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를 지배한 혁명가
아사쿠라 레이지 지음 | 황금부엉이
7. 소니 아메리카와의 주도권 다툼"우리가 플레이스테이션에서 이루려고 했던 것은 경쟁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경쟁하겠다는 것이었다." 사토 아키라 SCEI 부사장의 말이다.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이 게임시장에 뒤늦게 출현하는 게임기이므로 다른 회사들과는 다른 새로운 유통혁명을 이루겠다고 했다.
다행히 유통업자, 소프트웨어 메이커들 그리고 최종소비자까지도 소니의 방식을 따라왔다. 일단 플레이스테이션의 승리의 원동력은 기술적인 우월성이었다. 또 훌륭한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서드 파티 공급자들을 확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그런 엄청난 성공을 일궈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니는 게임 시장에서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과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비디오 게임 플랫폼이 성공하려면 많은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것에 관한 소니의 전략은 게임 소프트웨어 공급을 철저하게 서드 파티(third party)에 맡긴다는 것이다. 즉, 소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경쟁업체인 세가는 아케이드 게임을 만드는 잘 정비된 소프트웨어 개발 부서를 가지고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의 운명은 얼마나 유능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소니 진영으로 끌어올 수 있는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드 파티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결코 성공할 것 같지 않은 개발에는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포맷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있는지 끊임없이 시장을 주시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이들을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느냐가 최후의 관건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의 마케팅 전략 수립을 책임지고 있는 사토 아키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현실을 보면 우리가 닌텐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유능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프로젝트 참여 제안에 이렇게 대답했다. 3D 컴퓨터 그래픽은 앞으로 10년 안에는 이뤄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프로그래밍 언어 C로 게임 소프트웨어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현실 감각이 결여된 것입니다. 게임 산업은 거칠고 기복이 심해서 아마추어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마스크 ROM의 사용은 소매상, 사용자, 게임 제조업체에 중대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소매상이나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입장에서 마스크 ROM의 치명적 약점은 정확한 판매 전망을 세우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제품이 잘 팔리면 없어서 못 팔고, 제품이 안 나가면 엄청난 재고를 떠안아야 한다. 사용자의 입장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마스크 ROM의 높은 제작비용 때문에 소프트웨어 단가가 비싸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매체로서 마스크 ROM 대신 CD-ROM에 게임 소프트웨어를 담는 것이다. 구타라기의 머리에 CD-ROM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구타라기는 CD-ROM을 앞세워 유통 시스템을 확 뜯어고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사실 CD-ROM은 1990년부터 게임기에 사용되고 있었다. 세가의 메가드라이브와 NEC의 PC 엔진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회사도 유통 체계를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CD-ROM을 매체로서 채택하지는 않았다. CD-ROM은 오직 제한된 시장에서만 팔리고 있었으며, 그것도 마스크 ROM 제품의 유통 채널을 통해 공급되고 있었다.
소니는 유통개혁을 위해 우선 CD-ROM의 매력적인 가격을 부각시켰다. 일반적으로 히트 게임은 구하기가 어렵고 그나마 일반인이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은 중고 소프트웨어 판매상을 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니의 어떤 히트 게임이라도 경쟁사 히트 게임의 중고 가격보다 싸게 공급하며, 어디에서도 또 언제라도 구입할 수 있도록 한다면 승부는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오기 전에 마스크 ROM 소프트웨어는 계속 가격이 상승하였다. 슈퍼 패미컴의 24개 타이틀의 가격은 백 달러가 넘었다. 이것은 전년도에 비해 두 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마스크 ROM 환경에선 개발자들이 중고시장에서도 소매가격으로 팔아 재미를 보았다. 그러다 보니 신품의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소프트웨어를 CD-ROM 방식으로 하여 가격을 58달러에 맞추어 출시하였다.1995년 5월,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리는 전자오락 엑스포가 SCEI의 폭탄 발언으로 소동이 일어났다. 플레이스테이션의 미국 버전을 세가 새턴보다 무려 1백 달러가 싼 299달러에 판매를 할 것이며, 새롭게 개조할 일본 모델도 1백 달러를 내려 299달러에 출시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소동이 일어난 곳은 엑스포 전시장만이 아니었다. 소니 본사에서도 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1995년 3월 이전까지 플레이스테이션은 잘 나가고 있었고 항상 공급 부족에 의한 품귀 사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3월이 지나면서 플레이스테이션의 판매가 갑자기 부진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SCEI는 게임 '철권'을 출시했지만, 판매는 살아나지 않았다. 문제는 소프트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에 있었던 것이다.
남코가 개발하여 닌텐도를 통하여 판매되는 게임 '철권'은 소비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아무리 소니의 게임 '철권'이 훌륭하다고 하여도 이 게임을 하기 위해 추가로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를 구입하기 위해 399달러를 지불하고자 하는 소비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플레이스테이션의 소프트웨어 판매를 위해서는 하드웨어인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을 인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니의 국내 판매 본부가 제동을 걸었다. 출시 후 6개월도 안 돼 가격을 내리는 것은 오디오비주얼 산업의 비즈니스 관행을 깔아뭉개는 전례 없는 조치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몇몇 대형 소매상들도 반발했다. "가격을 1백 달러 내리면 앞으로 우리는 소니 제품을 팔지 않겠다." 이런 반응은 그동안 플레이스테이션의 소매상 마진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소니 본사와의 관계를 더욱더 악화시킨 이유는 사전에 그 조치에 대해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구타라기는 이러한 업무에는 사실상 경험이 없었다. 그는 하루빨리 장애물을 치우고 플레이스테이션을 성장가도로 복귀시키는 것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소니 본사에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SCEI의 핵심 멤버는 미우라 반도의 마호로바 리조트 호텔에서 1박 2일의 회의를 가졌다. 브레인스토밍은 오후 7시에 시작이 되었다. 유통 정책과 마케팅 방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결정되지 않은 유일한 이슈는 하드웨어 가격이었다. 젊은 참석자들은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으나, SCEI의 경영진이 참석하지 않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경영진들은 밤 10시가 되서야 도착했다. 토론은 끝나고 파티가 시작되었는데, 한 젊은 여성 참석자가 임원들에게 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299달러입니다!"
구타라기의 이론은 메모리 가격은 시간이 가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망은 빗나갔다. 가격은 오히려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정가를 399달러로 정한 것도 메모리 가격이 단시일 내 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희망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1995년 말까지도 메모리는 높은 가격대를 유지했다. 이 기간동안 마쓰시타, 산요, NEC, 세가 그리고 히타치 등이 새로운 게임기를 가지고 게임기 시장으로 진입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SCEI는 살아남았다. 플레이스테이션은 과연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
결정적인 차이는 이들 경쟁업체들이 자신들이 가전제품에서 사용하던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게임 사업에 들어온 반면, SCEI는 게임 사업의 방법론을 충실히 따랐다는 점이다. 경쟁업체들은 비용을 토대로 가격을 산정하고 하드웨어 판매에서 이익을 내기를 원했다. 반면 SCEI는 하드웨어는 무료로 주고 소프트웨어 판매에서 이익을 내는 구조를 택했다. 가격 인하의 효과는 성공적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299달러로 시장에 내놓자마자 소니의 게임 소프트웨어가 엄청난 속도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플레에스테이션의 미국 시장 개척사는 SCEI와 소니 아메리카 간에 주도권을 놓고 벌인 치열한 다툼의 역사이다. 처음부터 둘 사이는 잘 맞물려 돌아가지 못했다. 문제가 작을 때는 조정할 수 있었으나 차츰 간격이 벌어지면서 결국 둘 사이의 의사 진행이 막혀버렸다. 미국 경영진은 일본에서 결정된 것이면 무조건 반대를 했다. 그리고는 미국 시장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소니 아메리카가 좌지우지했다. 미국 시장에 대한 권한을 일본에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회사 소니 아메리카는 산하에 거느리고 있는 SEPC라는 회사를 통해 비록 적은 양이지만 슈퍼 패미콤과 세가 제네시스용 게임도 함께 생산하고 있었으며, 이 회사가 미국 시장의 플레이스테이션 판매는 물론이고 라이선스 관리와 마케팅 책임까지 맡았다.
갈등이 비등하고 있었지만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일본의 SCEI와 소니 아메리카의 자회사 SEPC는 직제 상 소속이 달랐기 때문이다. 양쪽은 특히 소프트웨어 가격 정책에 대해 첨예하게 맞섰다. 일본은 소프트웨어 가격을 낮추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가격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미국 경영진은 모두 게임 산업의 베테랑들이다. 그래서 기존 모델과 과거의 지식 경험을 토대로 모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플레이스테이션은 기존 게임 산업을 뒤집는 혁신적인 게임기였다. 양쪽의 생각은 뿌리부터 달랐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구타라기는 오가 사장에게 끊임없이 호소하였다. "미국 시장에 대한 통제권을 일본으로 가져올 수 없다면 이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 이제 SCEI와 소니 자회사의 미국 경영진 사이의 알력은 SCEI 사업이 지장을 받는 지경까지 진전되었다. SCEI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되도록 빨리 미국 시장에 대한 통제권을 자신들의 우산 속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래야 마케팅과 라이선스 정책을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 수 있다. 결국 소니는 1997년 1월에 SCEI 아메리카를 설립하여 미국 시장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SCEI 아메리카는 처음에는 여러 문제들과 씨름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그들의 불굴의 노력은 1997년 중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시장은 처음부터 규모가 컸기 때문에 성장을 시작하자 급속도로 탄력이 붙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서 대박이 터졌다. 그리하여 1998년 3월 회계년도에 1년간 판매량이 770만 개에 달하게 되었다.1. 열정 : 구타라기 겐,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서다
시스템 G와의 만남소니에서의 첫 출발 : 반동 그룹의 리더가 되다3백만 개를 팔 수 있을까?오가 사장, 결단을 내리다 : "추진하시오!"게임기를 만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5. 게임기 만들기 : 지능 알고리즘
가장 강력한 게임기를 만든다1984년 9월, 일본 아쓰기에 있는 소니 공장의 한 구석 방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던 구타라기 겐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컴퓨터로 만든 얼굴 이미지가 간단한 조작에도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얼굴을 키우거나 작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위의 사물과 합치거나 분리하는 것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다.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한 것은 새로 개발된 시스템G라는 컴퓨터 그래픽 시스템 때문이었다. 시스템G는 실시간 3차원 텍스처 매핑(texture mapping)이 가능한 프로그램이었는데, 간단한 조작만으로 이미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구타라기는 놀라고 말았다. 현재 소니의 자회사인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의 CEO인 그는 "시스템G는 최첨단 그래픽 시스템보다도 크게 앞서 나간 것이었으며, 나는 그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시스템G는 소니 정보처리연구소가 3D 데이터 처리를 위해 방송용으로 개발한 기하학적 엔진이다. 소니 정보처리연구소는 데이터 압축에서 네트워킹, 커뮤니케이션 프로토콜까지 광범위한 디지털 기술을 다루고 있었는데 구타라기는 바로 이곳의 연구원이었다. 구타라기는 시스템G에 의해 자유롭게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다가 순간적으로 어떤 영감이 머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 시스템G을 이용하여 파워풀한 게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소니의 역대 최대 히트 상품인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게임기의 개념이 최초로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시스템G를 게임기에 결합한다면 매력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닌텐도의 게임기인 패미컴은 2차원의 단순한 이미지밖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오락성 때문에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시스템G로 패미컴을 업그레이드한다면 대단한 물건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구타라기의 열정 : "내 기술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2. "추진하시오!" 결정 과정의 진통
도쿄 역 플랫폼에서의 충격닌텐도에 그 개념을 팔아라그 당시 소니의 2인치 플로피 디스크 개발은 구타라기를 디지털의 세계로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동안 소니는 아날로그 기술을 채택한 2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자기 저장 스틸 비디오카메라인 마비카(Mavica)에 사용해왔는데 이로 인해 신호 처리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2인치 플로피 디스크 자체만 놓고 볼 때 그것을 마비카에 내장하면 수요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디지털 신호를 저장하는 일반적인 장치로 개발한다면 엄청난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구타라기는 생각했다.
당시 소니의 또 다른 부서에서는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산업표준으로 만들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때 구타라기는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와 정면으로 맞서 머리 터지는 싸움을 하기보다는, 3.5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산업표준으로 예정될 가능성이 높다면 2인치 플로피 디스크로는 디지털 데이터의 표준으로 채택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구타라기는 자청해서 그 프로젝트의 팀장을 맡아 프로젝트를 이끌고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전자업계의 표준으로 채택되었다. 이때 구타라기는 더 원대한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로 디지털 신호 처리이다. 디지털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니는 디지털 기술을 빨리 포용해야 한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설득을 시도했다. "컴퓨터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소니는 독자적인 디지털 기술을 구축하여 컴퓨터 시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구타라기가 디지털 기술에 회사의 역량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모두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말할 가치도 없다.", "그것은 소니의 금기이다." 그 당시 제1개발 부서에 있던 선배 한 사람은 구타라기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기까지 했다. "자네가 디지털 기술 개발을 원한다고 하는데, 소니에선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돼. 그러다가는 당장 전출당할 수도 있어." 당시 소니에서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이다.1991년 5월, 구타라기는 신칸센을 막 타려는 참이었다. 목적지는 교토에 있는 닌텐도 본사. 그는 CD-ROM을 사용하는 소니 슈퍼 패밀리 컴퓨터를 시카고 가전 쇼에 출품하기 위해 닌텐도와 세부 사항을 논의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플랫폼에는 소니의 홍보 담당 이사가 손에 메모지를 든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게, 구타라기 군, 닌텐도가 소니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필립스와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