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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리더 조조

나채훈 지음 | 북폴리오
① 난세에는 부하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돼라

조조는 부하들에게 사랑받는 상관이 아니었다. 경외심을 갖거나 두려워하거나 아무튼 신경을 써서 조심성 있게 모셔야 될 인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비정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냉혹한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잘못하면 철저하게 책임을 지게 하고 반항하는 일은 허용하지 않으며 부드러운 말은 일체 하지 않는 엄격하고 무뚝뚝한 상사는 표면상으로는 부하들이 어렵게 여겨 멀리할지는 모르지만 그 '힘'에 대해 그들 마음속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 의외로 많다. 요컨대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상사는 부하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② 항상 자기 계발에 힘쓰라

조조는 학문을 좋아했는데 춘추전국시대 관중이나 상앙이 지은 부국강병에 관한 실용적 저서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문학적 재능도 남달랐다. 그가 사용한 고사나 옛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특히 『논어』와 『사기』 등은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그리고 수십 권에 달하는 병서를 정리하기도 하였는데 실력이 있고, 학문을 좋아하는 바탕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시품(詩品)』의 저자 종영은 조조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매우 호방하고 웅혼하고 섬세하여 마음 속 깊이 고독한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조조는 한마디로 철저한 자기 계발을 통해 시대정신을 이끌어 낸 리더십의 소유자라고 하겠다.



③ 매사에 철저하고 과감하라

조조는 삼국시대 중국 대륙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세계로 삼아 자신이 세운 위나라를 하나의 기업으로 이해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풍을 주입시켜 고루하고 편협했던 후한에 대신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성과를 올렸다. 조조를 비정하다 하지만 성공한 인물들은 대개가 결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결코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따뜻한 심성이 있게 마련이지만 사소한 인정 같은 건 미래의 커다란 구성을 위해서 날려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이런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조조의 진면목을 이해하고 살펴본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조조는 '스스로를 경영하라'고 채찍질하는 역사 속의 새로운 스승이 될 것이다.5. 시대의 풍운아 조조조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휘하 막료들의 뛰어난 지략과 장병들의 목숨을 건 분투였다. 조조는 이런 점을 헤아려 대대적인 포상을 실시하면서, "공로는 실무자에게 있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사기진작용 발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 조치들의 내용을 보면 진심의 일단을 내비친 것이라고 보겠다. "나홀로 공로를 누린다면 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 대목에 이르면 부하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배려하는 조조의 리더십이 새삼 돋보인다.조조는 어린 시절부터 최고 통치자가 되었을 때까지 성격이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감정의 기복은 비교적 심한 편이었다. 진수를 이를 두고 한마디로 기(氣, 사람을 혐오하는 감정이 격렬하다)라고 평했다. 예전의 과오를 따지지 않고 사사로운 문제나 도덕적 실수 같은 것 역시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인재를 등용하는 조조였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위하여 공을 세운 자와 깊이 신뢰하는 것 같았던 자에게도 완전히 마음을 준 일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위험한 기미를 느끼게 하는 자는 주저하지 않고 제거해버리는 비정한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조조는 변설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특히 말로 한몫 하려는 자들을 미워하였다. 또한 자신에게 불쾌감을 준 자에게는 가차없이 벌을 가하는 소심증적 증세도 보였다. 조조는 자신의 내심을 간파 당하게 되면 격렬한 치욕감을 느꼈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조조는 꾀도 많았으나 부하의 목숨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는 비난도 있다. 우선 군량 부족으로 생긴 이야기다. 군량이 부족하여 배급량이 줄어들자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조조가 군량 책임자를 불러 물었다. "어찌할 것인가? 좋은 대책이라도 있는가?" 군량 책임자가 머뭇거리다가 "되를 작게 만들어서 쌀을 주면 정량(正量)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요?"라고 임기응변으로 대답하였다. "그 방법이 좋겠군." 조조는 허락하였다. 그런데 군사들 사이에 조조가 부하들을 속이고 양식을 조금씩 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조는 군량 책임자를 불렀다. "자네가 죽어야만 병사들의 불만을 진정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방법이 없다. 후히 장사지내 주마."하고는 그를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목을 진중에 걸어 놓고 방문을 붙였다. "이 자는 되를 작게 만들어 병사들의 식량을 도적질한 자다. 따라서 군율에 의하여 참하였노라." 이렇게 해서 병사들의 원성은 가라앉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일화를 보자.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개울물도 말랐고 군사들의 수통에도 물이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 군사들은 목이 말라 어쩔 줄 몰랐다. 그때 조조가 채찍을 들어 전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잠시만 참아라. 예전에 내가 이곳을 지날 때 보았는데 저 산등성이에 매실 숲이 있다. 그 매실은 굉장히 시어 갈증을 풀어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군사들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신 매실 생각에 침이 저절로 고였고 갈증을 풀게 된 것이다. 군사들은 매실만 생각하며 나아가 마침내 물 있는 곳에 당도하게 되었다.



이 일화들은 조조의 속임수를 강조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즉 "조조는 이처럼 간특하고 임기응변의 술책이 많은 자로 매사가 이와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조조라는 인물에 대하여 조금은 관대하게 보아줄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나쁘게만 생각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나쁘게 보이기 마련이다. 난세에 입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영웅으로 처신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조조의 행위가 잔혹하고 교활하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지만 지도자로 갖춰야 할 권모와 행해야 할 술수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무작정 조조의 행위를 비난한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된다. 더군다나 매실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기록물에서는 '순발력 있는 임기응변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즉 상황을 타개하는 발군의 지혜라는 평가다. 천하를 움켜쥐려고 싸우는 살얼음판 같은 처지에서 잔혹한 결단력, 법에 대한 엄정한 태도, 일군의 장으로서 갖추어야 할 통솔력, 그리고 그 이면에 보이는 변화무쌍한 임기응변의 재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교묘한 제스처는 그 어느 것을 보더라도 조조라는 인물의 풍부한 개성과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새삼 느낄 수 있다.탁류(濁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후한시대라고들 한다. 탁류라고 하면 청류(淸流)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중국사에 있어서 환관 가문을 일컫는데, 후한의 명문거족 사대부 출신들이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스스로를 청(淸)이라 부르며 다른 실권자 그룹인 환관들을 탁(濁)이라 비웃은 데서 비롯되었다. 확실히 전한(前漢, BC 205∼AD 5)은 외척에 의하여, 후한(後漢)은 환관들의 부패와 권력욕으로 멸망했다. 조조는 이 탁류 가문에서 나왔다. 물론 후한시대의 환관들이 부패했고 나라를 망치게 된 사실과 조조의 등장 사이에 직접적 관계는 없다. 그러나 풍부한 개성과 변화무쌍한 처세술로 난세를 헤쳐나간 그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환관정치와 그들이 빚어놓은 병폐가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사에 있어 환관들이 정치에 일정한 역할을 하는 시기는 춘추시대였지만 한나라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세력으로 변했다. 그 원인은 황태후의 섭정에 있었다. 황제가 죽고 후계자가 나이가 어릴 때 황태후가 직접 정치를 관장하는 섭정이 일어나면, 황태후가 내리는 모든 정령(政令)은 환관의 손을 통하여 조정대신들에게 전달되었다. 명령의 전달자로 시작된 환관의 정치 참여는 차츰 조정대신과 최고 통치자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막(幕)을 형성하고 황실의 측근으로서 세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세력을 얻자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아무튼 남성의 기능을 희생하면서까지 출세의 기회를 노렸을 만큼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비장함으로 집요하게 권력에 매달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환관들이 득세하던 시대에 환관 조등(曹騰)이 등장한다. 조등은 제6대 황제 안제와 황후 이비(李妃) 사이에 태어난 유보(劉保)의 황태자 시절 시종이었다. 그는 착실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동태후의 눈에 들어 황태자의 글동무로 출사하게 된다. 조등, 자는 계흥(季興), 패국(沛國)의 안휘현 출신으로 이 사람이 조조의 할아버지다. 후에 순제가 된 유보는 조등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조등 또한 다른 실력자 환관들이 하는 방법과 다름없이 양자를 들였는데, 그가 바로 조조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으로 이름이 숭(嵩), 자는 거고(巨高)라고 하였다. 조조에 관한 기록은 어떤 기록을 봐도 조숭의 태생임은 분명하다. 단지 여러 자료를 종합해볼 때 조숭은 하후씨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조조의 부장(副將)이 되어 무공을 세운 하후돈은 조숭의 조카로 조조에게는 사촌형제가 되는 셈이다. 하후씨는 원래 조씨와 같이 패국 출신으로 한나라 고조의 공신(功臣) 여음후(汝陰候)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숭의 출신이 불분명한 걸 보면 그가 양자로 들어갈 무렵 하후씨 집안이 상당히 몰락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왜냐하면 당시 환관들의 양자는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하층 계급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정에 막강한 세력을 잡고 있는 환관의 양자가 된 조숭이 영제(靈帝) 때 이미 사례교위, 대사농 등의 요직을 거쳐 1억 전의 금품으로 삼공의 하나인 태위(太尉)의 지위를 얻었을 때, 조조는 제남(濟南 : 산동성)의 장관으로 있었다. 이때 조조는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는데 이는 아비의 매관매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숭은 반년쯤 후에 태위에서 물러났다. 조조는 고향으로 돌아와 독서와 사냥을 즐겼는데 이 무렵 한나라 조정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듯 싶다. 한 마디로 실망이었고, 장차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조는 환관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환관 정치의 병폐를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았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의 최고 통치자를 천자(天子)라 하고 이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서 땅 위에 사는 백성의 삶을 돌보고 이끄는 덕망 있는 자다. 그래서 자연에 이변이 발생하면 천자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여겼는데 이는 중국의 정사(正史)가 갖는 입장이었다. 정사를 다룬 여러 역사적 기록에 지진이나 홍수, 가뭄과 메뚜기 떼의 내습 등의 천재가 상당히 면밀하게 적혀있는데, 후한 중엽 이후에 마치 조정의 부패와 정치적 혼란을 보여주듯 온갖 재해와 질병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환제 때는 극심한 재해와 백성들의 참상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부역의 면제와 곡식의 배급 등 조치를 내렸지만 탐관오리들은 착취할 대상이 줄어들자 예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가렴주구에 몰두했다. 돈으로 벼슬을 샀으니 본전을 뽑아야 했던 것이다. 이에 헐벗고 굶주리다가 허무하게 죽어가던 백성들이 농토를 버리고 무리를 지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후한 말기에 와서는 유랑민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토착 농민의 대량 유목민화는 농업을 국가경제의 근본으로 삼고 있던 당시로서는 국가 경제의 파탄은 물론 국가의 통치체제가 붕괴해가는 조짐이었다. 이들은 경제력이 있는 지방의 호족들과 새로운 주종관계를 맺고 노예가 되거나 무리를 지어 적(賊)이 되었다.



이런 봉기의 총괄적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황건의 난은 비틀거리는 조정과 유랑민이 되어 떠도는 백성들, 혼란을 틈타 자기 세력 확보에 고심하는 지방의 호족들 모두가 공범이었다. 영제 중평(中平) 원년(184), 먹구름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듯 황건의 난이 발생했다. 이 폭동은 그때까지의 국지적이었던 농민 봉기와 달리 분명하게 한나라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내건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황건의 난은 준비가 미흡한 탓에 관군에게 저지당하여 수령인 장각 형제가 죽자 기세가 크게 꺾였지만, 이후 소멸되지 않은 채 10여 년 동안 쇠퇴해가는 후한의 명맥을 결정적으로 끊어 놓았다. 이 황건 토벌전에서 은둔해 있던 조조가 기병대장이 되어 큰 공을 세우는데, 이 때의 공적으로 조조는 제남의 지방장관이 되지만 아비 조숭이 매관매직으로 태위가 되자 사퇴하고 낙향했던 것이었다.조조의 면면을 살피기에 앞서 조조를 다룬 자료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조의 발자취를 다룬 많은 서적들의 견해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진수(陳壽)가 쓴 역사서 『삼국지』를 들 수 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정통론으로 한(漢), 위(魏), 진(晋)을 꼽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영토가 넓고 백성도 많은 중원 땅을 지배하고 진나라로 이어진 조조의 위나라가 한나라의 뒤를 이은 정통왕조라는 주장이다. 또한 남송시대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도 정통론을 위나라로 인정하고 조조를 높게 평가한다.



그렇다면 조조에 대한 오늘날의 인식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명나라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를 빼놓을 수 없다. 나관중이 쓴 이 소설에 보면 조조의 됨됨이를 지독히 깔아뭉개고 약자였던 유비를 덕인이자 선인으로 칭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삼국시대 이후 원나라 말기까지 일반 민중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삼국시대 인물들에 대한 감정을 절묘하게 이용하여 역사적 사실과 상관없이 독자들에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을 비롯해 특성이나 능력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조조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관중이 쓴 이 소설은 다른 어떤 역사서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를 유발하여 수많은 독자에게 읽혀졌고, 이것이 오랜 세월 거듭되고 더욱 널리 애독되면서 사실과 창작 부분을 구별하는 데 별다른 의미가 없게 되고 오히려 삼국지라고 하면 진수의 정사 역사책이 아니라 나관중의 소설을 말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관중은 소설에서 덕망 있는 선인 유비의 촉을 정통왕조라고 하고, 조조를 신하의 신분으로 제위를 찬탈한 악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유비와 제갈량, 관우를 악인 조조에게 징벌을 가하는 초인적인 덕성과 지혜와 무용(武勇)을 가진 영웅으로 묘사했다. 유비의 집단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조조와 그 일파들은 무능하고 교활하며 악랄한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대철학자 노신(魯迅)은 이렇게 말하였다. "조조라고 하면 모두들 나관중이 쓴 소설 속에 나타나는 뱃속이 검은 악인으로 여기는데 이는 조조라는 역사적 인물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못됩니다. … 사실 조조는 매우 재능이 풍부한 인물이며 적어도 영웅이란 대접을 해도 부족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나는 조조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그에 대하여 마음 깊이 경복하고 있습니다."



영제 때 태위 벼슬을 지낸 교현(橋玄)은 사람보는 눈이 정확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조조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그를 찾아간 적이 있다. 교현은 조조를 보고 말했다. "지금까지 나는 천하의 명사와 인재를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너만한 인물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부디 신중하게 행동하여라. 난세에 백성을 구할 사람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당대에 이미 높은 학식과 덕망을 인정받고 삼공의 벼슬까지 지낸 인물인 교현에게 나이도 어리고 벼슬도 낮은 조조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교현에게 자신의 장래를 물어본 이 일화는 조조의 됨됨이를 살펴볼 수 있는 한 사례이다.



조조가 무장(武將)으로 등장하는 계기는 황건의 난이었다. 조조는 기병대를 이끌고 황건의 배후를 쳐 상당한 공을 세웠고, 조정에서는 논공행상으로 그를 제남의 상(相 : 실질적인 지방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당시 제남 일대의 관리들은 환관들을 등에 업고 뇌물을 바치면서 관직을 유지하고 백성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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