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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의 법칙 1

리차드 S. 테들로우 지음 | 청년정신
1835년 11월, 앤드류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서 포스강 건너편으로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던펌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 카네기는 다마스크 천을 다루는 직조기술자로서 섬세한 손길을 요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오르간 연주자와 같은 민첩함과 유연성, 진정한 예술가적 통찰력이 담긴 미학적 섬세함을 요구하는 장인의 일이었다. 그가 만들어 낸 물건들에 홀딱 반한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밟아 나가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물론 훗날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윌 카네기는 엄청난 변화의 시대에 낙오한 실패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그 당시에 막 증기식 직조공장이 세워지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얼마 안 있어 직조 수공업은 증기기계에 밀려 사향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윌은 변함 없이 옛 방식만을 고집했다. 결국 이 세계에서 설 자리를 잃은 윌은 얼마의 돈을 빌린 뒤 1848년 미국으로 서글픈 이주를 하게 되었다. 슬랩타운(시궁창마을). 이름만으로도 어떤 곳일지 상상이 가는 곳으로 1848년 여름에 카네기 일가는 정착하였다.



이런 불행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도착한 어린 카네기의 의욕은 오히려 드높았다. 젊은 앤드류 카네기에게 미국은 끊임없는 개척의 땅이었다. 앤드류는 하루 12시간 일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피츠버그 시내로 들어가 회계사에게 복식부기를 배웠다. 그러던 그에게 우연히 오레일리 전신회사와 면접할 기회가 찾아왔다. 마침 그 회사는 전보배달원을 한 명 새로 채용할 계획이었고, 앤드류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그 자리에서 채용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수많은 전보배달원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그다지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일 자체가 본질적으로 지루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해서 청소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도시 전체를 발로 뛰어 다니면서 전보나 전하는 일이 즐거울 리 없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가망 없는 직업이 또 있겠는가?



하지만 카네기에게 이 일은 또 다른 장벽이자 개선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새 직장에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전보를 전하면서 돈 한 푼 안 들이고 피츠버그의 실력자가 누군지, 중요한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피츠버그 사업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바로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전보를 완전히 익혀서 누구보다도 빨리 전보를 칠 수 있게 되었다.1. 앤드류 카네기 - 무일푼에서 세계 최고의 갑부로

앤드류 카네기, 미지의 영역진실의 순간이스트먼은 건판이 사진 산업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목표는 시판 중인 다른 것보다 성능이 우수한 건판 제조법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은행에서 퇴근한 오후 세 시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실험을 하곤 했다. 그가 잠을 충분히 잤을 턱이 없다. 그의 작업 습관은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 비슷했던 것 같다.



사진 촬영용으로 유리판에 감광유제를 입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스트먼은 새로운 감광유제를 유리판에 입히는 코팅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1878년 여름에 이 장치가 완성되었다. 이스트먼은 곧 영국으로 건너가 감광유제와 코팅 기계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였다. 당시는 영국이 사진 산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미국에서도 특허를 신청하라고 권하였으며, 이스트먼은 그 충고를 따랐다.



이스트먼은 감광유제 제조와 기계 생산 두 분야를 끊임없이 개선해야 할 활동 무대로 삼았다. 그리고 1880년 4월, 이스트먼은 로체스터의 스테이트 거리에서 자신의 특허 기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특허 감광유제를 코팅한 사진 건판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로체스터의 유명한 사업가인 헨리 알바 스토롱을 찾아가 과감하게 투자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스트롱은 선뜻 이스트먼에게 투자해 주었다. 스트롱은 이스트먼의 사업가적 재질을 발견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스트롱은 1880년 12월 이스트먼에게 1,000달러를 투자했다. 훗날 스토롱은 신생 이스트먼 건판 회사의 사장이 되었고 이스트먼은 회계 담당자가 되었다. 스트롱은 추가로 1881년 1월에 1,000달러, 3월에 1,873달러 등 1881년 8월까지 5,000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하지만 스트롱이 이스트먼에게 투자한 것은 사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 신종 산업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1888년 5월까지 사진 한 장 찍어 본 적이 없었다.토마스 스캇은 카네기의 사업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카네기를 1850년 당시 미국의 가장 선도적인 기업인 펜실베니아 철도회사로 스카우트한 것도 스캇이었다. 또한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에 근무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카네기를 끌어 올려 회사 경영진을 만나게 하고 그들의 사교모임에까지 불러들였던 것도, 그리고 이 불쌍한 이민자 소년에게 돈 버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 준 것도 바로 스캇이었다.



스캇은 1846년 4월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에 들어가서 1850년에 던컨스빌의 역장이 되었고, 1852년에는 펜실베니아 철도회사 서부지구 제3부 책임자가 되면서 피츠버그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철로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생생한 정보, 즉 전보가 필요했다. 스캇도 본사에서 연락이 올 때에는 으레 허둥대며 오레일리 전신회사로 달려가곤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네기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점차 철로의 운행이 많아지자, 스캇은 전신사무소를 직접 운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사장인 에드가 톰슨으로부터 전신사무소 설립 허가를 얻어냈다. 사무소 지배인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카네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1853년 2월, 앤드류 카네기는 드디어 토마스 스캇의 부하 직원이자 전신 사무소 책임자로서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했다. 이제 그의 봉급은 월 35달러로, 오레일리 사에 있을 당시의 봉급 월 25달러에 비해 40%나 인상된 금액이었다.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산업지역의 통신과 교통의 심장부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네기는 입사 후 자신에 대한 스캇의 신뢰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보답하게 된다. 동부지구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전 노선의 열차 운행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카네기는 자서전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내가 사무실에 도착하여 이 사실을 발견했을 때, 스캇 씨는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나는 모든 책임을 지고 '열차운행지시'를 내리면서 사태를 수습하였다. 이런 나의 노력에 의해 별다른 사고 없이 모든 것이 정상화 될 수 있었다."



당시 카네기의 상황은 너무나 위태로웠다. 만일 실수라도 한다면 파면당할 수도 있고, 어쩌면 형사처벌까지 감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스캇이 서둘러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이미 상황은 말끔히 종료되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스캇이 카네기를 더욱 든든하게 생각하게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스캇은 그 일에 대한 보답으로 카네기에게 한 가지 투자 제안을 하였다. 카네기가 투자해야 할 금액은 무려 500달러였다. 카네기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가진 돈은 기껏해야 5달러 정도였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거물들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카네기는 당장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하지만 1856년 당시 500달러는 상당히 큰 액수였기에 어머니가 동네 한 바퀴 돌아서 모을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결국 톰 스캇이 애덤스 특송회사 주식 10주에 대해 카네기가 내야 할 돈을 대신 내주었다. 투자는 성공적이었지만, 이 성공의 의미는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카네기가 이 투자를 통해 돈이 돈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1856년 가을, 스캇은 펜실베니아 철도회사 총책임자가 되었으며 알투나로 자리를 옮겼다. 당연히 심복 앤드류도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3년 뒤 스캇은 펜실베니아 철도회사 부사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자 스캇은 카네기를 펜실베니아 철도회사 서부지구 책임자로 승진시켰다. 이제 카네기는 미국 운송기간시설의 핵심요직인 노선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연봉은 1,500달러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제 카네기에게는 연봉이 얼마인지는 별 의미가 없었다. 스캇과 애덤스 특송회사 덕분에 돈 벌기가 얼마나 쉬운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1858년에 카네기는 불확실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드러프 침대차 회사에 투자하여 지분의 1/8을 소유하였다. 이것이 카네기가 이룩한 부의 시작이었다.



남북전쟁은 카네기에게 유익한 시기였다. 전쟁 중에 우드러프 침대차 회사가 급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1863년말에 그는 이미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봉급이 필요 없었다. 더 이상 펜실베니아 철도회사도, 톰 스캇도 필요 없었다. 서른 살도 채 안 된 나이에 그는 사업세계에서 혼자 힘으로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카네기는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고도 만족하지 못했다. 카네기는 자기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인간에겐 숭고한 우상이 있어야 한다. 부의 축적은 가장 저급한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 나는 신중한 태도로 내게 가장 숭고한 인생을 선택할 것이다." 카네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부의 축적이 아니라 자신의 급진적인 스코틀랜드 전통과 신세계의 현실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이스트먼 건판 회사는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사진 건판 생산회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습식 콜로디온에서 건판으로의 변화는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핵심은 사진가가 건판 사진 재료를 직접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현장에서 바로 현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건판 사진에서는 감광판을 노출 전이나 후에 모두 보관할 수 있었다. 이는 감광판의 생산을 집중화할 수 있고 규모의 경제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1887년 이스트먼은 대량 시장을 목표로 하는 단순한 카메라 개발에 착수했고, 그해 12월 가슴에 매다는 소형 롤 홀더 카메라가 탄생하였다. 이스트먼은 이 카메라를 코닥(Kodak)이라고 불렀다. 가격은 25달러였다. 하지만 이스트먼은 카메라만이 아니라 서비스도 판매했다. 코닥 카메라는 출하될 때 100장 분량의 비노출 필름 롤을 장전하고 있었다. 이제 사진가가 해야 할 일은, 키를 돌리고 셔터를 누르기 위해 끈을 잡아당긴 다음, 버튼을 눌러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였다. 100장이 모두 노출된 후 카메라를 로체스터로 돌려보내면, 이스트먼 코닥 회사는 필름을 빼내어 사진을 현상한 다음 새 필름을 넣은 카메라를 사진과 함께 고객에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 서비스 비용은 10달러였다. 바로 이것이 사진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요." 이 광고문안은 소비자에게 이 제품이 가진 혁신적 특성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제품 이름인 코닥(Kodak)과 이 광고 문안은 곧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브랜드 명칭은 오늘날까지도 존재하고 있으며, 이 광고 문안은 이제껏 만들어진 가장 훌륭한 슬로건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1888년 이스트먼은 새로운 코닥 카메라와 신형 셀룰로이드 필름을 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스트먼 코닥 사의 운명은 명백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큰 사진용품 제조업체가 되거나, 아니면 망하는 것이다." 이제 회사는 크고 위험하고 대담한 목표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목표는 성공을 불러들였다. 이스트먼 코닥 사의 판매 실적은 1889년에 약 51만 달러에서 1895년에는 거의 90만 달러에 육박할 만큼 성장했으며, 1909년에는 970만 달러의 판매 실적을 거두어 미국 전체 사진 판매의 43%를 차지했다.



이스트먼은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처음부터 본능적으로 브랜드의 중요성을 감지했다. 코닥 브라우니가 새로 출시되자, 50년 후 즉석 사진기가 나오기 전까지 코닥 브라우니에 필적할 상대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브랜드 파워였다. 불과 25년 전까지만 해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만지던 카메라를 이제는 대중 모두가 만지게 된 것이다. 대중들 스스로 이 손쉬운 혜택을 선택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백만 개의 브랜드 중에서 하나 나올까 말까한 놀라운 마술이 벌어졌다. 미국인들 모두가 코닥 브라우니를 하나씩 갖게 된 것이다.헨리 포드는 자신의 왕국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규칙을 만들었고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게 했다. 포드의 성격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에 대한 좋은 예는 다음과 같다. 1차 세계대전이 임박해오자 그는 자신을 평화주의를 주창했다. 포드는 군수품 주문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자기 공장을 불태워 버리겠다고까지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자신의 태도를 180도 바꾸어 전쟁 찬성논자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화주의자이긴 하지만, 군국주의는 오직 군국주의에 의해서만 섬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왜 포드가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까?" 정신의학이나 그와 관련된 원칙들은 만족스러운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포드는 진정 평화주의자였을까? 앤 자르딤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에게 평화주의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그의 호전성은 처음에는 전쟁과 전쟁 주도자들에게 반발하는 형태로 나타났다가 이내 전쟁에 참가하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평화주의 신념을 표현했을 때, 그것은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공격성을 배출할 통로였다.



헨리 포드는 미혹에 빠진 인간이 아집에 사로잡혔을 때 어떠한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그는 한 가지 생각에 몰입하면, 산이라도 움직일 만한 외곬수적인 집념과 신념으로 그것을 추구했다. 저가격 자동차 시장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실패를 맛봐야 했을 때 홀로 성공했던 이가 바로 포드였으며, 하일랜드 파크라는 기념비적인 공장 단지를 조성한 것도 포드였다. 하지만 그는 생명이 없는 기계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뛰어난 기술자였던 반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너무나 몰랐다.



재산이 늘어나고 온 세상에 명성을 떨치게 되자 그는 모든 판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누구도 권력에 의한 마비 현상을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에게 진실을 말해 주려고 시도한 사람은 해고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1923년 무렵, 한때 포드 회사의 사회학 부서(오늘날 인사부서)의 책임자였던 새뮤얼 마르키스는 "포드가 있는 곳에서는 아무도 마음 편히 있지를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기분이 어떤 상태인지,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포드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헨리 포드는 1863년 7월 30일에 출생했으며, 1832년에 포드의 가족이 처음 디어본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미개척지였다. 어린 헨리 포드는 주변 환경이 쾌적한 디어본의 농장 근처를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포드의 어린 시절은 탐구와 발견, 그리고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포드는 집안이 태엽 빠진 시계처럼 변했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사망할 당시 포드는 13세가 채 안 된 상태였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증기 엔진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보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마술과 같은 순간이었다. 그는 그 이후로 평생 이 장면을 잊지 못했다. 어머니가 죽자마자 새로이 사랑의 대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1879년에 포드는 디트로이트에서 출세의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났다. 포드는 간신히 글을 깨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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