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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무대를 세계로 옮겨라

안석화 지음 | 위즈덤하우스
1. 세계는 내 희망의 증거다 - 서른여덟에 시작한 세계 진출



전업주부에서 호텔리어로
- 스물 아홉에 시작한 첫 직장은 나라기획이라는 광고대행사였다. 영문타자와 영어회화를 조금 할 줄 아는 게 전부였던 나는 처음에는 단순히 사회 경험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점점 마음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업무에 적응하다보니 일이 재미있고, 앞으로 비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여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회사도 성장했고, 나 또한 과장으로 쾌속 승진해서 외국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회의나 업무를 진행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때 알게 된 외국인들의 불만은 한국은 마케팅 기초가 없으며,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마케팅의 '마'자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며 스스로를 달래곤 하던 어느 날, '작은 회사에서는 전문적인 마케팅을 배우고 싶은 내 바람을 충족시킬 수 없어'라는 답을 얻기에 이르렀다. 마케팅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며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뜻밖에도 기회는 곧바로 찾아왔다. 대우 그룹 소속의 힐튼호텔에서 내게 마케팅팀의 홍보과장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한 것이다. 내겐 굉장한 기회였다. 나는 두말 않고 그 기회를 잡아버렸다.



입사할 당시 힐튼호텔은 개관을 1년 정도 앞두고 있었다. 드디어 호텔 개관일, 언론의 대대적인 호평에 힘입어 나는 관련 임직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이와 함께 홍보차장으로 승진했다. 특별 포상 휴가로 아시아 여러 나라의 힐튼호텔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졌다. 방문하는 나라마다 많은 호텔리어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환대를 받았다. 호텔 비즈니스에 프로인 그들을 대하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 내에서 자만심에 차 있던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 영어 실력도 한계를 느끼면서…. 세계적인 호텔리어들을 만나보니 내가 올라야 할 곳이 더 명확하게 보였고 그곳에 이르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다. 나는 또 다시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었다.



서른여덟, 유학을 떠나다 - 삼십대 후반, 일과 가정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긴박한 일상의 연속이던 그때, 내 안에는 새로운 꿈을 위한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상황에서 여성의 경우 '나'라는 상품을 확실히 차별화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SWOT' 분석법(대상이나 문제점의 환경 분석을 통해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협 요인을 규정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기법)도 해보았다. 답은 단 한가지였다. 나를 철저히 보완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나는 엘리트 여성으로서 나의 전문성을 인정받고 싶었다. 아직 일할 수 있는 기간이 10년도 넘을텐데,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영원히 후회하며 지낼 것이 분명했다.



1987년 늦은 봄, 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본격적인 유학 준비에 돌입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모든 시험은 단 한 번에 끝낸다'는 목표를 세웠다. 힘든 나날도 많았으나 100% 전력투자하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느껴졌고, 계획대로 모든 시험은 단 한 번으로 끝냈다. 그리고 약 7개월 만에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짧은 시간에 굳은 의지로 얻은 쾌거였다. 10대 때부터 그렇게도 동경했던 유학을 다 늦은 나이에 행동으로 옮기게 되다니! 감격의 순간이었다. 내가 세운 목표를 꼭 이루고 오겠다고 다짐하며, 1988년 1월초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앞에는 꿈을 현실화할 수 있는 기회들이 수없이 펼쳐져 있다. 그 기회를 잡는 사람만이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물론, 더욱 새롭고 흥미진진한 경험으로 삶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다.

시련은 다가올 기회를 예고한다 -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힐튼호텔 홍보부장으로 다시 일할 때였다. 나는 앞으로의 목표와 비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실망스럽게도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룹 내에서 더 이상 높은 곳으로 오르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대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기회를 찾아 떠날 것인가! 마침내 나는 외국계 회사로 눈을 돌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미국계 국제 광고대행사인 'JWT(J. Walter Thompson Co.)' 한국 지사의 제2인자 위치인 상무이사로 스카우트되었다. 외국계 회사에서는 그렇게도 바라던 승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꿈에 한껏 들떠 있었다. JWT는 지속적인 성장 및 이윤추구를 위하여 새로운 전문경영인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상 아무리 외국계 회사라 할지라도 여성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맡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외국계 회사라 할지라도 나는 영원히 2인자 이상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무엇이 다음 길일까 또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JWT 홍콩 본사는 미국인 R씨를 사장으로 전격 선임했다. R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타 광고대행사에서 이사 및 국장급 등 경력자들을 영입해오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미시즈 안, 일주일 내로 회사에서 나가주시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고대행사의 생명은 클라이언트들의 평가에 달려 있는데,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도 회사에서 이런 불공정한 대우를 받게 되자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겨우 마음을 추스른 뒤, "홍콩 본사에 문의해 보기까지는 아무 결정도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홍콩에는 나의 잠재력과 회사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해 줄 수 있는 몇몇 지인들과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아시아태평양 지역담당 이사 M씨가 말을 꺼냈다. "미시즈 안,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근무할 마음이 있습니까?" 나는 묘한 끌림을 느끼며 "물론 하고 싶죠." 나는 즉각적으로 대답을 했다. M씨는 태국이 다이아몬드 비즈니스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므로 방콕을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홍콩에 근무하는 여러 외국 지인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대부분 태국을 적극 권했다. 결국 나는 태국 방콕을 선택했다. 나의 직책은 JWT 방콕 지사의 마케팅 전략 담당과 드비어스 담당이었다. 방콕을 향해 떠나던 날 비행기 속에서 생각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결코 다시는 지고 살지 않겠다. 부당하게 당하며 살지는 않겠다.'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위기로 다가와 기회가 된 태국진출은 이후 노키아, 싱가포르항공, 모토로라 마케팅 활동의 서곡이 되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온 시련은 나를 좌절의 끝으로 이끌었지만, 나는 그야말로 억세게 운이 좋게 살아남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절호의 기회로 반전시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해낼 수 있다'는 굳은 신념과 평소 인맥을 잘 유지해온 것이 도움이 되었다.



2. 세계를 향해 마케팅하다 - My Nokia, Motorola and DeBeers Experiences

차이를 인정할 때 진정한 프로가 된다
- JWT 방콕 지사는 전 사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고, 회장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간부직을 여성들이 맡고 있었다. 아시아인 중에서 외국인 대우로 고용된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출근 첫날, 인사를 나누는 직원들마다 해맑은 웃음과 선한 눈빛으로 나를 반겼다. 많은 이들이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속사정을 알고 있는 눈치였고, 그래서인지 내게 무척이나 다정다감했다.



다음날 첫 회의를 주재하기로 결정한 뒤, 팀원들에게 회의 안건과 메모를 전해달라고 부하직원 H에게 지시했다. 다음날 아침 11시. 정시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은 나와 H 둘 뿐이었다. 다 모이니 오후 1시였다. 회의 시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직원들과 산만하기 이를 데 없는 회의 공간을 보자, 나는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긴장되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무도 회의에 늦게 도착한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바쁜 것이란 없고, 무엇이든지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의 습성이었다. 서울에서 2시간이면 끝날 회의가 오후 6시나 되어 끝났다.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태국 다이아몬드 시장 및 소비자 성향 파악을 한 달 이내에 끝내리라 목표를 세웠다. 문제는 자존심 강한 태국인들의 만성화된 느긋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팀원 몇몇과 단독으로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들의 눈에 외국인 간부들은 직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거나 공유하는 것은 뒤로 한 채, 단기간에 본인들의 목표만 이루면 훌쩍 다른 나라로 승진되어 가버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명쾌한 결론을 얻었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지식을 그들과 공유하겠다고 말이다. 다른 부분에서도 나는 유학 시절에 터득한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법'을 시도해 보았다. 태국 직원들의 마음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한 달 정도 지나자 예정된 시간에 회의를 시작하고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태도만 갖춘다면, 남의 나라에서 다른 민족과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한없이 높은 장벽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프로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 1994년 방콕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 부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다이아몬드 시장 확대를 위한 본격적인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러 달에 걸친 조사 연구와 브레인스토밍 결과, 시장 개척을 가능하게 할 몇 가지 확실한 요인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아시아에서 다이아몬드는 약혼이나 결혼을 위한 보석이라는 인식이 그리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시아 여성들이 명품 의상 및 소지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사치품 라이프스타일 시장에 뛰어들기로 했다. 젊은 여성 그룹과 30,40대 주부들이 타깃인 시장이었다.



우리는 시장을 두 그룹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하나는 '모던한 여성을 위한 다이아몬드' 공략으로, 작은 사이즈 다이아몬드 그룹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숙한 여성을 위한 다이아몬드' 공략으로,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중년 여성을 위한 조금 크고 비싼 다이아몬드 그룹이었다. 이 일을 진행하면서 나는 여성들이 다이아몬드를 구매하기까지 무척 많은 공을 들인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만큼 다이아몬드는 여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무섭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경제적으로 뒤져 있다는 중국에서도 결혼 예물로 다이아몬드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아주 무서운 속도로 말이다. 3,4년에 걸쳐 꾸준하게 펼친 단계적 캠페인 전략의 결과로 인해 아시아에 깊이 뿌리박혀 있던 금과 옥 등, 전통적인 결혼 예물 자리를 다이아몬드가 대신하게 되었다. 나는 클라이언트의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광고인의 역할이 단순히 좋은 광고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새로운 문화를 일으킬 만큼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데 새삼 놀랐다.



프로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 노키아의 대행사이자 세계적인 광고대행사 베이츠 아시아에서 노키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 책임자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 당시만 해도, 나는 노키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노키아 아시아태평양 본부에 첫 출근을 하던 날, 나는 노키아의 브랜드 매니저들을 소개받으면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성 한 명을 포함해 모두가 2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아닌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하려는 휴대폰 사업에서 혹시라도 편견이나 아집을 갖고 있을지 모를 나이든 세대들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경영자들의 과감한 결단이 작용한 것이다. 노키아의 경영진들은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아주 획기적인 인사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담한 결정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노키아의 이 같은 경영방침이 성공을 거두자, 이후 많은 글로벌 회사 마케팅 전문가들의 연령대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크게 낮춰졌다.



직원들의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는 노키아의 남다른 기업문화는 회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노키아의 젊은 직원들은 회의할 때조차도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들은 회의실 소파나 바닥에 편안하게 눕기도 하고, 간식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등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놀라운 점은 그런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높은 성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것도 주어진 시간보다 항상 먼저 말이다. 처음에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나 나 역시 노키아팀의 자유로운 문화 속으로 신속하게 빠져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자유롭고, 용감하고, 남과 다르며, 신속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여건을 만들어준 노키아의 놀랍고도 새로운 기업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이 점이 지금의 세계적인 기업 노키아를 탄생시킨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한다!' 비슷한 두 가지 상황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나는 깊은 고민 대신 이 기준을 가지고 결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린 결정에 나는 늘 만족했다. 노키아와의 인연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나의 마케팅 경력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대행운의 기회가 되었다.

미리 준비하고 먼저 시도하라 - 노키아 신제품 Nokia8810의 런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고, 오랜만에 여유롭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도 잠깐이었다. 아이디어맨 T회장이 예정에 없던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모든 경쟁사들이 현재 시장에만 급급하고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장을 선점해보자는 내용의 회의였다. 우리는 클라이언트인 노키아에는 비밀로 하고, 내 주도하에 아시아태평양의 주요 도시에서 10대를 대상으로 휴대폰 선호도에 대한 탐색 조사를 해보기로 했다. 이 일의 목표는 다른 경쟁사들보다 먼저 청소년이나 청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휴대폰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드디어 프레젠테이션 날이 다가왔다. 노키아 측에서는 아시아태평양 부사장과 전략담당 이사가 참석했다. 프레젠테이션 제목이 'Asian Youth Study(아시아의 10대 연구)'라는 것을 안 노키아의 부사장은 이 회의가 자신들이 요청하여 마련한 것인지를 확인했다.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우리가 자진해서 조사한 것이라고 말하자, 부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비디오까지 포함하여 30분에 걸쳐 진행된 프레젠테이션은, 노키아의 또 다른 업적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노키아의 부사장은 자신들보다 먼저 이런 생각을 한 우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6개월 정도 지나자, 'Nokia3210'이 출시되었다. 이 새 모델은 가격도 비교적 저렴해 시장을 빠르게 선점했다. 노키아 특유의 기회 포착력과 순발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만약 내가 같은 프레젠테이션을 다른 회사에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누구도 적극 나서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이 섰을 때는 대담하게, 그 누구보다도 먼저 시도하려는 도전 정신이 있어야 프로가 될 수 있다. 명백한 근거 앞에서도 망설이기만 하고 자신의 선택에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결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세계무대에서는 물론 어떤 조직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없을뿐더러 결코 자신에게 만족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전파시켜라 - 노키아에서는 미국의 브랜드 매니지먼트 전략가로 저명한 데이비드 아커의 『브랜드 경영 Building Strong Brands』과 같은 저서나 혹은 그의 '브랜드 시스템' 모델을 바이블처럼 여기며 철저히 답습하고 있었다. 뒤늦게 합류했지만 나는 데이비드 아커의 브랜드 경영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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