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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 사계절
1부. 초원의 공포정치 1162~1206



1장 핏덩어리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소년의 이야기는 1162년 봄 유라시아의 광대한 내륙 지방의 가장 외딴 지역에서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현대 몽골과 시베리아가 맞닿은 곳 근처였다. 납치되어온 젊은 여자 후엘룬은 첫 아이를 낳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 아니었으며, 지금 그녀의 남편 노릇을 하는 사람은 그녀가 결혼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메르키트 부족의 칠레두라는 다른 젊은 전사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남편과 함께 고향으로 향하던 그녀를 납치한 남자는 작고 미미한 집단에 속한 예수게이였다. 훗날 이 무리는 몽골족으로 알려지게 되지만 현재는 타이치우드 친척들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상태였다. 자주 되풀이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후엘룬의 첫 아기는 오른손에 핏덩이를 쥐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삶의 경험도 없고, 글도 모르고, 몹시 외롭기까지 했던 젊은 여자는 아들의 손에 나타난 이 이상한 징조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 아이는 곧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테무진이 9살 때,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을 당하자 타이치우드 씨족에 의해 그의 가족 전부가 버림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모두들 거친 삶을 살아가는 땅이었지만, 이들은 거기에서도 초원생활의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한 것이다. 테무진은 그의 가족과 함께 비극을 견디어내면서 초원지대의 엄격한 카스트 구조에 도전하고, 자신의 운명을 주도하고, 가족이나 부족보다는 신임하는 동료와 동맹을 맺어 이것을 일차적인 지지기반으로 삼겠다는 강한 결의를 굳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밖에서는 자무카라는 소년과 의형제를 맺는 친밀한 유대를 나누었지만 집에서는 배다른 형 벡테르가 권위적으로 못살게 구는 바람에 형제간의 경쟁이 더 심해졌다. 몽골 유목민의 가족생활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보통 엄격한 위계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벡테르는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뒤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으로서 점차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테무진의 친모인 후엘룬은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벡테르를 남편으로 받아들여 가장으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테무진은 벡테르가 가장이 되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동생 카사르와 함께 벡테르를 죽였다. 이미 테무진은 뒤따르지 않고 앞서 나가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앞자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관습을 어기고, 어머니에게 도전하고, 설사 가족이라 하더라도 앞길을 막는 사람은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테무진은 벡테르를 죽여 배다른 형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가족을 더 큰 위험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타이치우드 씨족이 그들의 영토에서 살인을 저지른 죄를 물어 테무진을 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테무진이 그들에게 잡혀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한 가난한 가족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도와준 것에 테무진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테무진은 그의 씨족이 아닌 사 람이라도 가족과 다름없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훗날 테무진은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1178년 테무진은 16세가 되자 아버지가 죽기 전에 점지한 약혼녀 부르테를 데려왔다. 신부는 함께 살게 되는 남편 부모에게 옷을 가져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유목민에게 큰 선물은 쓸모가 없었지만, 질 좋은 옷은 인기가 높았을 뿐 아니라 실용적인 가치도 높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테무진은 그런 선물을 아버지에게 주었겠지만,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외투를 가장 요긴하게 사용할 방도를 궁리했다. 그는 담비 외투를 이용해 아버지의 옛 우정을 되살리고, 이런 동맹을 통하여 자신과 점점 늘어나는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기로 했다. 테무진이 자신이 받은 결혼 선물을 아버지의 친구인 토그릴(훗날 흔히 옹 칸이라고 알려진 지도자)에게 준 것은 그를 자신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옹 칸은 선선히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를 일종의 양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테무진의 가족이 이미 겪은 고생으로는 모자랐는지, 테무진의 어머니를 빼앗겼던 메르키트 부족은 18년이 지난 뒤에 이제 와서 과거의 수모를 복수하겠다고 나섰다. 메르키트는 다섯 자식을 기르느라 늙어버린 과부 후엘룬이 아니라 테무진의 젊은 신부 부르테를 데려가 후엘룬 납치에 대한 앙갚음을 했다. 옹 칸과 주도면밀하게 맺어놓은 동맹은 테무진이 이 위기를 대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메르키트의 도전은 그가 위대한 칸의 길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2장 세 개의 강



테무진은 초원지대의 끊임없는 전쟁과 소요로부터 떨어져서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메르키트의 침략으로 그런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추방당한 자로서 궁핍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면, 늘 그의 야영지를 마음대로 습격하는 침략자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초원 지대 전사들의 위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만 했고, 그때까지 피해온 거친 게임에 가담하여 늘 전쟁을 치러야 했다. 테무진은 싸우는 쪽을 택했다. 옹 칸의 진지를 찾아 지원을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 늙은 칸은 그 나름대로 메르키트에 구원(舊怨)이 있었기에 선뜻 돕겠다고 나섰다. 옹 칸은 또 젊은 몽골의 영웅으로 새로 떠오른 인물에게 테무진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바로 테무진의 의형제인 자다란 씨족의 자무카였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테무진은 메르키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아내 부르테와 감동적인 재결합을 했다.



이후 테무진은 자신의 작은 무리를 데리고 안전한 산을 떠나 초원지대로 나와 자무카와 함께 생활함으로써 사냥꾼 생활을 버리고 유목민 생활을 택했다. 하지만 테무진이 자무카의 지도를 따르고 그로부터 배우는 데 만족하는 생활은 일년 반 정도로 끝이 났던 것 같다. 배다른 형의 지배에 굴복하는 것보다는 형을 죽이는 쪽을 택했던 젊은이에게 이런 관계는 견디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계급 위계에 따른 초원의 오래된 관습 역시 영향을 주었다. 친족 위계에서 각각의 가문은 뼈라고 불렸고, 혼인이 허용되지 않는 가장 가까운 관계는 흰 뼈, 혼인이 허용되는 먼 친족 관계는 검은 뼈였다. 테무진이 자무카의 무리에 속해 있는 한, 먼 검은 뼈 친족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계속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181년 5월 중순, 테무진은 그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몰래 달아났다. 이 두 청년 사이에 벌어진 균열은 이후 20년 동안 몽골의 중요한 전사로 성장한 두 사람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했으며, 결국 두 사람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테무진은 19세에 자무카와 갈라선 뒤, 스스로 전사들의 지도자가 되어 부하를 모으고 권력기반을 다지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루기 힘든 몽골 부족을 통일하여 칸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궁극적 목표를 세웠을 것이다.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자무카는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며, 그들의 분쟁은 몽골족 전체를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게 된다. 이 두 경쟁자는 이후 25년 동안 서로 가축과 여자를 약탈하고, 상대를 습격하여 부하들을 죽였다. 몽골족의 최고 통치자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1202년 옹 칸은 테무진에게 동쪽의 타타르를 약탈하는 원정을 맡겼다. 테무진은 타타르 원정에서 오랫동안 초원 생활을 지배하는 규칙을 다시 완전히 바꾸게 된다. 첫 번째 혁신은 완전한 승리를 거둔 다음에 약탈을 시작하라는 명령이었고, 두 번째 혁신은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이 전리품을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테무진은 이 정책을 통해 부족 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도 더 끌어냈다. 이제 병사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을 돌봐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 때문에 귀족 다수가 분노했으며, 일부는 그를 버리고 자무카에게 합류했다. 이로써 지체 높은 가문과 일반적인 유목민 사이의 구분은 더 분명해지게 되었다.



1203년 타타르 정복 후 테무진은 몽골 군대와 부족을 다시 한 번, 훨씬 더 혁신적으로 개혁했다. 초원지대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친족의 망(網)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적이었으며, 입양이나 혼인이라는 유대를 통하여 가족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그런 집단들 사이의 끊임없는 다툼을 끝내고 싶었다. 따라서 그는 전쟁이 끝나면 지도자들은 죽이고 생존자들은 노예가 아니라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후에는 검은 뼈와 흰 뼈의 구별마저 폐지해 버림으로써 그의 무리는 모두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구성원이 되었다. 이로써 테무진은 초원 세계에서 상당한 위치를 확보했다.



3장 칸들의 전쟁



옹 칸의 마지막이 멀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누가 그의 뒤를 이을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테무진은 20년 이상의 투쟁 끝에 몽골족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아직 경쟁자 자무카를 제압하지 못했다. 옹 칸은 대체로 테무진 편에 섰지만, 그럼에도 은근히 두 하위 칸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자무카는 자신이 전투에서 테무진과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계략을 통해서 테무진이라는 잠재적 위협을 없앨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딸과 테무진의 장남 주치의 결혼을 허락한다는 전갈을 보내고 테무진을 초대하여 함정을 준비한 것이다. 테무진은 옹 칸의 왕실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야 가까스로 자무카의 계략을 간파하고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테무진은 이제 그의 능력을 최대로 시험받게 되는 위기에 직면했다.



테무진은 먹을 것도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며칠간 계속 달아나다가 진흙탕인 발주나 호숫가에 이르렀다. 부하들 가운데 불과 19명만 남아 있었다. 부하들은 흙탕물을 함께 마시며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이 사건은 친족 관계, 인종, 종교를 떠나 상호 헌신과 의리에 기초하여 결집한 몽골 민족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집단은 테무진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의 맹아였으며, 이것이 결국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테무진은 발주나에 은신하면서 반격 계획을 세웠다. 며칠이 지나자 새로 조직된 수만 명의 군대가 초원에 다시 모여들었다. 아마 테무진 자신도 이 정도 규모의 군대가 모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테무진의 군대는 옹 칸의 군대를 물리쳤다기보다는 삼켜버렸다. 그리고 1205년에는 자무카까지도 사로잡게 된다. 테무진은 이제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자무카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그와 힘을 합치려 했다. 하지만 자무카는 살아서는 테무진을 실망시켰지만, 죽음으로 더 나은 친구가 되겠다고 말하고 죽음을 자청했다. 이제 테무진은 방대한 땅의 명실상부한 통치자로서 남쪽의 고비로부터 북쪽의 툰드라까지, 동쪽의 만주 삼림으로부터 서쪽의 알타이 산맥까지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한 뒤 각각의 혈통, 씨족, 부족에 내려오는 세습적인 귀족 칭호를 모두 없앴다. 테무진 자신은 칭기스 칸(Chinggis Kha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몽골어에서 친(Chin)은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다는 의미였으며, 늑대를 가리키는 몽골어 치노(chino)와 가까웠다. 실제로 몽골족은 자신들이 늑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칭기스 칸은 단순하면서도 새로운 칸에게 잘 어울리는 칭호였다.



모든 유목민 부족이 단결하고 칭기스 칸이 통치자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자, 몽골인은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해했던 것 같다. 적이 없으면 뭉쳐 있을 이유도 없었다. 칭기스 칸은 새로운 적을 찾는 것 같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부족은 없었다. 칭기스 칸은 대군을 호령했지만 그가 다스리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했다. 반면 남쪽 고비 사막 너머에는 비단길을 따라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물자가 흐르고 있었다. 칭기스 칸은 이런 물자 흐름의 불균형을 사로잡고 자신의 군대를 다른 군대와 맞붙여 시험해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바람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그런 기회가 곧 나타났다.



2부. 몽골 세계대전 1211~1261



4장 황금 칸에게 침을 뱉다




칭기스 칸이 48세가 되고 그의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지 4년이 흐른 1210년 말의 해에, 주르첸(여진족의 금나라) 대표단이 몽골 야영지에 도착하여 새로운 황금 칸이 즉위했음을 알리면서 칭기스 칸의 몽골이 속국으로서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칭기스 칸은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라는 명령을 받자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땅에 침을 뱉었다고 전해진다. 이어 그는 황금 칸에게 욕을 퍼붓더니 말에 올라 북쪽으로 달려갔다. 칭기스 칸은 그렇지 않아도 교역 물자 때문에 주르첸과 전쟁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황금 칸이 복종을 요구했으니 이제 공격할 구실을 얻은 셈이었다.



1211년 칭기스 칸은 고비 사막을 넘어 주르첸을 침공하겠다고 결정했다. 광대한 고비 사막을 넘으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점에서 이들은 다른 모든 전통적인 문명의 군대와 분명하게 달랐다. 첫째,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 둘째, 병사들과 함께 다니는 예비의 많은 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몽골 전사가 적은 식량과 물만으로도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혐오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곡물 식사를 하는 주르첸 병사들과는 달리 몽골 병사는 아무리 가난해도 주로 단백질을 먹었으며, 따라서 이와 뼈가 튼튼했다.



몽골의 싸움 방식은 수천 년 동안 몽골에서 발전해온 전통적인 초원 전투 체계를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었다. 결국 몽골족은 우월한 무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오랫동안 비밀이 유지될 수 없다. 한쪽 편에서 유용하게 써먹은 무기는 전투를 몇 번만 하고 나면 상대편도 사용하게 된다. 몽골의 승리는 작은 무리를 지어다니던 유목민이 수천 년 동안 다져온 단결과 규율에서 나온 것이며, 지도자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다. 어디서나 전사들은 지도자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칭기스 칸은 부하들에게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할 때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적 목표로 삼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에게 쉽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역사 속의 다른 장군이나 황제들과는 달리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함부로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1215년 칭기스 칸은 마침내 중도(베이징)를 함락하고 내몽골의 높고 건조한 고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칭기스 칸은 이번에도 전쟁에서 이겼다. 그리고 이제 초원의 칸의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물자를 고향 사람들에게 실어나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채우지 못할 만큼 몽골 민족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정복을 할수록 정복에 대한 요구도 늘어났다. 그리고 카라 키타이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제 중국인과 무슬림 사이의 비단길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칭기스 칸은 일차적인 생산지역인 송나라나 일차적인 구매지역인 중동을 통제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이의 연결고리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대량의 중국 교역 물자를 통제하게 되자 중앙아시아나 중동의 무슬림 국가들과 교역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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