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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리더 조조

나채훈 지음 | 북폴리오
1. 조조가 활약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



탁류(濁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후한시대라고들 한다. 탁류라고 하면 청류(淸流)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중국사에 있어서 환관 가문을 일컫는데, 후한의 명문거족 사대부 출신들이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스스로를 청(淸)이라 부르며 다른 실권자 그룹인 환관들을 탁(濁)이라 비웃은 데서 비롯되었다. 확실히 전한(前漢, BC 205∼AD 5)은 외척에 의하여, 후한(後漢)은 환관들의 부패와 권력욕으로 멸망했다. 조조는 이 탁류 가문에서 나왔다. 물론 후한시대의 환관들이 부패했고 나라를 망치게 된 사실과 조조의 등장 사이에 직접적 관계는 없다. 그러나 풍부한 개성과 변화무쌍한 처세술로 난세를 헤쳐나간 그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환관정치와 그들이 빚어놓은 병폐가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사에 있어 환관들이 정치에 일정한 역할을 하는 시기는 춘추시대였지만 한나라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세력으로 변했다. 그 원인은 황태후의 섭정에 있었다. 황제가 죽고 후계자가 나이가 어릴 때 황태후가 직접 정치를 관장하는 섭정이 일어나면, 황태후가 내리는 모든 정령(政令)은 환관의 손을 통하여 조정대신들에게 전달되었다. 명령의 전달자로 시작된 환관의 정치 참여는 차츰 조정대신과 최고 통치자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막(幕)을 형성하고 황실의 측근으로서 세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세력을 얻자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아무튼 남성의 기능을 희생하면서까지 출세의 기회를 노렸을 만큼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비장함으로 집요하게 권력에 매달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환관들이 득세하던 시대에 환관 조등(曹騰)이 등장한다. 조등은 제6대 황제 안제와 황후 이비(李妃) 사이에 태어난 유보(劉保)의 황태자 시절 시종이었다. 그는 착실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동태후의 눈에 들어 황태자의 글동무로 출사하게 된다. 조등, 자는 계흥(季興), 패국(沛國)의 안휘현 출신으로 이 사람이 조조의 할아버지다. 후에 순제가 된 유보는 조등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조등 또한 다른 실력자 환관들이 하는 방법과 다름없이 양자를 들였는데, 그가 바로 조조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으로 이름이 숭(嵩), 자는 거고(巨高)라고 하였다. 조조에 관한 기록은 어떤 기록을 봐도 조숭의 태생임은 분명하다. 단지 여러 자료를 종합해볼 때 조숭은 하후씨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조조의 부장(副將)이 되어 무공을 세운 하후돈은 조숭의 조카로 조조에게는 사촌형제가 되는 셈이다. 하후씨는 원래 조씨와 같이 패국 출신으로 한나라 고조의 공신(功臣) 여음후(汝陰候)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숭의 출신이 불분명한 걸 보면 그가 양자로 들어갈 무렵 하후씨 집안이 상당히 몰락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왜냐하면 당시 환관들의 양자는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하층 계급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정에 막강한 세력을 잡고 있는 환관의 양자가 된 조숭이 영제(靈帝) 때 이미 사례교위, 대사농 등의 요직을 거쳐 1억 전의 금품으로 삼공의 하나인 태위(太尉)의 지위를 얻었을 때, 조조는 제남(濟南 : 산동성)의 장관으로 있었다. 이때 조조는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는데 이는 아비의 매관매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숭은 반년쯤 후에 태위에서 물러났다. 조조는 고향으로 돌아와 독서와 사냥을 즐겼는데 이 무렵 한나라 조정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듯 싶다. 한 마디로 실망이었고, 장차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조는 환관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환관 정치의 병폐를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았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의 최고 통치자를 천자(天子)라 하고 이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서 땅 위에 사는 백성의 삶을 돌보고 이끄는 덕망 있는 자다. 그래서 자연에 이변이 발생하면 천자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여겼는데 이는 중국의 정사(正史)가 갖는 입장이었다. 정사를 다룬 여러 역사적 기록에 지진이나 홍수, 가뭄과 메뚜기 떼의 내습 등의 천재가 상당히 면밀하게 적혀있는데, 후한 중엽 이후에 마치 조정의 부패와 정치적 혼란을 보여주듯 온갖 재해와 질병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환제 때는 극심한 재해와 백성들의 참상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부역의 면제와 곡식의 배급 등 조치를 내렸지만 탐관오리들은 착취할 대상이 줄어들자 예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가렴주구에 몰두했다. 돈으로 벼슬을 샀으니 본전을 뽑아야 했던 것이다. 이에 헐벗고 굶주리다가 허무하게 죽어가던 백성들이 농토를 버리고 무리를 지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후한 말기에 와서는 유랑민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토착 농민의 대량 유목민화는 농업을 국가경제의 근본으로 삼고 있던 당시로서는 국가 경제의 파탄은 물론 국가의 통치체제가 붕괴해가는 조짐이었다. 이들은 경제력이 있는 지방의 호족들과 새로운 주종관계를 맺고 노예가 되거나 무리를 지어 적(賊)이 되었다.

이런 봉기의 총괄적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황건의 난은 비틀거리는 조정과 유랑민이 되어 떠도는 백성들, 혼란을 틈타 자기 세력 확보에 고심하는 지방의 호족들 모두가 공범이었다. 영제 중평(中平) 원년(184), 먹구름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듯 황건의 난이 발생했다. 이 폭동은 그때까지의 국지적이었던 농민 봉기와 달리 분명하게 한나라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내건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황건의 난은 준비가 미흡한 탓에 관군에게 저지당하여 수령인 장각 형제가 죽자 기세가 크게 꺾였지만, 이후 소멸되지 않은 채 10여 년 동안 쇠퇴해가는 후한의 명맥을 결정적으로 끊어 놓았다. 이 황건 토벌전에서 은둔해 있던 조조가 기병대장이 되어 큰 공을 세우는데, 이 때의 공적으로 조조는 제남의 지방장관이 되지만 아비 조숭이 매관매직으로 태위가 되자 사퇴하고 낙향했던 것이었다.

2. 카리스마 리더 조조



조조의 면면을 살피기에 앞서 조조를 다룬 자료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조의 발자취를 다룬 많은 서적들의 견해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진수(陳壽)가 쓴 역사서 『삼국지』를 들 수 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정통론으로 한(漢), 위(魏), 진(晋)을 꼽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영토가 넓고 백성도 많은 중원 땅을 지배하고 진나라로 이어진 조조의 위나라가 한나라의 뒤를 이은 정통왕조라는 주장이다. 또한 남송시대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도 정통론을 위나라로 인정하고 조조를 높게 평가한다.

그렇다면 조조에 대한 오늘날의 인식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명나라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를 빼놓을 수 없다. 나관중이 쓴 이 소설에 보면 조조의 됨됨이를 지독히 깔아뭉개고 약자였던 유비를 덕인이자 선인으로 칭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삼국시대 이후 원나라 말기까지 일반 민중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삼국시대 인물들에 대한 감정을 절묘하게 이용하여 역사적 사실과 상관없이 독자들에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을 비롯해 특성이나 능력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조조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관중이 쓴 이 소설은 다른 어떤 역사서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를 유발하여 수많은 독자에게 읽혀졌고, 이것이 오랜 세월 거듭되고 더욱 널리 애독되면서 사실과 창작 부분을 구별하는 데 별다른 의미가 없게 되고 오히려 삼국지라고 하면 진수의 정사 역사책이 아니라 나관중의 소설을 말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관중은 소설에서 덕망 있는 선인 유비의 촉을 정통왕조라고 하고, 조조를 신하의 신분으로 제위를 찬탈한 악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유비와 제갈량, 관우를 악인 조조에게 징벌을 가하는 초인적인 덕성과 지혜와 무용(武勇)을 가진 영웅으로 묘사했다. 유비의 집단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조조와 그 일파들은 무능하고 교활하며 악랄한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대철학자 노신(魯迅)은 이렇게 말하였다. "조조라고 하면 모두들 나관중이 쓴 소설 속에 나타나는 뱃속이 검은 악인으로 여기는데 이는 조조라는 역사적 인물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못됩니다. … 사실 조조는 매우 재능이 풍부한 인물이며 적어도 영웅이란 대접을 해도 부족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나는 조조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그에 대하여 마음 깊이 경복하고 있습니다."

영제 때 태위 벼슬을 지낸 교현(橋玄)은 사람보는 눈이 정확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조조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그를 찾아간 적이 있다. 교현은 조조를 보고 말했다. "지금까지 나는 천하의 명사와 인재를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너만한 인물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부디 신중하게 행동하여라. 난세에 백성을 구할 사람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당대에 이미 높은 학식과 덕망을 인정받고 삼공의 벼슬까지 지낸 인물인 교현에게 나이도 어리고 벼슬도 낮은 조조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교현에게 자신의 장래를 물어본 이 일화는 조조의 됨됨이를 살펴볼 수 있는 한 사례이다.

조조가 무장(武將)으로 등장하는 계기는 황건의 난이었다. 조조는 기병대를 이끌고 황건의 배후를 쳐 상당한 공을 세웠고, 조정에서는 논공행상으로 그를 제남의 상(相 : 실질적인 지방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당시 제남 일대의 관리들은 환관들을 등에 업고 뇌물을 바치면서 관직을 유지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치부했기 때문에 그 참상은 극심했다. 제남 일대가 황건의 근거지가 된 점을 보아도 그들의 행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증명된다. 이에 조조는 부임하자 즉시 탐관오리들을 파면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곡식을 빼앗아 사치생활을 하는 제사(祭祀)를 폐하였다. 제남을 다스리는 동안 그의 시책은 엄격하고 합리적이어서 일대는 평온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조의 성망은 나날이 높아 갔다. 긴 세월 피해를 입은 백성들 입장에서 조조야말로 기다려 마지않던 이상적 관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조는 아비 조승이 태위 관직에 오르자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중평 6년(189) 4월에 영제가 죽고, 그의 아들 유변(劉辯)이 17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대장군 하진은 이 틈을 타서 환관들을 해치려고 원소와 원술 등을 요직에 임명하고 지방에 있는 유력한 군벌들에게 낙양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하진의 계략이 발각되어 8월에 그는 중상시 장양과 단규의 덫에 걸려 궁중에서 암살당했고, 화가 난 원소는 지방에서 오는 군사를 기다리지 않고 궁궐로 쳐들어가 불을 지른 후, 환관이면 모조리 도륙하였는데 수염이 없어 죽은 자만도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하여 환관의 대부분이 살해당하는 대참극이 발생했다. 후한 시대의 환관 정치는 이렇게 종말을 고했다. 한편 소집령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으로 올라오던 동탁은 낙양성 방면에 불길이 솟아오르자 군사를 재촉하여 진격을 서둘렀다. 동탁은 피신한 황제를 북망산에서 만나 그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세상은 동탁의 의도대로 돌아갔다. 환관이 일시에 몰락한 후 생긴 권력의 중심을 동탁이 차지한 것이다. 동탁은 조조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기병사령관직을 주겠다고 유혹했는데 조조는 이를 거절하고 보복 받을 것이 두려워 낙양에서 도망쳤다.

한편 조조가 도망치고 있을 때,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논란이 되는 여백사 일가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조조가 하남성 상고현에 있는 아비의 친구 여백사 집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여씨 일가를 모조리 죽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조조를 악인으로 꾸미려는 소설가나 극작가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상이 어찌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조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조조는 자신의 장래를 냉철하게 생각한 사람으로 20∼30세 전후로 겪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오직 힘만이 정의다'라는 논리를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조조는 야망이 컸으므로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조조는 동탁의 시대가 곧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장래에 기약했다. 이런 결심을 굳힌 그는 수배령이 내려져 도망친 이상 남들이 아무리 잔학무도하다고 비난을 하건 말건 하찮은 일로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조에게는 세상을 호령하는 힘을 키울 시간이 필요했고 자신이 그 힘을 가질 때까지는 어떤 일에도 얽매일 수 없었다. 더구나 베느냐 당하느냐 하는 절박한 순간에 - 설혹 오해일지라도 - 상대가 누구이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그냥 두었을까?

3. 오로지 능력 있는 인재를 구하라



고향에 도착한 조조는 의병모집의 기치를 내걸고 5,000명의 의병을 모아 타도 동탁의 깃발을 올린 후 사방에다 격문을 띄웠다. 이에 자극받은 함곡간 동쪽의 여러 군벌들은 이듬해 초평 원년(190) 동탁 토벌의 명분으로 의병을 일으킨 후 산조에 모여 원소를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로 추대하게 된다. 그때 동탁은 황제를 데리고 낙양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기반은 아무래도 낙양이 아니라 장안 쪽인 듯했고, 그곳이라면 천하의 누구와도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탁이 떠났다는 소식에 반동탁 연합군은 연회를 베풀고 기뻐하나 누구 하나 추격하려 하지 않았다. 조조는 눈치만 보는 군벌들 앞에서 동탁 추격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홀로 동탁군을 추격했다. 조조에게는 따로 속셈이 있었다. 현재 천하제일의 막강한 군세를 가진 동탁과 과감히 맞서 싸운 맹장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조조군은 동탁군에게 패했고, 이후 조조는 동군(東郡)에 들어가 태수 지위에 오르고 병력을 훈련시키며 소군벌로 힘을 착실히 키웠다. 원소도 조조의 이런 변화를 알고 있었으나 조조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여겨 동군태수에 만족하고 머물러 있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안에서 대사건이 발생했다. 동탁이 양아들 여포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조조가 동탁의 죽음을 듣게 된 것은 동탁의 부하 이각과 곽사가 장안성으로 쳐들어가 여포를 격파하고 조정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그 해 겨울 조조는 제북 땅의 황건 잔당을 토벌하고 항복을 받았는데 이때 수용한 군사가 30여 만, 민중이 100여 만을 헤아렸다. 이들은 청주군이라 불렸는데 이후 조조의 군사적 힘은 이들 청주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조조 진영은 점차 대군벌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원소에게서 귀순한 순욱을 비롯하여 정욱, 모개 등 책사와 하후돈, 조홍 등의 무장들, 여기에 30만이란 대병력을 갖췄으니 범에게 날개가 생긴 기세였다. 조조는 모개의 진언에 따라 백성들에게 농토를 주어 버려진 땅을 경작하게 하고 원소와 손을 잡고 한편으로는 원술 등을 상대하여 싸움을 계속했다.

수많은 전투와 치세를 행하면서 조조는 승리의 요건은 군량의 자급자족이란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조조는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는데, 우선 버려진 땅을 공전(公田)이라 하여 농민이나 군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경작하게 했다. 백성들이 경작하는 것을 민둔(民屯)이라 하였는데, 소가 없는 사람에게는 관청에서 소를 빌려주고 수확량의 6할을 바치게 했다. 이 제도는 대성공을 거두어, 그 해에 조조 진영은 곡식을 쌓아둘 창고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 무렵 황제 헌제는 장안을 도망치다시피 벗어나 낙양에 이르렀으나, 낙양은 폐허가 된 황량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먹을 것이 전혀 없었다. 조정대신들은 야생의 곡식을 찾아다녔고 황제의 거처를 임시변통으로 지었는데 움막이나 다름없었다. 그 해 8월, 조조는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와 헌제 앞에 나아갔다. 헌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느낌이었다. 9월, 조조는 황제를 움직여 허(許)로 도읍을 옮겼다. 이제 황제를 자기 영토에 옹립해 두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조조는 자기에게 대항하는 자를 조정의 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되었다.

조조가 이렇듯 승승장구한 배경에는 유능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용인술과 무엇보다도 둔전제에 의한 식량의 자급자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능한 인재를 구하는 데 있어 조조는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유비가 조조가 내준 군사를 데리고 반기를 들었을 때, 유비를 공격하여 그의 가속을 볼모로 잡은 것은 당시의 혼란한 정세를 감안한다면 파격적인 일이었다. 볼모의 필요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우라는 무장에 대하여 조조의 개인적 호의가 없었다면 유비 가속은 모두 이때 죽었을 것이다. 여기서 뛰어난 장수라면 어떻게 하든 인정을 베풀고 호의를 보여 자기 휘하에 두고자 했던 조조의 '인재에 대한 갈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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