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 피오리나
조지 앤더스 지음 | 해냄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집단휴렛팩커드의 기계연구실에 밤이 찾아왔다. 전기 드라이버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공학용 계산자도 깨끗이 치워진 상태였다. 건물은 이미 텅 비어 있었으나, 40대 후반의 키 큰 남자가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며 테이블 위에 반쯤 완성된 기구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매우 우악스러워 보였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햄머퀴스트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가 만든 새로운 모델의 오실로스코프가 완전히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분통을 터뜨리며 '어떤 괴한이 침입해서 망가뜨려 놓았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뒤틀린 알루미늄 판에 붙어 있는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자네는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네, -데이브 팩커드"
엔지니어들은 햄머퀴스트의 작업대로 모여들어 그 망가진 시제품을 쳐다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알루미늄 판을 만져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완벽한 제품을 출시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애초부터 부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보스의 무지막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데이브 팩커드는 자신이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해내는 강한 의지를 가진 리더였다. 그는 큰 키에 체구도 당당하여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에게서 약간의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직원들은 팩커드를 '잔인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한편 빌 휴렛은 친근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었고, 매우 의욕적인 발명가였다. 그의 호기심은 끝이 없어서, 젊은 엔지니어들과 함께 브레인스토밍 하기를 좋아했다.
휴렛과 팩커드는 스텐퍼드 대학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4학년 때, 터먼 교수 밑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면서부터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콜로라도 주 산후안 산맥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둘은 깊은 산골까지 돌아다니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이 함께 시작한 사업이 놀라울 정도로 성공하게 되는 60년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했던 것이다.
초창기의 HP에는 정년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휴렛은 1978년 초 65세의 나이로 CEO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패커드는 그 이후에도 수년 동안 회장의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두 창업자는 오래 전부터 여러 명의 후계자를 키워왔다. 그리고 컴퓨터와 계측장비 사업을 두루 경험한 존 영이 후임 CEO로 선출되었다.
존 영은 멋진 출발을 보였다. HP의 매출은 그의 재임 초기 5년 동안 세 배나 증가하여 1982년에는 43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익과 주가도 매출에 비례해 증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이 팩커드의 경영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영은 각 사업부문이 쥐고 있던 권한을 빼앗아 본사가 모든 중요한 의사결정을 주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팩커드는 중앙집권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으며 다양한 사업부문들이 연합체를 구성하고, 각자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을 선호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HP에게 어려움이 찾아들었다. 회사의 성장곡선은 꺾였고, 의사결정은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여 지연되고 있었다. HP의 주가는 1987년부터 1990년 사이에 50퍼센트 이상 곤두박질쳤다. 회사가 비틀거리는 모습을 본 팩커드와 휴렛은 위기감을 느끼고는 70대 중반의 나이로 HP의 전면에 다시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1992년 초 팩커드는 회장의 권한으로 존 영과 다른 HP 임원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이사회를 소집하고는 존 영을 쫓아내었다. 최고경영자 자리는 처음으로 공석이 되었다. 데이브 팩커드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를 방문하기 위해 아이다호 주의 보이시를 찾아가야 했다.
"NO"라고 말한 남자보이시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지역에 외벽이 알루미늄으로 처리된 1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건물 안에는 보풀이 일어난 청색 카펫이 깔려 있고, 싸구려 책상들과 다 시들어버린 화분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주위의 사무실도 대체로 휴렛팩커드 창업시절을 생각나게 해서 팩커드에게 는 남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곳에서 딕 핵본이 일하고 있었다. 딕 핵본은 개인용 컴퓨터가 일반인들의 가정과 직장을 엄청나게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HP의 연구원들에게 적정가격의 고품질 레이저 프린터를 개발하게 했다. PC 사용자들이 프린터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부 투자분석가들은 180억 달러에 달하는 HP 주식가치의 절반 가량이 핵본의 프린터 사업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핵본은 미네소타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했으며,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계측장비 R&D 팀의 일원으로 휴렛팩커드에 입사했다. 그리고는 입사 후 10년 만에 컴퓨터 사업부문의 수석 프로젝트 책임자가 되었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1977년 팩커드는 핵본에게 디스크 드라이브 사업부문을 맡기면서 보이시로 이전할 것을 권했다.
1992년 봄, 마침내 핵본에게 기회가 왔다. 팩커드가 회장과 사장, 그리고 CEO 자리까지 한꺼번에 핵본에게 제의하기 위해 보이시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고민에 빠졌지만, 결국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라 결론 내리고는 장문의 편지를 팩커드에게 보내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팩커드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편지를 받은 그는 다시 보이시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휴렛도 함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핵본은 팩커드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팩커드는 어쩔 수 없이 회사의 컴퓨터 시스템 책임자인 51세의 루 플랫에게 CEO 자리를 제안했다. 플랫은 핵본처럼 깊고 전략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플랫은 충직하고 믿을 만 했다. 플랫은 26년 동안 HP에 근무하면서 건물관리에서부터 의료장비 사업부문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의 책임자로 일했고, 무엇보다도 플랫 자신이 CEO 자리를 원했다.
1998년 초에 실리콘밸리에 골드러시 분위기가 완전히 무르익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나 인텔처럼 이미 기반을 잡은 첨단기술 회사들도 기업들의 인터넷 전략에 필수적인 수단을 제공하는 회사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렛팩커드만은 예외였다. HP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그동안 월드와이드웹의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HP의 컴퓨터 사업전략도 인터넷의 영향에 대해 충분히 감안하지 못한 데다 회사 자체의 웹 사이트도 빈약했다.
1998년 내내 경쟁사들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지만, 휴렛팩커드만은 수렁에 빠진 듯 어려운 상황에 몰려 있었다. 그 해 HP의 매출은 겨우 9% 상승하는 데 그쳐 역대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컴퓨터 산업분야의 주식투자자들은 HP 주식을 포기하는 대신, 작지만 급성장하고 있는 경쟁사인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델 컴퓨터의 주식을 구입했다.
플랫은 결국 휴렛팩커드를 둘로 나누는 방안을 생각했다. 계측장비 사업부문을 따로 떼어내어 새로운 CEO가 나름대로 독자생존의 길을 모색해 나가도록 하고, 나머지 조직은 재편하여 컴퓨터와 프린터 사업에 집중하게 하면 덩치가 커서 발이 느린 하나의 회사가 아닌, 시장상황에 민감하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두 개의 회사가 되어 각자의 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999년 초 HP는 분사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후에 애질런트테크놀러지로 이름을 바꾸는, 분사될 회사의 CEO에는 네드 반홀트가 내정되었다. 플랫은 휴렛팩커드의 CEO 자리를 내놓을 의사를 비쳤으며, 새로운 CEO를 HP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기업에서 초대할 것이라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HP 인사위원회 책임자였던 샘 진이 선발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고, 3명의 위원이 추가로 임명됐다. 선발위원회의 기준에 따르면 새 CEO는 복잡한 조직의 생리를 이해하고, 새로운 기술을 예측하며, 시장에서 HP의 브랜드를 떠받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또한 HP가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직원들을 독려할 수 있어야 하며, HP의 기업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거기에다가 세상이 깜짝 놀라고 경쟁사들이 질투를 느끼게 할 만한 유명 스타이어야 한다.
"내게 기회를 주시오!"칼리 피오리나의 사업 인생은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스탠퍼드에서 중세사를 전공한 후, 매릴랜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AT&T에 관리부 수습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번째 임무는 원주민 부족들에게 장거리전화 서비스 및 전화장비를 파는 일이었다. 이후에도 힘들고 재미없는 일들이 주어졌지만 그녀는 해내겠다는 일념으로 피나는 노력을 했고 1990년대 초반, 피오리나는 AT&T의 부사장이 되었다.
피오리나가 1995년 9월에 시작한 프로젝트는 그녀의 이름을 업계에 알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바로 루슨트테크놀러지를 상장회사로 만든 것이다. 루슨트는 AT&T로부터 분사 독립한 직원 12만 명의 전화장비 업체였다. 피오리나와 샤크트, 맥긴 세 사람은 1996년 3월, 27억 달러의 투자자금을 모으기 위해 순회 설명회를 시작했다.
피오리나는 무대 위에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투자가들은 그녀가 루슨트를 상장회사로 만든 날 입었던 빨간색 원피스, 미소와 몸짓 그리고 매혹적인 미래 속으로 타인을 끌어들이는 독특한 대화방식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루슨트의 투자설명회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30억 달러라는 거금을 모았고 루슨트는 상장되자마자 주가가 치솟았다. 상장 첫 해에 92퍼센트의 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피오리나는 통신업계 외의 분야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1998년 한 잡지의 기사는 상황을 돌변시켰다. 「포춘」기자 패트리샤 셀러즈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경영인 50명을 선정하기로 했다. 그가 루슨트를 선정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주가가 연일 치솟고 있었고 '신경제'의 화신인 데다 수석부사장 중 한 명이 팻 루소라는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셀러즈는 루소와 인터뷰 전에 루슨트의 언론담당인 캐시 피츠제럴드의 추천에 의해 칼리 피오리나를 먼저 인터뷰하게 되었다. 셀러즈는 그녀의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셀러즈는 피오리나가 50명의 목록에 반드시 올라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걱정은 루슨트의 두 여성 중 누구를 더 부각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했던 「포춘」은 벨애틀랜틱의 로렌스 바비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루슨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머지 49명이 누가 될지는 몰라도, 칼리 피오리나가 표지에 나오지 않으면 벨애틀랜틱은 「포춘」의 정기구독을 취소하겠습니다. 당신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결정타였다. 1998년 10월 12일, 「포춘」은 80만 정기구독자에게 배달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경영인'은 칼리 피오리나였다. 자신만만하고 희망에 찬 그녀의 얼굴이 표지에 실렸던 것이다.
이후 7개월 동안 피오리나는 수십 명의 헤드헌터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제안을 모두 무시했다. 1999년 3월 제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의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왔을 때도 피오리나는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세 번 더 전화했으나 비서는 바꿔주지도 않았다. 그는 마침내 직원들이 퇴근했을 무렵 다섯 번째 시도로 HP에서 피오리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알릴 수 있었다.
며칠 뒤, 피오리나와 크리스천은 힐튼 호텔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첫 만남에서 크리스천은 피오리나의 경력에서 어떤 도전과 승리가 있었는지 물었고, 그녀의 경영철학을 듣고 싶어했다. 후에 크리스천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놀란 것은 그녀의 경력이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힘든 부서에 발령을 받았더군요. 그리고 거의 모든 곳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크리스천은 100명의 후보자를 선정했다. 그런 다음 10여 명을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최종적으로 4명을 선발한다는 계획이었다. 늦은 봄, HP는 최종명단을 발표했다. 실리콘밸리의 메이저 기업에서 온 최고 후보자들이었다. 오라클시스템스의 최고운영책임자인 레어 레인,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사장 에드 잰더, 인텔의 수석부사장인 폴 오텔리나, 그리고 유일한 비 실리콘밸리 출신인 칼리 피오리나였다.
가장 흥미를 끄는 후보자는 잰더와 피오리나였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잰더는 수년 동안 휴렛팩커드의 시장을 잠식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제 그 회사에 문을 두드리는 입장에 선 그는 HP의 결점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잰더 식의 처방은 너무 거칠어서 이사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를 선마이크로에서 데려오는 일은 무척 힘들 것이었다.
"네게 기회를 주십시오! 잘 해낼 수 있습니다!" 피오리나는 샘 진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그렇게 말했다. 샘 진은 그녀의 열정이 좋았다. 그녀는 그 자리를 얻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고 해그버그 인성 테스트의 900개 문항에 답했다(반면 잰더는 거절했다). 테스트 결과는 놀라웠다. 피오리나는 전략적 비전을 가지고 있으며, 활력을 창조하고 지도력이 있었다. 성격 면에서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마침내 피오리나는 HP의 차기 최고경영자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7월 19일 HP는 피오리나의 취임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기자회견이 시작되는 순간까지도 피오리나 시대가 영 시대나 플랫 시대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기자들의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뽑힌 소감이 어떻습니까?" "오프라 쇼에 출연하실 겁니까?" "60분 쇼에 출연할 수 있습니까?" 휴렛팩커드는 난데없이 스타 CEO를 갖게 된 것이었다.
차고의 규칙처음에는 TV 화면에 작은 차고의 검은 윤곽만이 보인다. 다음 순간 맑은 음악이 들리고, 차고의 붉은 지붕이 환하게 밝아온다. 그때 한 여성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곳은 진보주의자들의 일터입니다. 바로 이 차고에서 두 젊은이가 500달러의 자본금으 로 한 산업을 창조했습니다."칼리 피오리나의 목소리였다. 화면은 곧이어 시청자들을 1930년대로 안내한다. 상태가 좋지 않은 흑백 필름에, HP가 탄 생한 차고에서 일을 하는 데이브 팩커드와 빌 휴렛의 모습이 보인다. 팩커드는 회사의 첫 제품인 오디오 발진기를 들고 있다. 차고의 문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춰지다가 갑자기 피오리나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 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빌 휴렛과 데이브 팩커드의 회사가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첫걸음을 내딛는 우리를 지켜보십시오!" 검은색 정장을 입은 피오리나가 자신 감 넘치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장면으로 광고는 끝난다.
1999년 가을, 이 광고가 방송되자 HP의 직원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실리콘밸리의 크고 오래된 기업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열정과 패기가 넘쳤던 HP의 역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광고를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잃어버렸던 HP 직원으로서의 자부심을 다시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칼리!" HP 직원인 발 스틴슨이 본사에 보낸 e-메일 내용이다.
칼리 피오리나는 자신의 진면목을 다 보여주기도 전에 휴렛팩커드 직원들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녀는 '신경제'라는 희망찬 단어와 오랫동안 잊혀졌던 HP의 역사적 힘을 교묘하게 결합시켰다.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나 사내방송을 할 때, 피오리나는 HP 선발위원회가 바라던 그대로 광채를 발휘했다. 그녀의 뛰어난 설득력을 경험한 직원들은 농담 삼아 대통령에 출마해도 되겠다고 말했다.
피오리나는 파격적인 새 전략적 과제를 실행에 옮겼다. 그녀는 최고 임원들을 불러, 3일 동안 연수회를 가졌다. 새로운 지시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들에게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몇 달 뒤, 여러분은 새로운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지금과는 다를 것입니다." 피오리나는 본사의 영향력을 강화할 것이며, 프린터, 컴퓨터, 서비스 산업에서 통일된 전략을 채택하고 부서 간에 긴밀하게 협조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