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감성회사로 간다!
김익수 지음 | 영진닷컴
1부 - 젊은 CEO 이희열의 감성 신드롬
펩시의 신선한 자극1980년대 말 미국 아메리칸대학 국제경영대학원. 세계적인 기업 펩시(Pepsi Co.)의 인사담당자가 벌써 4개월째 이 대학의 MBA 학생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향후 아태 지역의 시장이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이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고 지식이 있는 MBA 학생들을 인턴십으로 채용할 요량이었다. 펩시의 인턴십 채용공고는 이희열에게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양계인 데다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정세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었으므로, 바로 자신을 위한 채용공고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희열의 소망대로 서류심사는 무사히 통과되었고 그 중 불과 몇 명에게만 통보된 본사 최종 면접의 기회도 주어졌다.
이희열 사장이 경영인으로서 감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바로 이때쯤이 아닌가 싶다. 펩시 본사에서는 인턴십 면접자들의 편의를 위해 왕복 비행기표를 보내왔는데, 막상 공항에 나가 보니 이코노미 클래스보다 무려 5배나 비싼 1등석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간 차 때문에 달라스에 도착한 때는 이미 어둑해져 있었는데, 그를 위해 '웰컴 투 펩시'라고 적힌 플랫카드와 함께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텔로 직행하여 내리고 보니 고급 호텔 스위트룸이 배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리무진 운전기사는 "다음날 아침 9시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면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이희열은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 중역도, 정식 직원도 아닌 일개 인턴십 사원을 위해, 그것도 아직 채용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면접 대상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다니. 순간 펩시라고 하는 회사가 엄청나게 크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본사에 가니 학교 캠퍼스에서 보았던 인사담당자가 친절하게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 역시도 꽤 직책이 높았던지 면접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면접이 끝나자 사내 구석구석을 친절하게 안내해주며 구경시켜 주었는데, 가는 곳마다 펩시의 조직이 엄청나게 크고 직원들의 표정이 밝아 '회사가 직원 복지를 위해 무척 신경을 많이 쓰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배웅을 나온 인사담당자에게 물어보니 기가 막힌 답변이 나왔다. "펩시는 입사할 1%의 자격만 있어도 똑같이 대우해 준다. 단 1명이라도 이렇게 해서 우수한 인재를 뽑을 수 있다면 보통의 99명에게 투자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펩시는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을 얘기하며,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희열 사장은 한국 BMS제약 사장 시절, 이러한 직원 중심 경영을 실천하려고 해보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직원에게 회사의 첫 인상을 좋게 심어주고 감동을 주는 데 있어서 이런 방식이 막대한 광고비를 들이는 것보다 훨씬 낫더라는 것이다. 아무튼 펩시와의 이 신선한 만남은 감성 경영인으로서 이희열을 자리매김하는 데 큰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1년 만에 세계 1위 제약회사 판매왕이 되다이희열 사장이 제약업계에서 처음 몸담은 곳은 BMS제약이 아니라 당시 세계 1위를 달리던 MSD라는 제약회사이다. 그가 MSD에 입사한 것은 지난 1990년 6월. 처음 그는 영업을 하려고 MSD에 문을 두드린 것은 아니었다. 이희열 사장은 미국 내에서도 MBA를 마친 인재가 그리 많지 않았던 때라 내심 글로벌 매니지먼트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입사지원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입사하여 영업 파트로 발령이 나자 그는 당시 한국에서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라고 하면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도 말못하고 속을 끓였던 것이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전통적으로 누구나 프론트 라인(Front Line)에서 일해야 하고 MSD 사장도 영업사원 출신이라고 하였다. "영업을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에도 매니저는 잘 할 때까지이며, 실적이 나쁘면 1년, 아니 10년이 되어도 계속 필드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함께 입사한 동료 가운데는 의사, 약사들이 즐비했고, 모두가 영업 업무에 불만이 없는 듯했다.
이희열 사장의 제약영업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에 건너간 지 6년밖에 되지 않았고 병원의 속성상 한번 특정 제약회사의 약을 쓰면 다른 회사 약으로 대체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고심 끝에 찾아낸 것은 틈새시장.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아직 남아있는 미국 사회에서 백인 MSD 영업사원들은 소수민족 의사들을 상대하기 꺼리는 듯했고, 때문에 평소 이 회사 신약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던 소수민족 의사들은 이희열 사장을 반갑게 맞았다. 게다가 그는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와 일본어 구사가 가능하다. 소수민족이 드나드는 병원이라지만 LA 인근의 한인사회만 해도 1백만 명이 넘고 여기에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까지 합치면 그 규모가 상당히 커져 거대한 시장이 된다.
이렇게 해서 이희열 사장은 입사 후 불과 4개월만에 MSD 영업사원 1인당 연간 평균 매출액 200만 달러를 훨씬 웃도는 350만 달러(한화 약43억 원)의 매출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는 이듬해 1/4분기 시상에서도 1만 8천여 명의 MSD 영업사원 중에서 1등을 차지, 입사 1년이 채 안 돼 판매왕이 되었다. 이런 괄목할 영업실적은 지금도 신화 같은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제아무리 큰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 반가웠다고 해서 무작정 구매를 결정했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음력 달력을 사용하는 중국인 의사를 위해 중추절이 표시되어 있는 중국 달력을 선물한다든지, 일본인 의사를 위해 영양갱을 준비한다든지, 한국인 의사를 위해 고국의 신문을 보내준다든지 하는,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 것들로 이들을 고객으로 삼기 위해 노력하였다.
부하를 신뢰한 감성 스승, 마그 그뇽얼마 있어 이희열은 매니
저 자격으로 아태 지역본부가 있는 홍콩으로 발령이 났다. 홍콩 근무 시절은 이희열 사장이 감성 경영의 본질에 눈을 뜰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다. 매우 분주히 동남아 여러 국가를 오가며 전략보고서 작성에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이희열은 MSD의 고위 임원인 마그 그뇽으로부터 "베트남 시장 진출 전략을 짜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베트남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아직 정치적으로 적대 국가로 취급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식으로 진출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정식 명령이 아니라 지나가는 듯한 제안이었으므로 이희열은 나중을 생각해 시장을 관망하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나서 마그 그뇽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지난 번에 얘기한 베트남 진출 건의 진행이 잘 돼 가냐?"는 것이었는데, 이희열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그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곧바로 짐을 꾸려 베트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진출계획 보고서를 작성해 정식으로 보고했다.
그리고 약 두 달쯤 지나 우연히 본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이희열은 그렇지 않아도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어 궁금하던 터라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일전에 보고한 베트남 진출 보고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베트남 진출은 제안서대로 하기로 했다. 만약 제안서대로 하지 않기로 했으면 어떤 얘기가 있지 않았겠느냐? 부하직원이 심혈을 기울여 제출한 보고서인데 믿고 추진해야 하지 않겠느냐? 오늘부터 MSD의 베트남 전문가는 당신이다."
이 얘기를 들은 이희열 사장은 아무 말도 없어 제안서가 보류되었나보다 생각했는데, 뜻밖의 말에 내심 크게 놀랐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그 그뇽은 부하직원을 매우 신임하는 상관이었다. 그는 최대한 부하는 존중하고 업무에 관여하려 들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말하자면 책임과 권한을 직원들에게 최대한 많이 주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마그 그뇽은 항상 캐주얼 차림으로 출근하고, 출근할 때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으며, 출근은 늦게 하면서 퇴근은 누구보다 빨랐다. 그런데 그가 맡고 있던 아태 지역 성장률은 전 세계 사업장 중 항상 1위를 차지했다. 때문에 사내에서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도 그는 매우 유능한 관리자였다. 그는 회사의 규칙을 따지기 이전에 부하 직원들이 정말 편하게 일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관리자였고, 불필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보다 한 시간을 일해도 어떻게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보스였다.
이희열 사장도 경영자가 되고 나서 야근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 바로 마그 그뇽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한번은 그가 이희열 사장에게 "장차 5년, 10년 후에는 뭘 하고 싶으냐?"고 질문한 적이 있는데, 이희열 사장은 거침없이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까마득히 잊고 있을 그 해 연말에 그로부터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는데, "이제 9년 반 밖에 남지 않았다. 더 열심히 하기 바란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희열 사장은 그가 연말에 전 세계에 수만 명의 직원에게 개별적으로 특별한 카드를 보낸다는 것에 놀랐다. 오늘날 이희열 사장도 매년 수백 명의 직원들에게 일일이 카드를 적어 보내기를 잊지 않고 있고, 생일을 맞은 직원에게는 와인이나 케이크 등을 보내 깜짝 놀라게 하는데, 이 역시 마그 그뇽에게 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성 리더로서의 새 출발1993년 한국 MSD를 설립한 이희열 사장은 이사의 직책으로 1995년까지 MSD 한국지사의 수장 역할을 했다. 영업사원으로 출발해 최연소 이사가 되기까지 MSD는 그에게 성공의 발판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표를 제출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부친의 병원 경영을 돕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때가 1990년 MSD에 말단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지 만 5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이희열은 한동안 부친의 병원 업무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MSD에서 인정받은 인재를 주변에서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바이엘 아시아지역 부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 MSD 시절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는데 사표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제안이 온 것이었다. 고민 끝에 한국바이엘 지사에 대한 경영자문과 미래전략, 구조조정 등에 대한 고문역을 하게 되었다. 바이엘에서의 생활로 분주한 나날이 이어지던 중 예고 없이 BMS 본사 인사담당자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미국 동부에 위치한 뉴저지로 날아간 이희열은 국제담당 사장과 저녁식사를 하는 중에 "BMS에서 제가 얼마나 필요합니까?"라고 직설적이면서 협상적인 질문을 했다. "경영을 하는 사람이니 숫자로 표현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하루 중 한국 시장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채 1%가 안 됩니다. 아무리 많이 관심을 가지려 해도 1년 중 하루 이상의 시간을 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최근 며칠을 꼬박 소비했고, 우리에게 그만큼 당신은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 저녁식사에서 이희열은 단번에 '좋다'고 제의를 수락했다. 자신을 이처럼 비중있게 생각하고 신뢰하는 기업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 그가 한국과 호주에서 감성 경영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을 믿어주고 마음껏 감성 경영을 펼칠 수 있도록 지지해준 BMS와 국제담당 사장과 같은 상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만 당하는 구조조정은 싫다IMF 시절 한국 BMS제약에도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공문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희열 사장은 본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조금 있자 본사 국제담당 부사장이 직접 한국지사를 찾아와 담판을 지으려 했다. 본사가 요구하는 것은 10%의 감원과 전 직원의 임금 30% 삭감이었다. 미팅 당일. 구조조정을 하려는 본사 임원과 이것을 막으려는 이희열 사장이 한국지사 이사급 이상 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주 앉았다. 국제담당 부사장이 고통 분담 차원에서 한국지사 직원 10%를 감원하라고 요구했으나 이희열 사장은 단번에 "곤란하다"고 답했다. 이번에는 부사장이 설득에 가까운 제안을 해왔다. 만약 직원을 자르기 싫다면 30% 가량 임금 삭감을 하면 10% 정도 감원 효과가 나타나니 그렇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러자 이희열 사장은 자신이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고 했다. "본사의 요구대로 임금을 삭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우리들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했으니 당신도 월급에서 5%를 줄여주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임금 삭감을 할 수 있습니다." 본사 국제담당 부사장이면 한국 직원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월급이 많을 것이니, 그가 5%만 줄여도 한국지사 직원 임금 30% 삭감과 같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말한 것이었다.
부사장은 당황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회사에 좋지 않은 선례가 되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희열 사장이 말을 받았다. "그것 보십시오. 당신도 싫지 않습니까? 고통 분담이라고 했는데, 왜 당신도 싫은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건가요? 한국은 살면 다 같이 살고, 죽으면 다 같이 죽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랫사람들만 고통 받으라고 하는 구조조정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부사장은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을 남기고 빈손으로 되돌아갔다. 주위에서 지며보던 임원들은 쾌재를 불렀다. 이희열 사장은 오히려 그 해에 직원들 월급을 올려줬다. 주위에서는 회사가 이상하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부럽다고들 얘기했고, 직원들은 회사가 매우 자랑스럽다며 전에 없이 활기찬 표정을 지었다.
오세아니아 지역 총괄 사장으로2003년은 이희열 사장에게 뜻 깊은 해가 되었다. 그가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한 오세아니아 지역 총괄사장(GM)으로 임명된 것은 전 세계 BMS 내에서도 매우 파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호주 BMS가 지난 1935년 문을 연 이후 백인을 제외한 유색 인종이 총괄사장으로 임명되기는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감성 경영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BMS 본사는 일찍부터 그의 탁월한 조직관리와 감성적인 리더십에 주목해 왔고, 그 결과로 여타 지역에 비해 실적이 두드러지게 높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생각해왔다. 본사 사장이 오세아니아 GM으로 그를 승진발령하면서 그에게 요구한 것도 "한국에서와 같은 경영방식을 호주에서도 해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국내 대기업의 경우 평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올라가려면 최소한 2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 65개국에 진출해 있는 글로벌 기업에서 입사 7년 만에 일개 지역사장도 아닌 전략적 요충지의 총괄사장으로 단기간에 올라선 것이다. 그의 승진 소식을 가장 먼저 기뻐한 사람은 직원들이었다. 회사 실적이 좋아 사장이 승진발령나자 그 밑에 있던 임원들도 계단식 승진을 했다. '회사가 잘 되도록 해서 보스를 승진시키는 것이 자신이 성공하는 길'이라던 그의 지론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그가 호주로 떠나고 한국 BMS제약에 후임 사장이 취임하던 날, 새 사장의 취임 인사말을 듣는 자리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수고하신 전임 사장님을 위해 박수를 칩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직원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강당이 떠나갈 듯 기립박수를 쳤다. 직원들은 오래도록 박수를 치면서 진심으로 이희열 사장에게 감사와 축하를 보냈다.
2부 - 직원 편이 되라. 그들을 도와라
경영자의 고객은 '직원'이다많은 CEO들이 기업 경영에서 직원 관리가 가장 힘들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희열 사장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가 이 부분에서 찾는 해법은 남다르다. 이희열 사장은 그 실천 방법으로 '직원=CEO의 고객'이라는 등식을 설정했다. "경영자에게 고객은 외부에 있는 고객이 아니라, 바로 직원입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CEO가 소비자를 만나고 물건을 팔고, 기술을 개발할 필요는 없다. 리더는 단지 배의 선장과 같이 가야 할 방향을 정해주고, 조직이 항로대로 제대로 갈 수 있도록 독려해주면 되는 것이다. 직원을 고객이라고 설정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우선 고객을 대하는 것처럼 직원들에게도 서비스 정신이 생긴다. 또 직원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회사가 어떻게 해주면 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고객인 직원이 클레임을 걸기 전에 먼저 나서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