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지휘하는 리더십
에드거 F. 퍼이어 지음 | 책세상
초창기 : 사관생도 시절의 리더십
조지 S. 패튼패튼 집안에는 노처녀 고모가 한 사람 있었는데, 어린 시절 패튼의 고모는 매일 그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 그녀가 읽어주던 책은 대개 유명한 모험 소설들이었다. 그런 모험담들과 목장의 야외 생활 외에도 대대로 무관이었던 집안 내력도 어린 패튼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패튼은 집안 어른들이 말해주는 생생한 전쟁터 이야기를 항상 열심히 듣곤 했다. 군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미국의 청년에게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어린 패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육군사관학교 신입생이 된 패튼은, 훈련 규정 과목에서는 전체 2등을 했지만 수학에서 낙제를 면하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훈련 규정에 몰두했던 것은 규정에 완벽한 것이 군인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앞으로 군인으로서의 생활과 생도로서 높은 직책을 얻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도 시절 패튼이 보였던 군인 기질은 급우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플레처 대령은 1962년 11월 28일자의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아직도 나는 그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큰 키에 반듯한 체격, 딱 맞는 제복에 티 한 점 없는 장식을 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는 외모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빈틈없는 군인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는 "그는 전체적인 외모, 행동, 말투 그리고 그가 했던 모든 일, 그중에서도 특히 군사적인 일에 대해 보여준 강한 열의는 생도 시절 많은 이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라고 말한다. 패튼의 교우 관계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그다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임무를 수행할 때 너무 위압적이거나 거칠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지식하리만치 임무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는 약삭빠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에게 지적당해 보고 된 생도는 몇 시간 동안 방 안에서 근신을 해야 했기에 그를 좋게 생각할 리 없었다. 또한 그는 보통은 대충 봐주고 넘어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호감을 얻기 힘들었다.
그는 언제나 활동적이었지만 육군사관학교의 모든 교육 과정을 다 즐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공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훌륭한 군인이 되기 위해 필수적이라 생각한 과정과 폭넓은 독서에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체육 활동에도 지독하게 열중했다. 그는 모든 일에서 실천적인 생도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자주 띄었다. 그는 항상 자기 책임을 완수했고, 어느 누가 일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게 처리했다. 어떠한 역경도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자 결심한 그를 좌절시킬 수 없었다. 그는 목표를 높게 세우고 시종일관 목표 달성을 위해 열심히 나아가는 생도였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성장 배경이나 군인이 되려고 한 동기에서 패튼과 가장 대조적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패튼과는 달리 어린 시절에 사관학교나 군인이란 직업에 흥미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별다른 지식도 없었다. 그런 그가 사관학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해군사관학교 입학을 꿈꾸던 스웨덴 출신의 친구 해즐릿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진학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해서,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곧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고, 졸업 후의 진로까지 보장된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고, 입학시험에서 주 전체 수석을 했음에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입학이 좌절되었다. 결국 그는 친분이 있던 한 상원의원의 추천으로 연령 제한에 걸리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패튼과는 대조적으로 육군사관학교의 군사 훈련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듯하다. 생도의 군사 임무 수행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생도 계급인데, 그는 몇 가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계급을 따냈지만 제대로 유지하지를 못했다. 그는 패튼과 달리 생도 계급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는 모범생도와도 거리가 멀었다. 성적이야 어찌되었건 아이젠하워는 인기 있는 생도였다. 그는 외향적이었고 사람들과 잘 어울렸으며,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잘생긴 얼굴에다 호감 가는 미소의 아이젠하워는 항시 쾌활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려 깊은 행동으로 또 다른 면모를 보였고, 친구들을 돕는 데도 빠지지 않았다.
군 생활 초반의 아이젠하워의 행적을 깊이 살펴보는 일은 그가 리더십을 성공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는 모든 사람의 의견에 생각 없이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생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사실 군 생활을 할 때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면 인기를 얻기 힘들다. 하지만 수많은 인터뷰와 편지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설득력이 있었으나, 결코 따지기 좋아하지 않았고, 항상 질문의 양면을 살피는 긍정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동기생은 편지에 "그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였으며, 원칙에 충실하고자 했지만 결코 자신의 신념을 다른 이들에게 강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동기는 '성실성'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어떤 주제의 토론에서건 결코 남에게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표현하고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인기 비결은 그러한 외향적이며 쾌활한 성격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글러스 D. 맥아더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남북전쟁과 스페인전쟁에서 큰 명성을 떨친 장교였다. 어린 시절 그는, 전장에서의 뛰어난 지휘관이자 군인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일하는 부친의 가르침 속에서 점차 아버지를 닮아갔다. 그러나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이름난 육군 소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배경이 생도 생활에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필리핀에서 세운 공으로 큰 명성을 떨치고 있던 아버지로 인해 그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몇몇 철없는 상급생도들은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괴롭혔다. 신입생도 시절 그와 같은 막사에서 생활했던 프레더릭 H. 커닝엄 생도는 맥아더가 당했던 일에 혐오감을 느껴 자퇴를 했을 정도였다. 커닝엄이 자퇴한 직후, <뉴욕 선>지에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일어나는 상급생도의 하급생도에 대한 가혹 행위를 고발하는 편지가 공개되었다. 1899년 여름, 가혹행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처벌된 상급생은 아무도 없었다. 장군의 아들에게 그것은 쓰라린 경험이었지만, 그는 가혹 행위까지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근성이 있었다. 요령을 부리거나 동정을 구하지도 않았으며, 아버지의 후광을 입으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히 해야 하는 힘든 훈련이 과장 보도되었다면서 분개했다. 맥아더는 가혹 행위를 신입생도의 훈련 과정 정도로 여기고 끝까지 참으며 이겨냈다.
생도로서 맥아더의 경력은 한마디로 '화려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깨지지 않은 사관학교의 최고 성적을 기록하며,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연대장 생도의 계급으로 수석 졸업의 영예까지 차지한 생도는 웨스트포인트 100년 역사상 그를 포함해 오직 세 명뿐이었다. 그가 성공적으로 사관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총명함과 책임감, 결단력, 성실성과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정 때문이었다. 학업에 집요하게 몰두했지만, 또한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지 않을 정도로 군사 분야에도 뛰어났으며 운동에도 열성적이었다. 또한 그는 근무 중에는 과묵했지만, 그 이면에는 따뜻하고 친근한 인간적인 모습이 숨어 있었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그 능력들을 균형있게 조율하며 모든 일에 열의를 갖고 임했던 그가 머지않아 큰 성공을 거두리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조지 C. 마셜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자 조지 C. 마셜은 큰 형을 따라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입학할 당시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의 생도 생활은 엄격한 스파르타식이었는데, 요즘의 생활에 비추어보면 아주 원시적이었다. 융통성 없는 엄격한 규율로 인해 1897년 입학했던 100명 이상의 생도들 중에서 오직 34명만이 1901년 6월 졸업에 성공했다. 생쥐라고 불리는 신입생들은 선배들이 가하는 참혹한 고통에 시달렸다. 후에 마셜은 이렇게 말했다. "생도 생활의 일상은 금방 자연스럽게 익숙해져 갔습니다. 되풀이되는 일상에 대해서 전 다른 수많은 아이들보다 더욱 철학적이었죠. … 그때 당한 일도 늘 있는 일들과 같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고, 제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쉽게쉽게 그것을 받아넘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그렇게 하려 했을 뿐이었고, 스스로 판단하기에 전 상당히 잘 해냈던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고자 하는 마셜의 야망은 생도 생활 초기부터 나타났다. 퍼레이드를 할 때면, 구두를 거울처럼 번쩍거리게 닦아놓는 바람에 훈육관에게서 에나멜 가죽구두를 신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의 소총은 진급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생도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한 부사관에게 2달러를 주고 총 개머리판을 번쩍번쩍 빛나게 닦아놓도록 했다. 한편 그의 군사 훈련 성적에는 어느 누구도 필적할 수 없었다. 그는 4년 내내 한 번의 벌점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셜이 모든 일에서 그처럼 모범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연대장 생도이면서도 종종 복귀 시간이나 식사 집합 시간 이후에도 허가 없이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곤 했다.
마셜은 생도 시절 군사 교육 부분에서는 뛰어났으나, 일반 학업 성적에서는 중간 정도였다. 당시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은 일반학과 과목보다는 군사 훈련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학과 교육 때문에 군사 훈련이 방해받지 않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그가 일찌감치 학과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2학년이 되자 그는 미식축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라인맨이라는 중요한 포지션을 맡게 되었는데, 왜소한 몸집으로 인해 밀리는 부분은 그의 결단력과 배짱으로 메웠다. 그러나 당시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에서 미식축구를 하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연습은 오직 하루 중 유일한 자유 시간인 세시부터 네시 사이에만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도는 모두 쉬는 그 시간이 다가기 전에 그는 연습복을 착용하고, 연습하고, 씻고, 정비하는 모든 일을 마쳐야 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다른 생도들과 같이 한 시간 동안 제식훈련을 해야 했다. 그러나 운동을 뒤늦게 시작했음에도 그는 뛰어난 미식축구 선수로 발전했다. 그 당시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의 미식축구 경기에 대해 어느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수비벽을 뚫어내는 마셜의 태클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버지니아 대학의 유명한 한 선수는 마셜이 남부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태클 선수라고 말했다."
학창시절의 비교후에 지휘관으로서 큰 업적을 남긴 이 네 명의 생도 시절 생활과 그 속에 나타난 리더십을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계급 성취도 면에서 볼 때, 마셜과 맥아더는 매년 생도로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계급을 따냈고, 패튼 역시 졸업할 때까지 그가 제일 선망하던 부관생도의 계급을 유지했다. 아이젠하워는 세 번 계급을 따내고도 두 번이나 박탈당했지만, 유일하게 생도들이 직접 선출하는 응원 단장이 되었다. 비록 군사 훈련은 다소 등한시했지만, 훈육관들이나 동기생들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마셜, 맥아더, 패튼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고, 그 결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이들은 군인으로서 빼어남은 물론 성실성까지 두루 겸비하고 있었고, 타고난 총명함과 재능을 지닌 맥아더조차도 태만한 법이 없었다. 이 세 지휘관들과 조금 다르게 아이젠하워는 처음에는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다가, 더 좋은 교육 혜택의 기회 때문에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 혜택 때문에 그는 미 육군 장교로 임관되어 복무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졸업 후의 복무 기간 중 그가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은 단순한 의무 이행을 넘어선 것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단지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쟁의 위협 속에서 국민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키워졌다.
웨스트포인트의 교훈은 '의무, 명예, 조국'이다. 육군사관학교의 생도 생활은 바로 이 세 단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웨스트포인트에서 가치 있는 생도 생활을 경험한 이가 '의무, 명예, 조국'이라는 세 단어를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어떤 직업의 사람들보다도 군인에게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모든 군인은 '의무, 명예, 조국'이라는 세 단어가 그의 삶에 제시하는 바를 외면할 수 없다. 그들에게 명예보다 더 훌륭한 덕목, 조국보다 더 큰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 의무보다도 더욱 고귀한 마음은 있을 수 없다. '의무, 명예, 조국'. 이것은 그저 생도 시절을 마감하며 잊혀지는 젊은 시절 한때의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넓은 세계에서 경험을 쌓고, 전쟁을 겪어나가며 군인으로서의 삶을 계속할 때 그들의 가슴에 더욱 깊이 새겨지는 것이다.
박애-인내-헌신 : 조지 C. 마셜 장군의 리더십어떤 장교들은 지휘관에 적격이고, 또 어떤 장교들은 참모장교의 자질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지휘관의 직책에는 특권이 따르기 마련이다. 부대가 임무를 잘 수행했을 경우에는 지휘관의 명예도 높아지지만, 임무에 실패하거나 일이 잘못될 경우에는 문책 등의 달갑지 않은 결과가 기다린다. 한편 부대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세부적이고 일상적인 행정 업무를 비롯해서 지휘관이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수집 등은 모두 참모장교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참모장교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인정받기 힘들다. 참모장교에게는 고되고 단조로운 업무만 되풀이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마셜 장군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미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면서 참모장교로서의 역량을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참모장교로서 마셜은 단연 뛰어났다.
포트 베닝 보병학교 시절 : 1927~1932포트 베닝 보병학교 부교장으로서 부임 기간은 마셜 장군의 군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동시에 미 육군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장교 육성에 기여한 바는 미국의 국방력에 폭넓고 지속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군인을 전문 직업으로 인식하도록 가르쳤고, 고되고 힘든 일도 감수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훌륭하고 유능한 장교가 되도록 독려했다. 후에 2차 세계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교들 중에는 마셜의 참모였거나, 그가 포트 베닝에 있을 때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이 많다. 물론 뛰어난 장교였기에 포트 베닝에 선택되기도 했겠지만, 마셜의 호의적인 관심을 끈 것이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명백할 것이다.
포트 스크리븐 시절마셜 중령은 포트 베닝에서의 임기가 끝나자 포트 스크리븐의 대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포트 스크리븐에서의 부임 기간에도 그는 이전에 있던 부대에서 해왔던 것과 같은 일에 집중했다. 그것은 바로 부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일상적인 업무와 더불어 장병들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부임한 후, 그가 처음으로 느낀 문제점은 부대원들의 사기가 마치 경제 침체로 타격을 입은 일반 시민들처럼 무척 낮다는 점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는 매일 아침 말을 타고 산책로를 돌아다니며, 병사나 그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