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리더십 이명박
김대우 지음 | 미소
두 사람이 똑같으면 함께 일을 못해현대그룹 전성기에 많은 사람들이 정주영과 이명박의 사이를 '부자지간'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우리는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었다."며, 상호보완적이지 않으면 각자의 역할도 없었다고 분명한 선을 긋는다. 그는 우리 사회가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이 자라지 못하고 혈연과 정에 지나치게 얽매인 한국적 정서로 지배되는 기업 풍토를 지적했다. "기업의 일이나 국가의 일이나 동양적인 온정주의에 치우쳐 판단하면 세상이 발전하지를 못한다. 무조건 추종하는 가신들만 있고 견제나 조언을 하는 파트너가 없는 조직은 건강한 조직이 아니다."
정 회장 사후에 현대건설이 최대의 위기에 몰렸을 때 이명박에게 현대건설을 다시 맡아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그때만큼 최선을 다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맡기라."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명박은 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데도 최선이 아니면 아예 발을 붙이지 않는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정회장을 말린 이회장정주영 회장이 정치를 하려고 한 동기는, 정치인들에게 명분 없는 정치 자금을 수시로 갈취당하고 수천억의 부당한 세금을 추징당하면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결심을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이명박이었다. 문제는 그룹의 전문경영인까지 정치에 참여시키려고 시도했다는 데 있었다. 정회장은 반대 이유를 물어보게 된다. 이명박은 "회장님께서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다소 매정하게 잘라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다른 재벌들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 경제가 엉망이 되어 나라 발전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왕 정치를 하려면 긴 안목으로 참신한 인물들을 공천해야 살아남게 된다."는 이명박의 마지막 진언(?)은 빛을 보지 못한 채, 두 사람은 27년간의 긴 여행을 청산하고 각자의 길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증오가 밥 먹여 주나비교적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을 하지 않는 편인 이명박이, 강남 문제를 두고 2005년 초에 들어서자 작심한 듯 독한(?) 표현을 한 적이 있다. "난 그렇다고 누구같이 강남을 경계하고 그러지는 않는다. 강남과 강북이 균형 있게 발전한다고 해서 강남을 뜯어낼 필요는 없다. 강남은 강남대로 발전하게 두고, 강북을 새롭게 발전시키면 되는 거다. 그렇지 않고 강남 것을 옮겨가면 제로섬 게임이다. 부가 창출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명박의 복안은 '윈-윈 전략'이다.
강남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었다. "왜 나눠서 분배하느냐. 강북은 새로 개발할 것이고 다 다르게 할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 스케이트장도 처음에 광장을 계획할 때부터 다 생각하고 있었다. CEO가 사업 구상을 할 때는 지금 잘 되는 것만 보고 하는 게 아니다." 즉 CEO가 어떤 사업을 벌일 때는 미래를 보고 다각적으로 검토한 후에 밀고 나가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공약하는 인기영합적인 정치인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문화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상류사회의 입장에 섰다. "우리는 중국을 제조업으로는 못 이긴다. 문화도 산업이다. 나는 각 구마다 콘서트홀을 만들어서 문화 기반을 만들 것이다. 내 귀에는 안 차지만 나는 런던으로 출장을 가도 파리에 가서 공연을 보고, 파리로 가도 런던의 '로얄 발레'에서 좋은 공연을 하면 일부러 보러 갔다." 이 정도 수준의 직설적인 표현은, 문화를 기득권자들의 사치나 부의 과시 같은 소비행태로 생각하는 노무현식 사고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태풍 '매미'가 상륙하는데도 오페라를 구경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노무현의 처지에서 보면, 이명박의 코드가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문화를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기반산업으로 생각하는 뚜렷한 관점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무현 정권이 가진 자들에 대한 편견을 풀고 그를 넘어선 정치를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개혁이나 혁명이라는 말 대신 변화나 늦은 변화라는 말을 사용해야 된다. 시장경제를 하려는 사람들은 언어를 순화해야 한다."고 완곡하게 지적하고 있다. 젊은 시절 가난을 탈출하려고 비참할 정도로 몸부림쳤던 이명박이기에, 있는 자를 대하는 상대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증오하지 말고 끌어안으라고 준엄하게 충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가난하게 살아 야간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교육평준화는 반대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분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보수를 끌어안아야지, 증오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치를 한다는 노무현보다 한 발 더 나간 이명박이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란 과연어떤 것일까? 그는 그 의지를 "새롭게 안하려면 정치할 필요가 없다."는 한 마디로 압축하고 있다. 물론 자신이 2007년 대선 후보로 나설 경우를 가상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YS와 맞선 이명박의 배짱1995년 6월, 처음 실시된 민선 1기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국민적 관심은 단연 서울특별시장 선거였다. 이 선거는 이명박이 공개 경선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큰 정치적 파문이 일었다. 여당 집도부는 초선에 불과한 이명박 의원에게 후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거부 반응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이명박이 당 지도부에 요구하는 경선 주장이 명분도 있고 강경하였기에 YS가 직접 나서지 않고서는 마땅히 그를 달랠 묘수가 없었다.
청와대 정무수석이 나서서 대통령을 만나 볼 것을 제의했지만, 이명박은 후보 사퇴 문제라면 만날 필요가 없다고 두 차례나 거절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YS와의 조찬회동은 팽팽하게 주장이 맞섰다. 얘기 끝에 YS는 "이 의원은 앞으로도 다른 일을 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까?"라는 말로 후보 사퇴를 은근히 권했다. 이명박은 경선 후보로 등록하겠다는 결심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고, 이때의 일로 다음 해 총선에서 가장 힘든 선거구인 종로구로 징발되게 되었다. 1995년 5월 12일, 이 날의 서울특별시장 경선은 한국정치사의 큰 흐름을 바꾼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오늘 날 크고 작은 선거가 대부분 경선을 거쳐 후보를 확정하도록 관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이명박의 확고한 소신과 담판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면으로 돌파하는 원초적인 승부사2004년 여름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였다. "시장이 입에 발린 얘기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하철 노사문제에 지배 개입을 하고 있다. 개발독재식 마인드로 지하철 노조를 탄압하려고 한다. 세상이 바뀐 만큼 이명박도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경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지하철 노조의 파업은 법의 원칙을 무시한 불법파업'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더구나 한해 지하철 적자가 6천 2백억 원에 이르는 등 경영상태가 악화되어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재정이 크게 압박받고 있는 상황을 서민들에게 알렸다. 결국 서민들의 정서를 외면한 채 파업을 강행하려던 지하철 노조는 곧 깃대를 내리고 말았다. 전임 시장들에게 연례행사처럼 해왔던 엄포가 이 시장에게도 통할 것이란 기대는, 애초 상대를 제대로 모르고 던진 도전장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그의 단호한 리더십은 2004년도 서울지하철 공사의 재무구조를 10년 만에 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605억원의 경비를 절감시킨 경영개선으로 흑자경영(2006년도 목표)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난관이라고 판단되면 지체 없이 정면으로 돌파하는 승부사 기질이, 서울시장이 되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힘이명박에게 큰 힘이 된 것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기도였다. '너에게는 희망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시험이 너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항상 용기를 주려 했다. 그는 가난과 어머니야말로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참다운 스승이었다고 말한다.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데모의 주동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실형을 살고 있을 때였다. 아들을 면회한 어머니의 말은 너무나 간단했다고 한다. "명박아, 나는 네가 별 볼일 없는 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더구나. 나는 네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네 소신대로 행동하거라. 어미는 항상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짧은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과 사랑을 다시금 가슴깊이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석방되는 것을 보고 한 달 후에 눈을 감았다.
"오빠 열흘 먹고 스무날은 굶자"야간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머니는 둘째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그에게 여동생을 부탁하고, 단칸방 하나를 구해주면서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된다. 어머니가 매달 쌀값을 보내주시긴 했으나 그 돈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모자랐다. 굶주린 여동생은 "차라리 열흘이라도 실컷 먹고 나머지 스무 날은 굶자."고 애원하여 오빠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959년 겨울,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동생과 함께 서울행 기차를 탄다. 서울에 가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이태원 판자촌 단칸방에 기거하면서, 시장 바닥에서 노점을 하고 살아가는 고달픈 삶이었다. 마땅히 일거리도 없고 밑천이 없었던 그는 할 일을 찾아서, 눈만 뜨면 서울거리를 쏘다니며 눈에 담았다. 그 순간에도 동숭동이나 안암동, 신촌 대학가와 청계천 헌책방 가게로 자주 발길이 가며, 교복을 입은 대학생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리어카에 가득찬 리더십대학 신입생이 된 청년 이명박에게 시장 사람들이 주선해 준 일자리는 리어카로 시장의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일이었다. 이 모진 경력이, 훗날 CEO가 되는 과정에서 이명박에게 끼친 영향은 참으로 크고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대표적인 것으로 다섯 가지만 들어보겠다. 첫째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다. 둘째는 아무도 자신을 위해 일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셋째는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지만 남을 위한 봉사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넷째는 자신감을 길렀던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철학을 갖게 되었다. 리어카를 끄는 일은 늘 정직해야 했다. 정확하게 물량을 실어야 했고, 매일 똑같은 코스를 반드시 가야 했다. 누가 감독을 하는 일도 아니다. 중간 중간에 쌓아 둔 쓰레기를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며 싣는 첫 단계와, 최종적으로 시장 전체의 쓰레기가 일소되었는지 마무리하는 것까지 현장 점검을 혼자서 모두 책임지는 것이 일상화된 작업이다.
따라서 최고경영자가 되고 나서 간부들이 문서로 자신없는 보고를 하면, "당신 거기 가봤어?"라는 한 마디로 제압하게 되었다. 철저한 현장중심 경영이다. 현장을 다녀오지 않았으면 보고도 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물론 그는 누구보다 앞서 현장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 현장에 나가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현장에 나가지 않고는 보고할 수 없도록 이명박 스스로 업무를 장악하는 것이다. 현장을 중시하니 자연히 관료주의와 탁상공론이 없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은 2005년 3월 초에 인사 개혁의 방향을 밝혔다. 그가 구상하는 공무원 인사 시스템 개혁이란, 한마디로 '승진하려면 민원부서로 가서 일하라'는 것이다. 승진 시기를 2~3년 앞두고 반짝 잘하면 승진할 수 있는 현행 인사 시스템은 모순이 있으므로 임용 이후 근무 태도와 성과를 종합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별도의 인사 기준을 마련하겠다는 의지였다. 이 시장은 "기획업무 위주인 중앙정부와 대 시민 업무가 많은 지방자치단체는 평가 기준도 달라야 한다. 승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선 부서에 나가야만 하는 시스템을 정착시키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이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고 확신했던 이명박의 신념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다.
불가능에 도전한 청계천 프로젝트이명박은 리더의 덕목으로 '비전과 일관성, 봉사정신과 글로벌 마인드'를 강조하였다. 이 네 가지는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그대로 적용되어 빛을 발하게 된다. 착수 전 단계에서 공표한 청계천 프로젝트는,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자리가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최고관리자가 아니라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 실행하는 최고경영자가 되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최고경영자로서 입성하겠다는 선언적 의미에는, 자신과 함께 4년간 일하게 될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어 기존의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공직 풍토를 완전히 바꿔놓겠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청계천 복원 계획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 도시환경 전문가들의 치밀한 자문을 받았고, 철거와 건설의 기술적 부분에 대한 조사용역보고서를 검토 분석하여 예상되는 시행착오에도 사전대비를 하였다. 초반 승부수로 기를 제압해 나가는 리더십은 철저한 사전 조사와 준비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통하는 것이다. 더구나 4년에 불과한 시장의 임기 중에 어설픈 수읽기로 비전만 제시하다가 실패한다면 상처를 회복할 시간도 없이 불명예 퇴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명박은 스스로 이런 위험부담을 안은 비장의 카드를 들고 서울시청에 입성했던 것이다.
청계천 복원 역사는 국제적으로 일찍부터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선진국의 대도시들이 서울을 벤치마킹 하기 위해 현장 방문을 하고 자료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난 2004년 9월에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개막한 '국제 건축비엔날레'에 서울시가 출품한 '청계천 복원'이 대상작으로 전시되었고, 청계천에 많은 외국인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서울시는 2005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유네스코와 함께 청계천 복원 전시회를 별도로 열고, 완공이 되면 2006년 비엔날레에도 다시 경쟁작으로 출품할 구상을 갖고 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고 문화공사다."라는 이명박의 선언처럼, 국제사회에 최고경영자 이명박의 '글로벌리더십'을 다시 한 번 극명하게 각인시킬 걸작으로 남게 될 것이다.
끝까지 봉투를 뜯어보지 않았다2005년 1월 초,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지하의 한 식당. 이명박의 스타일을 보여 주는 '숨겨진 일화'하나가 언론에 공개되었다. 기자 한 명이 "사람을 뽑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 왔다. "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을 때 한 간부가 봉투를 2개 들고 왔다. 하나는 청계천 고가 철거와 복원공사가 안된다고 반대한 공무원 명단이고, 또 하나는 여당에 협조한 공무원 명단이었다. 난 그걸 지금까지도 뜯어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무원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 이후 청계천은 1년 만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최고 기업의 수준이다. 공무원들이 정말 열심히 잘 해주었다. 만약 그때 내가 그 두 개의 봉투를 열어보고 쳐냈으면 서울시 공무원들은 두 편으로 분열되고, 그렇게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어진 질문은 "조직 운영에서 인사가 제일 중요하다고 보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인사야말로 조직의 성패가 걸린 문제라며 즉답을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인사다. 국가도 경영이다. 국가 경영에 정치 논리는 필요 없다. 경제 논리가 필요하다." 그는 지난 대선을 예로 들며, 시대의 변화에 맞는 공직자의 자질 검증을 강조했다. "우리는 대통령을 뽑을 때도 민주화 운동을 했느냐를 가지고 뽑았다. 이승만이 그랬고, 이후 박정희, 전두환,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선택했다. 한번도 이 시대의 대통령이 어때야 되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국민들은 정치 논리로 선택하였다. …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