끌 수 있었던 힘이다. 하지만 그는 한 사람만의 능력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과 큰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신료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치(人治)를 매우 중시했던 그는 '용인(用人)'과 '행정(行政)' 중 늘상 전자를 우위에 두었다. 다시 말해 법률은 사람에게 적용하기 위한 것일 뿐 지방을 어떻게 다스리는가는 관리들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건륭제가 작은 실수도 찾아내고 진위를 가리는 안목을 가진 황제였기 때문에 신료들은 언행에 신중하고 성실할 수밖에 없었다. 건륭제 재위기간 동안 조정의 질서가 바로 설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건륭제는 관리를 독려하기 위해 때로 예상치 못한 방법을 사용했다. 작은 잘못을 크게 처벌하는가 하면, 격식을 깨고 인재를 등용하거나 파격적인 승진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는 역대 왕조의 패망은 모두 '기강의 해이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을 하고 특히 황제를 핵심으로 하는 정부의 권위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신료들을 통제하고 여러 가지 폐단을 예방하기 위해 '여러 번 버리고 여러 번 기용하며, 여러 번 기회를 주는' 지혜를 발휘했다. 신료들이 비록 자주 엄한 처벌을 받기는 했어도 이것이 그들의 벼슬길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건륭제는 그들이 철저히 잘못을 반성하는 한 이전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다시 임용해 승진시켰던 것이다.
건륭제는 집권 초기에 수차례에 걸쳐 관엄상제의 이치를 알리고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반복했다. 그는 엄함이 지나쳐 가혹해지거나 관대함이 지나쳐 방종으로 흐르는 것은 모두 '관엄상제'의 길이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관엄상제'는 건륭제가 강희, 옹정 2대에 걸친 정치적 성패를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도출해낸 자신만의 독특한 정치이론이다. 그는 이 이론에 근거하여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자신의 통치방식과 틀을 만들어 나갔다. 그의 정치생애는 관엄(寬嚴)과 강유(剛柔)를 함께 취하는 지혜를 구현한 삶이었다. 이러한 정치방식은 그에게 비교적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했다. 때로는 순리에 맡겨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완화했고, 때로는 엄하고 신속하게 다스림으로써 역행하는 것들에 즉각 대처해 나갔다. 그가 운용한 '중용의 도'는 진정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대체로 큰일을 성취한 사람은 자신의 권력기반이 공고해야 하며, 이것은 고위 관리들의 자질과 그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고위 관리들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어떠한 통제도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건륭제는 갖가지 경로를 통해 관리들의 성격, 재능, 학식, 정치적 업적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수시로 그들의 단점을 지적하거나 경고했다. 건륭제의 이런 관리는, 말에게 매서운 채찍을 가하여 더 빨리 달리도록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건륭제는 공이 있다 하여 과를 덮어두지 않았고 그들의 잘못된 행적을 눈감아주는 법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용인(用人)에 있어 탁월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과오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고칠 줄 아는 것에 귀함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 건륭제는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변한 인물에게는 기회를 주고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륭제 재위 초기 옹정제 때부터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고 합리적으로 고침으로써 민심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인식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건륭제는 어려서 『예기(禮記)』를 숙독하고 조부인 강희제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중용(中庸)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용을 정사를 처리하는 기본원칙이자 방법으로 삼았는데, 이 점에서 조부인 강희제와는 구별되었다.
제2편 공인(控人) - 사람을 이끌어가는 법처세의 학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큰일을 성취하고자 할 때는 처세학이 그 추진력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처세에 능한 사람은 큰일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이런 이유로 처세학을 높이 평가했던 강희, 옹정, 건륭은 처세에 능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처세를 곧 일을 처리하는 능력으로 보고, 이 두 가지를 감탄스러울 만큼 절묘하고 합리적으로 조화시켰다.
04 강희 - 이해득실을 가늠한 후에 행동하라사람에 대한 도리란 무엇인가. 강희제는 예(禮)로써 아랫사람을 대할 때 비로소 그들로 하여금 기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