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의 리더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 | 웅진씽크빅
옥포해전
동쪽으로 쏜 화살은 동쪽으로 간다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0여 일, 15만 일본군 선봉은 파죽지세로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지만, 전란 소식을 듣고서도 이순신은 20여 일이나 지나도록 출전하지 않은 채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머물고 있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순신은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전투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전력을 탐사했을 것이다. 조정에서 적군과 싸우라는 공식 문서가 도착한 다음, 이순신은 마침내 출전을 결행했다.
1592년 5월 3일, 여수를 떠난 이순신은 당시 경상우수사이던 원균과 합류 -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원균은 4척을 보유 - 했는데, 지금의 거제시 옥포만에 적이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순신은 그동안 수집한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적의 무기 체계를 파악하여, 포격전으로 싸우기로 했다. 조선 총통의 경우 사거리가 500보 이상이나, 일본군 조총의 사거리는 100보 내외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옥포만 입구에 도달해보니, 적선은 30척이었다. 처음으로 일본군을 마주한 조선 군수들은 긴장과 두려움에 떨었고, 그런 병사들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마음 또한 착잡했다. '적은 백 년 넘게 전쟁만 해온 무리, 과연 우리 수군이 이길 수 있을까? 이겨내야 한다. 첫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앞날은 없다. 이겨본 자만이 이길 수 있는 법! 동쪽으로 쏜 화살은 동쪽으로 날아가지 않던가?'
이순신은 함대를 포격 사거리까지 진격시켰다. 그러고는 일자진을 펼치게 했다. 왜냐하면 조선 수군의 총통 대부분은 배의 측면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순신 함대를 본 일본군은 부랴부랴 전투태세를 갖추고 조선 수군을 향해 진격해 오며, 조총 사격을 가해 왔다. 그 총 소리에 조선 수군들이 몸을 움츠렸다. "두려워 하지 마라, 적의 조총은 우리 배에 미치지 못한다. 천자총통을 준비하라!"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화포장과 포수들이 천자총통에 대장군전을 장전했다.
천자총통은 자체 무게만도 200킬로그램이 넘는 대형 총통이다. 쇠로 만든 커다란 통으로 아래쪽이 막혀 있는 원통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막혀 있는 맨 아래쪽에 적당량의 화약을 넣고, 그 화약에 닿을 수 있도록 종이로 꼰 심지를 만들어 총통에 나 있는 심지 구멍을 밀어 넣게 되어 있었다. 화약을 밀어 넣은 다음, 그 사이에 격목이라는 나무토막 -화약이 폭발할 때 폭발력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아줌- 을 끼운다. 격목 대신 흙을 다져 넣는 경우도 있다. 화약을 넣고 격목을 박은 다음, 총통 입구에 대장군전 -앞부분이 쇠로 되어 있고 날개가 달린 대형 화살로, 270센티미터가 넘는다- 을 넣는다. 이것을 천자총통에 넣어 쏠 경우 900보(약 1Km) 정도 날아간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장군전은 날아가서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로 적의 성벽이나 배에 치명상을 입힌다.
"방포하라!" 화포장이 심지에 불을 붙였다. 대장군전이 천자총통에서 발사되어, 적선을 넘어 옥포 포구에 떨어졌다. "넘어갔습니다." 포수가 즉각 보고했다. "화약을 줄여라! 포신을 낮춘 후 방포하라!" 조선군의 포격을 받은 일본군은 혼비백산했다. 대장군전이 떨어진 일본군 전선에는 그대로 구멍이 뚫렸고 그 틈으로 바닷물이 치솟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그제서야 이순신은 접근을 명령했다. 군사들에게 적의 실체를 보여주고 그들이 조선군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드디어 적이 화살 사정거리까지 들어왔다. "사수 준비하라!" 뱃전에 늘어선 조선 수군들이 팽팽하게 시위를 당겼다. 사람을 향해, 적을 향해 날리기는 처음이었다. "발사!"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사수들이 시위를 놓았다. 날아간 화살은 수많은 일본군을 쓰러뜨렸다.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군사들 사이에 일었다. 이순신은 안도했다. 이제 적진은 완전히 무너졌다. 적선은 겨우 6척만이 해안을 끼고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조선 수군이 이긴 것이다.
이겨본 자만이 이긴다마침내 출전을 결심한 이순신, 그는 임진왜란이 단 한 번의 전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긴 싸움을 준비했다. 그래서 첫 전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첫 전투는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첫 전투의 승리를 위해 그가 준비한 전술은 원거리 포격전이었다. 원거리 포격전을 기획한 이순신은 적과 아군의 무기 체계를 연구한 다음, 적정한 전술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적중했다.
하는 일마다 잘 안 된다는 사람이 있다. 사업을 한답시고 이것저것 열심히 시도는 해보는데 항상 폐업과 개업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요즘 젊은이들의 가장 큰 고민인 취업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 번도 성공해본 경험이 없기에 원서만 내다가 결국은 만년 취업재수생이 되고 만다. 첫판을 이겨야 한다. 첫판을 이겨본 자는 성취감과 자신감을 백배 충전하여 다음 싸움에도 최선을 다하게 된다. 나 자신의 경우는 어떤가? 만약 단 한 번도 그런 기회가 없었다면 다시 시작하라. 이길 수 있는 약한 상대를 만나 싸움을 걸어라. 지는 것은 습관이고, 이기는 것 역시 습관이다.
사천해전긴 활이 짧은 활을 이긴다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중 전라도 도사로부터 급보 -군왕의 몽진- 를 받은 이순신은 일단 여수의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귀환하여 피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첫 출전에서 거둔 승전보였다. 이순신의 장계를 받은 조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개전 이후 처음 받는 승전보였던 것이다. 선조는 즉각 이순신에게 가선대부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이순신에게 경상도에 남아 있던 원균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졌다. 일본군이 경남 사천까지 진출하여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사천이라면 경상 바닥의 가장 서쪽. 만약 이곳에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한다면 여수 또한 위태롭다. 이순신은 즉각 출동을 명령했다.
1592년 6월 1일, 원균과 합류한 이순신은 곧장 사천만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함대가 진격하는 동안 적의 척후선 한 척을 만났고 곧바로 격파해 버렸다. 그러나 살아남은 적의 척후병들은 육지를 통해 달아났다. 이제 사천 선진 포구의 적들은 이순신 함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습전은 이미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전면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전선 20여 척을 포구 깊이 정박해둔 일본군은 병력을 언덕 위에 배치해 놓고 조선 함대가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 가운데 흰옷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조선 백성을 총알받이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들 때문에 유인 작전이 필요했다. 이순신 함대가 다가가 일제히 총통을 발사했으나,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썰물의 영향으로 함대가 선진 포구로 근접하기 어려운데다 원거리에서 발사를 하자니 포격 각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일단 함대를 후진시켜 기다리기로 했다. 한여름 해가 금오산 너머로 넘어갈 즈음 드디어 밀물이 되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 함대는 선진 포구를 향해 진격해갔다. "방포하라!" 순식간에 선진 포구의 적선이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배를 잃는다면 부산까지 육로로 후퇴해야 하는데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판사판이라는 분위기로 일본군들이 포격당하고 있는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순신의 바람대로 배를 저어 포구를 벗어나오기 시작했다.
"거북선을 불러라!" 뒤처져 있던 거북선이 조선 함대를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조선 함대를 향해 진격해 오던 일본군들은 놀랐다. 다음 순간 거북선 양측 옆구리에서 일제히 포문이 열리더니 포신이 불쑥불쑥 나왔다. 그러고는 앞머리에서 총통이 한 발 발사되는 것을 신호로 거북선 양 옆구리에서 일제히 총통이 발사되었다. 거북선을 구경하던 일본전선 중 서너 척이 순식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제서야 일본군들은 거북선을 향해 조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조총탄은 거북선의 선체를 뚫지 못했다. 용감한 적장 하나가 자신의 배를 거북선에 붙이고, 군사들에게 거북선에 오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거북선 지붕으로 뛰어내린 일본군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젖은 가마니 안에 숨어 있던 뾰족한 철제 송곳에 찔려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후좌우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거북선의 둥근 지붕에서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조선 수군들조차 의심했던 거북선의 위력이 여지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거북선의 맹활약과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일본 함대는 모조리 격침되었다.
비책을 준비하라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오래된 군사 서적에서, 조선 초 이미 조선 수군에 거북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배를 만드는 데 특히 재주가 뛰어난 나대용을 영입하여 거북선을 복원하도록 했다. 그것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조선 초기 거북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척의 거북선이 건조되었다. 이순신의 거북선은 해전의 판도를 바꿀 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닌 신무기였다.
신무기의 중요성은 이제 신상품으로 대체되고 있다. 신제품, 즉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나 비책이 없는 기업은 살아남기 어렵다. 자신만의 비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비책을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비책에 대한 믿음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된다는 믿음이 첫걸음이다. 이순신이 철갑선을 만든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모든 우려를 극복하고 거북선을 만들어냈다.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북선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약점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비책이 되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비책에 대한 믿음이 생긴 다음에는 철저히 상대를 분석해야 한다.
당항포해전
봄바람에도 꽃은 진다1592년 6월 2일 당포에서 해전을 치루어 승리한 이틀 후, 이순신 함대는 거제에 적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발하려는 순간, 판옥선 25척을 보유한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이 합류했다. 이제 문제는 지휘부에서 생겼다. 이순신과 원균과 이억기, 이들은 모두 정3품 수군절도사, 즉 같은 계급의 수사(水使)였다. 한 부대에 사단장이 세 명이 되었으니, 연합 함대의 지휘권을 누가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을 것이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회의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순신이 지휘권을 가지는 것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다. 1592년 6월 5일 아침, 고성 땅 당항포에 적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순신은 연합 함대를 이끌고 당항포로 항진했다. 항진하는 도중 진해에서 함안 군수 유숭인에게 쫓겨 나오는 일본 전선 6척을 불태웠다. 당항포로 들어가는 입구는 바다의 폭이 300미터가 될까 말까 한 좁은 곳이다. 입구에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당항포까지는 약 30여 리이다. 이순신은 당항포 입구 당목 근처에 4척의 판옥선을 매복시켰다. 그런 다음 이순신은 장사진을 펼치게 하고, 삼면을 포위한 채 점차 포구를 압박해 들어가면서도, 적선에게 접근만 명령할 뿐 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방패를 높이고, 사수들은 화살을 쏘아라!" 드디어 일본군 조총 사거리까지 들어간 순간, 마침내 이순신이 내린 명령은 엉뚱하게도 화살을 쏘라는 것이었다. 당항포 앞바다는 일본군의 조총과 조선 수군의 화살 대결로 압축되었다. 접전이 이어지자 드디어 이순신이 바라던 반응이 일본군 진영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조선 수군을 향해 진격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후퇴하라!" 이순신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이순신 함대를 쫓아왔다. 이순신의 유인 작전에 걸려든 것이다.
이순신은 당항포에 정박한 일본군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일본 전선을 모조리 격침시킬 수는 있으나, 만약 그러할 경우 육지로 올라갈 일본군들이 조선 민간인에게 보복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바다로 유인하여 적을 모조리 수장시킬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바다로 나온 일본 전선 26척은 뒤늦은 후회를 해야 했다. 물러나던 조선 함대가 일제히 총통을 쓰며 진격해 왔다. "총공격하라! 전 함대 총통을 발사하라!" 드디어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인 각종 총통이 발사를 시작했다. 당황한 일본군들이 조총으로 응사했지만, 두텁고 높은 판옥선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이미 전열이 흐트러진 일본군 함대 사이를 거북선이 헤집고 들어가 적의 대장선 턱 밑에까지 접근했다. 그러고는 포격과 당파(撞破)로 간단하게 제압해 버렸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공격 중지!" 느닷없이 이순신이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혼비백산한 일본군은 조선군이 완전히 물러가자 남은 한 척의 배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1554∼1611. 충무공과 독음이 같다)을 불러라!" 방답첨사가 즉시 달려왔다. "적은 반드시 나머지 한 척의 배를 타고 당항포를 빠져나올 것이다.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잔적을 모조리 소탕하라!" 그제서야 장수들은 이순신의 의중을 읽었다. 과연 일본군은 이순신이 예상한 대로 움직였다. 그날 밤, 한 척의 배가 탑승 인원이 훨씬 넘는 일본군 패잔병들이 태우고 몰래 당항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곧 방답 첨사 이순신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단 한 명의 적도 상륙시키지 않고 거둔 대승이었다.
자신의 행위가 끼칠 영향을 생각하라전투를 떠나 이순신이 안고 있던 큰 부담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이었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죄 없는 백성들을 유린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당항포 해전에서는 적을 바다에 모조리 수장시키려 한 것이다. 현대전에서도 민간인 보호를 위한 수많은 협약과 교전 수칙 등이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목표만을 위해 뛰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생각해 보라.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생각하라. 나의 성과에 급급하여 그것이 타인에게 혹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승자라고 할 수 없다.
한산대첩주먹은 자신이 쥐는 것이다그 뒤 이순신은 율포 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점점 초조해 했다. 일본 육군은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차지했으나 남해 바다가 문제였다. 생각지도 않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 출현으로 연전연패, 보급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일본군으로서는 반드시 해로를 뚫어야 했다. 일본은 수군 전력을 총집결하여 이순신 함대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육군을 따라 북상했던 일본 수군의 용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해군에 전격 투입됐다. 그러던 차에 일본군이 견내량 북단에 나타났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연합 함대를 꾸리기로 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공을 탐내어 자신의 함대만 -73척- 을 먼저 출동시켰다. 이순신은 어디서 싸울 것인가 고심했고, 한산도 앞바다를 선택했다. 지금까지는 이순신 함대가 일본 전선을 찾아다니며 전투를 벌였다면 이번엔 반대로, 모든 채비를 갖춘 일본 정예 수군 대부대가 공격해 오는 상황이었다. 특별한 전술이 필요했다. 이순신은 진중회의를 열었다.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칠 것이오!" 이순신의 선언에 장수들이 놀랐다. 학익진이란 대형을 학의 날개처럼 넓게 펼쳐 그 안에 적이 들어오도록 하여 포위하는 진법을 일컫는다. 유능한 장수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술로 학익진을 펼치려면 잘 훈련된 군사가 필요했다. 장수들의 의견은 분분했고, 특히 반대 의견이 많았다. 이순신 역시 이런 점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