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
홍하상 지음 | 국일미디어
제1장 박정희에 관한 오해와 진실
5.16 혁명 전야1961년 5월 16일 새벽 4시, 박정희가 이끄는 250여명의 장교와 3,500여명의 군인들은 중앙청, 시청, 의회 등 정부의 주요 시설을 장악했다. 윤보선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은 모두 연금되거나 체포되었다. 정부의 주요 시설이나 방송국도 5.16 혁명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새벽 6시, 혁명군은 남산의 KBS방송국을 접수했고, 당직 아나운서에 의해 공약이 발표되었다. 공약내용은 「반공을 국시의 제 1로 삼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 할 것」등의 내용이었다.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행정·사법·입법의 3권을 군사혁명위원회에 귀속시켰다.
5.16 혁명의 시발점은 혼란한 정치상황과 피폐해진 경제와 무능한 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분노가 결집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군인은 근대화된 인텔리를 뜻했다. 그것은 군 조직이 다른 조직에 비해 가장 먼저 근대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장교 시절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비친 당시 한국의 상황은 한시바삐 개선되거나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될 문제투성이의 나라였다.
내 월급을 가불해서 보내시오박정희가 집권하던 1961년, 우리나라 국민의 80퍼센트 정도는 농업 인구였다.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었고, 산업이 없었기 때문에 일을 하고 싶어도 일터가 없었다. 일거리가 없으니 밥을 굶는 집이 허다했고, 봄이면 농촌에서는 보릿고개로 시달렸다. 시골에서는 봄이 되면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태워서 가루로 만든 후 거기에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넣어 죽을 쑤어 먹었다. 이렇게 보낸 시기가 <보릿고개>이다.
박정희는 그러한 한국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경제 재건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다. 1962년,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외자 유치를 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외국 자본을 한국에 끌어들여 수출입국의 기반을 닦으려 한 것이다. 박정희는 수출입국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제일 먼저 GATT(제네바 관세협정)에 가입하려 했는데, 이를 위해서 긴급 태스크포스(task force)팀을 만들어 1966년 제네바로 출국시켰다. 달러가 없었기 때문에 팀은 체제 기간인 5개월 동안 싸구려 호텔에 머물면서 직접 밥을 해먹어야 했다. 문제는 GATT위원들에게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면서 한 표를 부탁해야 하는데 달러가 없으니 그들에게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팀은 본국에 연락해 달러를 조금이라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고, 난감한 박 대통령은 ''내 월급을 가불해서 보내시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제2장 폐허(廢墟)에서 재건(再建)으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박정희는 1966년을 목표로 잡고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였다. 통계로 미루어볼 때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농업부문의 개선과 전기, 전화, 교통 부문의 개발 등 자립 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이었다. 그러나 당시 농작물의 흉작과 무리한 화폐개혁, 의욕과잉과 경제 운용 계획 기술의 미숙(未熟) 등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실질적인 측면에서 의욕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실패를 발판으로 1967년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비교적 성공시킴으로서 국민과 정부 모두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기업인들5·16 혁명정부는 혁명초기에 '기업인들 중 돈이 가장 많은 11명을 부정축재자로 처벌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다. 혁명당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이병철은 그 후 10여 일간 국내사태의 변화를 주시하던 중 귀국을 결심하였고,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는 연금되었는데, 그때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과 만나게 된다. 이병철은 연금이 해제되고 '기간산업건설계획안'을 만들어 박정희에게 브리핑했고, 두 사람은 외자를 도입해서 공장을 건설하는 것만이 한국 경제가 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병철과 미국 투자유치단은 미국 워싱턴에서 행정부관리와 미국 기업인들을 상대로 외자 유치 활동을 벌였지만 차관도입에 실패했다. 한국의 정치 경제 현실이 난관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석유기업인 '걸프'와 같은 대기업이 큰 관심을 보인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훗날 걸프는 울산정유공장에 투자한다.
한편 유럽으로 건너갔던 투자유치단은 금성사의 구인회, 한일시멘트의 허채경, 쌍용시멘트의 홍재선 등의 기업인이 독일의 대기업을 상대로 협상에 들어갔는데, 독일의 기업가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분단국가 한국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어서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정래혁 상공부 장관이 단장으로 출발한 정부 교섭단이 독일 정부로부터 공공 차관 발전·설비 분야에서 3,750만 달러의 차관을 들여오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자금을 토대로 박정희 정부는 드디어 국가 건설에 착수 할 수 있었다.
독일로 간 광부들1964년 12월 10일, 박정희는 서독을 방문하기 위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튿날 서독에 도착했을 때 연도에 걸린 태극기는 겨우 20여개에 불과했고, 서독 측에서 마련해준 숙소인 스위트룸은 10평도 안 되는 작은 방이었다. 약소국가의 설움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박정희가 서독을 방문한 이유는 수출용 원자재 구입과 경제 개발에 필요한 달러를 빌리기 위해서였다. 정상회담을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광부들을 만나기 위해 수도 본에서 1시간 남짓 떨어진 '함 보른 광산'을 방문했다. 이 방문에는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도 동행했다.
'함 보른 광산'에 도착한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차에서 내려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육영수 여사는 "가족들로부터는 연락이 잘 오나요? 일은 고달프지 않으세요?"라고 물으며 간호사들을 격려했다. 육영수 여사가 세 번째로 손을 잡은 간호사에게 "고향이 어디..."라고 말을 건네자 그 간호사는 울음을 터트렸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그동안의 온갖 설움과 고통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간호사들도 함께 흐느끼기 시작했고, 광부들과 육영수 여사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악대들과 사진기자들까지 울음을 터트렸고 광산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30분 방문 예정이었던 시간이 한 시간 이상 걸렸고, 얼굴과 팔 다리가 상처투성이인 광부들을 뒤로 하고 나오는 대통령과 육 여사는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한국이 독일에 광부를 파견한 것은 1963년부터였는데, 1962년 10월 서독으로부터 들여온 1억5,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차관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들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일을 하는 조건으로 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고, 이렇게 시작된 독일 정부의 대한(對韓) 차관은 1982년 까지 총 5억9,000만 마르크에 달했다.
15년 간 한국은 7만9,000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들을 독일에 보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간호사들도 대부분 인텔리 출신이었고, 광부들도 공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독일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65명의 광부와 44명의 간호사, 8명의 기능공이 현지에서 사망했고, 외로움에 시달려 자살한 이들도 광부4명, 간호사 19명이나 되었다.
울산공업단지울산공업단지는 박정희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목표인「공업화를 위한 기반 조성」과 「수입 대체 산업 육성」에 따라 조성된 첫 번째 공업단지였다. 1967년 한국은 GATT에 가입하면서 수출의 활로가 넓어졌다. 그러나 박정희는 섬유, 신발을 비롯한 경공업 중심의 산업은 경제성장을 이루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좀 더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는 조선이나 기계, 전자 등과 같은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박정희의 생각이었다.
울산공업단지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이 있다. 이병철은 독일의 라인강 인근의 공업지구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공업지구, 안트베르펜공업지구 등의 발전을 떠올려 그와 비슷한 입지조건을 갖춘 울산을 공업단지 건설 지역으로 염두에 두고「종합 공업지대 창설에 관한 제의서」를 한국경제인협회 이사회의 명의로 국가최고회의에 제출했다. 이 제안을 계기로 울산공업단지는 건설된다.
울산은 공업화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중화학 공업단지를 조성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지형이 평지이고 용수가 풍부한 태화강을 끼고 있으며 따뜻한 해안 지역이기 때문에 항구로서의 기능을 갖추는 데도 손색이 없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부산, 포항 등 인근에 대도시가 있어 노동력 공급이 원활하여 대규모 공업단지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 또한 갖추었다.
울산공업단지조성계획의 첫 번째가 조선 산업이었다. 세계적으로 부강한 나라들은 대부분 조선 산업에 일찍 뛰어든 국가들이었다. 조선이 발달하면 기계와 운송, 항만사업 등도 함께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소탈하고 검소하면서도 저돌적인 추진력을 가진 기업인이라고 생각한 정주영에게 조선소 건설을 제안한다.
정주영은 건설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당시 우리의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져 있는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나라는 500년 전에 이미 이런 배를 만들어 이 배 한 척으로 수백 척이나 되는 일본의 군함을 전멸 시켰소."라고 기지를 발휘하여 은행에서 차관을 허락 받았다. 하지만 바클레이은행이 제시한 '한국으로부터 배 한 척을 사겠다는 발주 계약서를 가져오면 돈을 내주겠다.'는 조건이 다음 숙제였다. 다시 정주영은 그리스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세계적인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배 두 척에 대한 발주 계약'을 체결한다. 그렇게 해서 4,300만 달러의 차관을 바클레이 은행으로부터 빌려와 조선소 건설 착공에 들어가게 되었다. 울산의 황량한 바닷가 모래벌판에 먼저 조선소 도크(dock)를 짓기 시작했고, 이어 리바노스가 발주한 26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을 건조했다. 경험과 기술이 부족해 계약 기간보다 이틀이 늦어졌지만, 한국에서는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세계적인 대형 유조선을 한국 땅에서 처음 만들어 낸 것이다.
울산공업단지는 '1962년의 1단계~1987년부터 시작된 6단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발전한다. 정유 산업을 비롯한 비료, 화학, 전력 등의 기간산업들이 들어섰고, 석유화학공업단지에서 자동차산업으로 그리고 오늘날 세계 1위의 조선공업 중심지로 변화 발전해 온 것이다.
베트남 파병베트남 파병은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하는 중요한 결정이었지만, 한국경제개발에 대한 많은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지원받고 있던 약소국가로서의 우리정부는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베트남전 참가로 인해 우리 정부는 13억 달러를 벌어들이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이상, 몇 가지 협의각서를 미국에 요청했다. 한국내의 예비사단에 대해 현역 사병수준의 장비 개선과 참전 현역군이 먹고 입는 것을 한국에서 조달할 수 있도록 하는 요구였다. 이는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명문화 시킨 것이다. 그리고 세계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한국의 경제발전에 쓸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하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우리 군인들은 미국으로부터 월급을 받았는데 월급의 80퍼센트는 본인의 동의를 받아 강제로 한국에 송금되었고, 나머지 20퍼센트의 봉급도 아껴서, 돌아올 때는 텔레비전 한 대씩을 사서 들고 왔다. 파병 군인들이 본국에 송금한 월급만 3억 달러였다. 또 그들이 전쟁을 하는 동안 한국의 기업들이 한국군에 물품을 납품하고 미군 PX에 물품을 공급하면서 벌어들인 돈이 무려 10억 달러였다.
현대건설은 베트남에서 미국의 군사물자를 하역하는데 부족한 접안 시설을 준설하는 캄라인(베트남의 지명) 준설공사를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 2,550 마력짜리 준설선 한척만을 가지고 그 공사를 주야로 밀어붙여 마무리하였다. 그로 인해 받게 된 신뢰를 계기로 메콩 강 델타의 시계(視界)청소(시계청소란 무성한 갈대밭 속에 베트콩이 숨어 있다가 미군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 갈대밭을 없애버리도록 하는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메콩 강 델타는 미군의 배가 자주 접안해야만 하는 전략 요충지였으므로, 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가며 델타의 시계 청소를 마무리해야 했다. 생명을 건 귀한 달러를 베트남전에서 벌어들인 것이다.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서는 일부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 정부는 8년 8개월 동안 베트남전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일으킬 수 있었으며, 그 결과 1976년에는 비로소 북한과 대등한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이를 발판으로 급진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3장 수출만이 살길이다
머리카락 파세요.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수출증대를 위해 '한국수출산업공단'이른바〈구로공단〉을 만든다. 구로공단은 1960~1970년대 우리나라 수출의 메카였다. 당시 구로공단에서 주로 만들어낸 물건은 옷감 등의 섬유류, 전기제품, 생활소모품인 금속제품 등 이었다. 또한 1960년대의 대표적인 수출 상품이었던 '가발'도 구로공단에서 만들어졌다. 1960년대에는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던 우리의 어머니들이 생활비를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서 엿장수에게 팔았다. 그렇게 수집된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으로 수출되었다. 당시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여공들의 나이는 불과 15~16세밖에 안되었다. 이들이 명절에 고향에 다녀올 때는 자기 고향의 잔디를 한 떼씩 떠가지고 와서 그것을 공장 마당이나 자신이 다니는 야학교에 심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팔도 잔디밭'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수출산업의 역군이며 한국 근대화의 진정한 기수였다.
경부고속도로박 대통령의 고속도로에 대한 집념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1970년으로부터 16년 전인 1954년 미국의 포병학교에 갔다가 고속도로를 처음 보고 시작되었는데, 이후 1964년 에르하르트 총리의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하는 동안 그 유명한 아우토반을 달려보게 되면서 더욱 굳혀졌다. 독일과 같은 고속도로를 만들어 물류의 소통이 원활하게 하는 것이 경제개발과정에서 우선된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귀국하자마자 고속도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박정희는 태국에서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정주영을 불러 의논했다. 그리고 1967년 5월, 경부고속도로의 첫 건설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고 국내에서는 고속도로를 건설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착공도 지연되었다. 관계부처의 예산 산출액과 현대의 예산 산출액을 비교하여 330억 원 선을 공사비용으로 책정함으로써 착공에 들어갔다. 이는 일본의 도메이(東名, 도쿄-고마키) 고속도로 건설비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었다.
정주영은 전 구간 중 서울-오산 간의 건설을 맡았는데 가장 고전한 구역은 옥천공구였다. 이곳은 소백산맥의 한가운데를 뚫는 힘겨운 공사인 데다가 단단한 돌이 아닌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이었기에 수많은 사고가 발생했다. 이 외에도 갑자기 쏟아진 용수로 인해 인부들이 사망하는 등의 난관에 부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