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과 리더십
이길진 지음 | 동아일보사
이로부터 다시 50년이 지났다. 이에야스의 할아버지인 기요야스의 시대가 되었다. 1523년에 13세의 나이로 마쓰다이라 가문의 주인이 된 기요야스는 무장의 자질을 구비한 인물이었다. 오카자키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야마나카 성도 함락했다. 기요야스는 몇 년 사이에 서부 미카와의 토호들을 모두 귀속시켰다. 이어서 기요야스 군단은 대거 국경을 넘어 오와리에 쳐들어갔다. 이것이 마쓰다이라 가문과 오다 가문이 격돌하게 되는 첫 시기였다. 그런데 1535년 겨울 기요야스가 오다 노부히데(노부나가의 아버지)를 공격하기 위해 모리야마에 진을 쳤을 때 가신에게 살해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흉변이 일어났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모리야마의 붕괴'라고 한다. 이 때 기요야스는 25세였다. 갑자기 주군을 잃은 마쓰다이라 군은 서둘러 오카자키로 철수했다. 기요야스의 아들 히로타다는 겨우 10세의 소년이었다. 이를 불안하게 여긴 노신 아베 오쿠라 등은 히로타다를 망명시키기로 했다. "우리는 어떤 고난에 부닥치더라도 기어이 주군을 오카자키로 복귀시켜야 한다." 이것이 아베를 비롯한 후다이들의 비원이자 의지였다. 그리하여 히로타다는 1537년, 12세 때 꿈에도 그리던 오카자키에 귀환했다. 그러나 마쓰다이라의 영지는 전과 같지 않았다. 전투가 있을 때마다 마쓰다이라 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게다가 거듭되는 출병에 녹봉은 부족하여 가난이 마쓰다이라를 엄습해 왔다. 그러자 마쓰다이라의 후다이들은 어린 주군 히로타다를 지키기 위해 싸움터를 누비고 처자를 먹여 살리려 밭에 나가 묵묵히 일했다. 당시에는 무사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비운이 있었기에 마쓰다이라는 주종 간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강한 유대로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인질에서 인질로히로타다의 장남 다케치요(이에야스의 아명)가 태어난 것은 1542년 12월 26일이었다. 어머니는 가리야의 성주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오다이였다. 그런데 이에야스가 태어난 이듬해 외조부 미즈노 다다마사의 뒤를 이은 아들 노부모토가 오다 쪽에 가담했기 때문에 히로타다는 아내 오다이와 헤어지게 되었다. 이에야스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숙부인 노부타카가 중신들과 짜고 히로타다를 아카자키 성에서 몰아내려 획책했다. 히로타다는 요시모토의 힘을 빌려 반대세력을 일소하려 했다 그러나 요시모토는 원병의 대가로 적자인 다케치요를 인질로 원했다. 1546년 8월, 6세의 이에야스는 수행원들과 함께 오카자키 성을 출발했다. 일행이 다와라에 상륙하자 다와라 성주이며 외조부(히로타다가 오다이와 이혼한 후 새로 맞이한 아내의 아버지)인 도다 야스미쓰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런데 야스미쓰는 이에야스 일행을 배에 싣고 동쪽의 스루가와는 반대쪽 오다의 영지인 오와리로 데려갔다. 뜻하지 않은 횡재에 오다 노부히데는 기뻐했다. 노부히데는 즉시 히로타다에게 사자를 보내 권유 겸 협박을 했다. 그러나 자식의 생명이 걸린 일임에도 히로타다의 태도는 단호했다.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마가와와 맺은 오랜 우의를 배신한다면 미카와 무사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다케치요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결국 히로타다는 무사의 오기를 관철했다고 하겠으나 이에야스는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결과가 되었다. 이때 노부히데는 이에야스를 연금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 이후 1549년 4월에 히로타다는 가신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암담한 나날이에야스가 스루가의 수도인 슨푸에서 인질 생활을 한 곳은 지금의 다카쇼 부근이다. 여기서 그는 8세부터 19세까지, 인생에서 가장 암담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겉으로는 평온하게 보였을지도 모르는 12년 동안이 그에게는 암담 그 자체였다. 오랜 세월 그는 얼마나 많은 굴욕을 참아야 했는가. 1555년 15세가 된 이에야스는 관례를 올리고 그 이름을 다케치요에서 모토노부로 바꾸었다.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조심성'이 표면화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는 극단적으로 경계심이 강한 인물로 야심이라거나 꿈과 같은 막연한 것은 전혀 믿지 않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을 경계심과 방어본능으로 겹겹이 무장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나 두드리고도 좀처럼 건너지 않았다. 이런 성격은 그가 모토노부라 불리던 15세 때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 이중인격이라 할 수 있는 이런 성격은 바로 10여 년간에 걸친 가혹한 환경이 가져다 준 산물이다. 배신과 음모가 다반사였던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중한 처사'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첫 출전1557년 정월에 이에야스는 세키구치 요시히로의 딸과 결혼한다. 관례를 올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 무장으로서의 통과의례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이 첫 출전이다. 이에야스에게는 그 기회가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이에야스는 첫 출전을 멋지게 승리로 끝마쳤다. 이 일련의 공격에는 이에야스다운 신중함이 나타나 있다. 부족한 병력으로 오다의 여러 성을 공격하고 가신의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미카와에 이에야스가 있다'는 인식을 심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랫동안 꿈꾸던 상경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해 스루가, 도토우미, 미카와에서 소집한 2만 5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작전을 개시한 것은 1560년이었다. 이에야스에게 내려진 명령은 오와리 진격의 선봉이 되어 오다 군의 최전선에 있는 마루네 성채를 공략하라는 것이었다. 이마가와 군 중에서 사지에 던져지는 것은 언제나 마쓰다이라 군이었다. 이에야스는 적장 일곱 명의 목을 베어가지고 돌아와 요시모토에게 승전을 고했다. 전초전의 승리에 요시모토는 "수고가 많았다. 오타카 성에 들어가 인마를 휴식시키도록 하라."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타카 성은 오다의 영지 깊숙이 돌입한 곳에 있는 이마가와의 거점이다. 그러므로 휴식은커녕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오타카 성의 수비 교대가 이에야스의 목숨을 구하고 그 생애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다주게 된다. 왜냐하면 이에야스가 오타카 성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노부나가의 기습을 받아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노부나가와의 동맹요시모토의 죽음은 이마가와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염원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분명히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신중을 기하면서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마가와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에야스의 가족을 비롯하여 가신의 가족 중에서 상당수가 인질로 이마가와의 땅에 연금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계속 이마가와의 동정을 살펴야 했다. 이러한 이에야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것이 노부나가였다.
노부나가는 미카와만은 어떻게 해서든 안정시켜 두고 싶었다. 이에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오다와 마쓰다이라 두 가문이 손잡고 오다는 서쪽, 마쓰다이라는 동쪽으로 판도를 넓혀 마음껏 무위를 떨치는 것이 어떻겠나?"하고 제안했다. 이때도 이에야스는 신중했다. 자칫 판단을 그르치면 모처럼 되찾은 미카와 영지를 잃고 가문이 멸망할 수도 있다. 노부나가와 손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직은 거대한 세력이 남아 있는 이마가와의 우산 밑에 있을 것인가. 중신들은 대부분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오다에 비해 이마가와가 훨씬 더 강하다는 것, 둘째로 이에야스의 정실인 쓰키야마 부인이 이마가와의 일족이라는 것, 셋째로 쓰키야마 부인과 그 자녀, 중신의 상당수가 이마가와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야스는 어디까지나 실리를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요시모토의 아들로 가문을 계승한 우지자네와 노부나가의 인물 됨됨이를 비교한 끝에 노부나가의 기량을 높이 샀다. 일단 판단한 이상 처자가 희생되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신들의 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중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노부모토의 권고를 받아들여 기요스에서 은밀히 노부나가와 만나 공수동맹을 맺었다. 1562년 정월의 일로 역사에서는 이를 '기요스 동맹'이라고 한다.
이에야스는 본격적으로 동부 미카와로 진출을 감행했다. 지금까지 이마가와에 복속되어 있던 동부 미카와의 영주들이 잇달아 무릎을 꿇게 됨으로서 이에야스는 미카와의 통일적 지배를 향해 착실하게 한걸음 내디뎠던 것이다. 그리고 1563년 7월에 이르러 다시 '모토야스'란 이름을 '이에야스'로 바꾸었다. '모토'라는 글자는 요시모토의 이름에서 한 자를 빌린 것이었으므로 그 이름을 쓰면 이마가와 가문의 종속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명은 이마가와 가문과의 완전한 단절, 즉 명실상부한 독립을 뜻하는 것이었다.난세의 논리
미카와의 반란외부로의 영지 확장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의 통일, 질서의 확립을 이룩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미카와 일대에는 치외법권적인 집단이 남아 있어 이들 세력이 언제 적과 손을 잡고 반기를 들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 잇코슈 대사원이고, 또 이들 사원에 종속되어 있는 토착무사와 농민들이었다. 이들 사원은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로부터 '불입권', 즉 영주에 의한 수사와 체포권의 거부, 세공과 부역의 면제 등의 특권을 약속 받아 일종의 독립적인 종교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카와의 영주인 이에야스에게는 충성을 바치지 않고 오직 오사카에 있는 본산인 혼간 사에 복종하여 추수한 벼를 모두 그리로 옮기고 이에야스에게는 벼 한 톨도 바치지 않았다. 1563년 9월, 이에야스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던 잇코슈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벼의 징발에 있었다.
전국시대의 잇코슈는 광적인 열기를 띤 서민종교로, 그 조직도 웬만한 다이묘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군비를 갖춘 과격집단이었다. 반란에 가담한 자는 승려와 농민, 이에야스의 병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유력한 가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반란군은 차차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내란이 오래가면 언제 외적이 침입할지 모른다. 이에야스는 이듬해 2월 반란군과 화의를 맺고 세 가지 조건을 약속했다. 첫째, 반란에 가담한 무사의 토지는 몰수하지 않는다. 둘째, 사원과 승려는 종전처럼 대하고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 셋째, 반란의 주모자를 처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에야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이에야스가 약속을 지킨 것은 제1항뿐이었다. 강경하게 항의하는 자는 모조리 체포하여 미카와에서 추방했다. 반란의 주모자들은 모두 영지 밖으로 도주했다. 도발과 회유, 이 양면 작전으로 이에야스는 서부 미카와의 안정을 되찾고 다시 동부 미카와로 진격하여 그 최대 거점인 요시다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드디어 미카와 전체의 통일을 완수했다. 이에야스는 조정의 칙허를 받아 성을 마쓰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미카와를 통일한 시점에서 이에야스는 중앙정부, 즉 조정과 쇼군으로부터 미카와 전체의 지배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567년 정월에 이에야스는 종5품 미카와노카미라는 관직을 받게 된다.동맹자의 죽음성실과 신의를 다해 20년 동안 노부나가와 동맹을 고수한 이에야스는 1581년 3월, 동부 도토우미에 있는 다케다 군의 마지막 거점 다카텐진 성을 3년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탈환했다. 다카텐진 성은 이에야스에게도 요충지의 거점이었다. 다케다 가문이 패망한 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공을 치하하여 스루가 땅을 그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미카와와 도토우미, 그리고 스루가를 합쳐 70여 만석을 가진 당당한 다이묘가 되었다. 그해 5월, 이 스루가를 준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노부나가가 머무는 아즈치를 향해 출발했다. 노부나가는 20여 년에 걸친 이 충실한 동맹자를 극진하게 환대했다. 5월 20일에 이에야스는 노부가와와 헤어져 소수의 수행원만 대동하고 교토로 향했다. 그는 교토, 오사카, 나라, 사카이 등을 유람하면서 노부나가의 가신과 거상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사카이는 자치제를 실시하여 무사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에야스는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6월 2일 아침 노부나가와 재회하기 위해 사카이를 떠났다. 일본의 국부(國富)를 한데 모은 듯한 사카이 항구를 둘러보며 이에야스는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노부나가의 실력은 천재적인 전술의 구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거상들을 조종하며 그 재력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데 있다. 앞으로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더 경제전략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밀려오는 감회를 누르면서 들판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고 있었다. 멀리서 말을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나이는 교토의 상인으로 이에야스와 절친한 자야 시로지로였다. "큰일났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모반을 일으켜 노부나가 공이 오늘 새벽 목숨을 잃었습니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것은 바로 동맹자인 이에야스의 실추를 의미한다. "그러면 나도 교토에 들어갈 수 없겠군." 이에야스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 번도 배신하지 않고 지켜온 20여 년간의 맹약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생애에서 4대 위기의 하나로 전해지는 필사의 도피가 시작되었다.
이에야스 일행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적과 폭도화한 백성들이 도처에서 길을 막고 호시탐탐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인 자야 시로지로는 그들을 회유하는 데에 금품이 제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리하여 가는 곳마다 돈을 뿌려 몇 번이나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이에야스를 태운 배가 이세의 앞 바다에 나온 것은 6월 4일이었다. 그는 뱃머리에 서서 붉게 타오르는 바다를 감개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노부나가가 사라졌으니 가이와 시나노는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그렇다면 늦기 전에 내가 손에 넣어야 한다."거대한 적
동부의 맹주강적의 등장새 시대의 질서
에도 바쿠후의 출범1603년 2월 12일에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우대신에 임명되는 동시에 세이이타이쇼군의 보직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62세에 명실상부한 천하의 지배자로서 에도에 바쿠후(일명 도쿠가와 바쿠후)를 개설했다.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한 의도는 도요토미 가문의 2세인 히데요리와의 신분적 관계를 청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즉 이에야스가 아무리 정치의 중추에 있다고 해도 형식상 히데요리 휘하의 다이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어 무가정권을 수립하여 히데요리와의 주종관계를 역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쇼군직을 택한 데에는 좀 더 깊은 의도가 있었다. 첫째는 조정의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무가의 전통에 따른 독자적 정치를 행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유는 쇼군에 취임하여 바쿠후를 개설함으로써 도쿠가와 새 정부의 수립을 정당화하고 도요토미로부터 정권을 탈취했다는 세상의 비난을 사상적으로 극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쇼군이 되어 에도에 바쿠후를 개설하여 도요토미와의 주종관계를 역전시킨 이에야스는 1605년 2월에 상경하여 후시미 성에 들어가고, 그 다음 달에는 후계자인 히데타다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교토에 들어왔다.오고쇼와 쇼군1605년 4월 7일에 이에야스는 노령을 이유로 쇼군직을 3남 히데타다에게 물려줄 것을 조정에 주청하고 16일에 후시미 성에서 히데타다의 쇼군 취임식을 거행했다. 지금까지 쇼군과 다이묘의 관계는 다이묘들이 이에야스라는 개인의 힘에 굴복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히데타다에 이르러서는 개인을 초월한 도쿠가와 쇼군 가문에 다이묘가 신종하는 관계로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된 중앙정권의 주권자 지위는 대대로 도쿠가와의 종가가 세습한다는 전통을 서둘러 확립하는 일, 이것이 이에야스가 60년에 걸친 고투와 인내 끝에 차지한 쇼군의 지위를 불과 2년 남짓만에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최대의 이유였다. "히데요리, 그대는 이미 정권을 담당할 기회를 잃었다. 정권은 대대로 도쿠가와의 직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