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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거스너와 IBM 부활의 신화

더그 가 지음 | 시아출판사
루 거스너와 IBM 부활의 신화

더그 가 지음

시아출판사 / 2003년 1월 / 384쪽 / 13,000원



I. IBM의 부활을 선포하다

첨단 기술업계의 이단아

해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도박으로 유명한 라스베가스에는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래서 카지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 기간 동안 휴가를 떠난다. 그러나 1995년의 추수감사절은 달랐다. 전 세계 컴퓨터 업계 관계자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지역 경제를 이처럼 들뜨게 만든 행사는 바로 컴덱스(COMDEX)였다.

1년에 한 번씩 컴퓨터와 관련된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과 판매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정보를 주고받는 이 행사에는 해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참석하곤 한다. 알라딘 호텔 연회장에 마련된 단상에는 IBM의 CEO인 53세의 루 거스너 회장이 서 있었다. 그는 이제 막 컴덱스의 개시를 알리는 기조연설을 하려던 참이었다. 거스너가 다 쓰러져 가는 IBM의 경영을 맡은 지 2년 반만에 가장 화려하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IBM의 CEO로 취임할 당시 누구보다도 IBM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거스너가 원했던 것은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이익을 내는 것, 그리고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네트워크 분야에서 선도적인 기업이 되는 것 정도였다. 이는 IBM이 첨단 기술업계에서 그동안 누리고 있던 위치를 생각한다면 말 그대로 ‘소박한’ 수준이라 하겠다.

사실 루 거스너는 연구실 안에서 세상을 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디지털 업계의 전문용어도 잘 쓸 줄 몰랐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첨단 기술업계의 CEO 가운데 그와 같은 사람은 매우 드문 경우에 속했다. 거스너는 또한 프로그램 개발자들과 어울리며 프로세서의 속도니 메모리 용량이니 데이터의 전송속도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거스너는 첨단 기술업계의 그 어떤 기업보다도 덩치가 크고 국제화되어 있으며 전통산업과 관련 있는 IBM을 다른 첨단기술 기업과 차별화하려 했다. 그는 사람들이 IBM을 GM이나 엑슨, 듀폰과 같은 기업들의 부류에 넣어 주기를 희망했다

누가 병든 공룡을 살릴 것인가

거스너가 CEO 자리를 받아들이기 몇 달 전, IBM은 그 영광의 역사에 있어 가장 혹독하고 긴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IBM 본사에는 ‘이제 끝장’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우수한 인재들은 모두 회사를 빠져나갔고 좋은 아이디어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회사 내에서는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마감기한에 쫓겨 바쁘게 행해지는 프로젝트도 전혀 없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말 그대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IBM에는 새로운 CEO가 긴급히 필요했으며,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았다. 이사진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새로 IBM의 CEO가 될 사람은 IBM 출신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들은 IBM의 케케묵은 기업 문화가 몸에 배지 않은 새로운 인물을 원했다. IBM은 CEO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GE의 잭 웰치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에게 IBM을 맡아달라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1989년 RJR 나비스코는 무리하게 기업의 덩치를 키운 탓에 29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빚의 규모를 거의 반으로 줄여놓은 사람이 바로 거스너였다. 그는 RJR 나비스코가 가지고 있던 사업부문 중에서 몇 개를 떼어 매각하는 등 회사에 불필요하다 싶은 것들은 모두 팔아치웠다. 회사 소유의 제트기와 임원용 아파트까지 팔았다. 그렇게 해서 나비스코는 1992년에 3억 달러의 순익을 남길 수 있었는데, 이는 1989년 이후 최초의 흑자였다.

거스너야말로 IBM이 그토록 필요로 하던 사람이었다. 비록 IBM의 CEO가 되기 전까지 루 거스너가 컴퓨터 회사를 경영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이것은 보기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컴퓨터 업계 관계자들은 이를 심각한 단점으로 보았다. 컴퓨터 업계가 다른 업계와 워낙 다르다 보니 그들의 시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IBM이 가지고 있던 문제는 기술력의 부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IBM에는 최고의 과학기술이 넘쳐나고 있었다. IBM이 지난 2년 동안 그토록 저조한 실적을 냈던 것은 단 하나의 이유, 즉 도구는 있으되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거스너가 내세웠던 것은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업과 경영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IBM이 원했던 사람도 신선한 아이디어를 지닌 전문경영인이었다. 기술적인 창의력은 그 다음 문제였다. IBM의 독특한 기업 문화를 뚫고 들어와 케케묵은 사고방식과 기업운영 방식을 바꿔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거스너만큼 적격인 인물도 없었다. 1993년 3월의 마지막 금요일 아침, IBM에서는 새로운 CEO 루 거스너의 공식적인 취임식이 있었다. IBM 사상 최초의 외부 출신 CEO였다.



II. 루 거스너와 IBM의 운명적 만남

최초의 한 달, 최초의 행동

거스너는 IBM의 CEO로 취임한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열리는 주주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로 가고 있었다. IBM은 그때까지 아홉 분기 연속 적자를 내고 있었으며, 한때 170달러를 돌파했던 주가는 48달러까지 떨어져 있었다. 주주총회 장소에는 예년의 세 배가 넘는 2,300명의 사람들이 거스너와 지난 2년 동안 주가 폭락을 일으킨 이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주총회에서 거스너는 CEO로서 결정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정책들에 대해 설명했다. 어떤 주주가 IBM을 여러 개의 작은 회사로 분할하려 했던 에이커스 전 회장의 계획을 고수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거스너는 에이커스와는 달리, IBM의 엄청난 규모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IBM의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주총회를 마치고 아먼크로 돌아온 거스너는 1993년의 남은 8개월이 가장 어려운 시기가 되리라는 점을 직감하고 있었다. 드디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하고 정상화시키기 위한 첫발을 디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의 계획은 감원을 통해 지출을 줄이고, 자금의 흐름을 재정비하고, 공장 몇 개를 닫고, 필요 없는 사업 부문은 팔고, 주요 고객들과의 신뢰를 다시 쌓겠다는 것 등이었다. 또한 IBM의 이사진도 손을 볼 예정이었다.

거스너는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예전의 고객들을 되찾아 오고 새로운 고객을 발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처럼 업계 최고의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사 내에 불러일으키는 일의 중요성도 잊지 않았다. 이를 위해 거스너는 소비자들과 투자 분석가, 그리고 첨단 기술업계의 실력자들을 만났다. 거스너의 이런 경영방식은 에이커스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품격을 중시하는 경영자 에이커스는 중역 회의실에 군림하기를 좋아했고, CEO에서 물러날 때까지 회사 제트기를 타고 어디를 간다든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거스너는 또한 IBM 각 사업 부문별 지출구조를 경쟁사와 비교하여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조사 결과, IBM의 매출액 대비 비용지출 규모는 다른 경쟁사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분석 결과를 토대로 IBM에서는 11개 분야에 걸쳐 30개가 넘는 비용절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들 프로젝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시적 성과를 나타냈고, 비용절감 효과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IBM 전체 사업장의 현황을 파악한 거스너는, IBM이 처한 총체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우선 대규모 감원이 행해져야만 했다. 이미 이사진과 미국 내에서만 4만에서 5만 명의 직원을 해고하기로 협의를 끝내 놓은 상태였으며, 해외 지사의 경우 3만 5,000명의 직원을 감원할 예정이었다. 이제 더 이상 IBM에 종신고용의 원칙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거스너 역시 정리해고로 인해 회사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하지만 “한 번 크게 얻어맞는 것이 떨어지는 물방울을 계속 맞는 고문보다 덜 고통스럽다.”는 것을 직원들도 알아주기를 바랐다. 거스너가 행했던 정리해고는 워낙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당황해할 새가 없었다. 임신한 지 8개월이 좀 넘은 한 여성은 최고의 실적을 내왔던 직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코카콜라 애틀랜타 지사를 IBM의 고객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회사로부터 포상금까지 받았으나 포상금을 받은 지 5일 만에 해고 통지를 받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사라져 가는 것과 함께 직원들을 위한 복지 혜택 또한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대량 감원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긴축정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 인상은 억제되었고, 성과급은 엄격하게 지급되었으며, 복리후생비 역시 대폭 삭감되었다. 이제 IBM은 예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직원들을 해고하고 임금 상승을 억제하자 1993년 말부터 1994년 초에 이르기까지 IBM의 자금 사정은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IBM의 낡은 내부 거래 관행과 복잡한 회계 시스템에 대한 정비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IBM은 내부 거래 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한 사업 부문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업 부문에게 피해를 입히는 식으로 이상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IBM이 아닌가!

거스너는 회계 시스템도 대폭 수정했다. 내부 거래를 할 때 부서 간에 가격을 협상하여 이윤을 남기는 방식을 없앴다. 신속하게 분기별 실적 보고를 하지 않는 것도 IBM의 고질병 중 하나였다. 손익계산서의 경우 매분기가 끝난 뒤 4주 단위로 작성했는데, 6주가 지나도 대차대조표가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2주라는 시간은 손익계산서의 수치를 완전히 뒤바꿀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도 남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거스너는 IBM에 신속하게 회계자료를 만들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거스너는 그 동안 IBM이 시장에 너무 느리게 대응해 왔기 때문에 스스로가 가진 강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신제품을 만들기만 했지 시장에 제때 내놓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성향은 완벽한 제품이 될 때까지 검사에 검사를 거듭하는 전통에 기안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최고의 품질을 갖춘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지만, IBM의 경쟁자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제품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제품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판매에 별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괜히 영업사원들만 끊임없이 제품 출시 일정이 연기되었음을 알리고 다녀야 했다.

거스너가 고객들과 대화를 나눠본 결과, IBM에 영업 사원들은 많지만 정작 시장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전문화된 지식을 갖춘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면, AS/400 기종의 컴퓨터는 IBM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제품 중 하나인데, 이 컴퓨터의 성능이나 경쟁 제품들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IBM이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변화는 모든 곳에서 이루어졌다. 거스너는 IBM 내의 모든 조직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선언했고, 이사진은 그 통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겪은 조직이 되었다. 거스너는 CEO로 취임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이사진에 대한 교체를 단행했다. 새로 구성된 이사진이 맨 처음 착수한 작업은 IBM의 장기적인 전략에 맞지 않는 비 핵심적인 사업부문을 골라내는 일이었다.

1993년 하반기에 이르러 IBM에는 회생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급했던 상황을 극복하고 안정을 되찾아 갔다. IBM은 4/4분기에 3억 8,200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할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의 이익에 지나지 않았지만, 적자로부터 벗어나 드디어 이익을 낼 것이라는 사실은 IBM이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IBM의 기업 문화를 뒤흔들다

IBM의 CEO로 취임한 지 6개월이 지난 1993년 가을, 거스너는 IBM의 각 사업장을 돌아보며 직원들을 격려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그는 IBM의 기업 문화를 좀더 빠르고 경쟁력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오면서 길고도 고통스러운 밤은 이제 곧 끝날 것이라고 임직원들에게 말해 왔다.

현장 직원들과의 만남에서 거스너가 강조했던 것은 IBM의 거대한 규모와 자산이 얼마나 큰 강점인지 잊지 말라는 것과, 제안할 것이 있으면 중간 관리자를 거치지 말고 최고 경영진에게 직접 해 달라는 것, 그리고 어떤 일을 책임지고 수행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과감히 나서서 그 일을 맡아 달라는 것 등이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여러분들에게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 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라고 거스너는 말했다.

거스너는 IBM에서 오랫동안 일해 오면서 관료주의가 철저하게 몸에 밴 간부들과 싸워 이겨야만 했다. 우선 그는 모든 종류의 보고서는 열 장을 넘기지 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처럼 간단하게 핵심만 요약된 보고서를 만드는 일은 부장급 간부들에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종 그래프와 표가 잔뜩 들어 있는 두꺼운 보고서를 만든 후 회의실 불을 끄고 프로젝터를 이용해 설명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거스너는 본사 내에서는 프로젝터를 사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거스너는 IBM으로부터 월급을 받는 사람들 모두에게 합리적인 수준의 임금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회사의 이익 창출에 더 많은 기여를 유도하는 새로운 고과 제도를 도입했다. 평가 기준은 더 까다로워졌지만 일단 그 기준을 넘기면 훨씬 더 많은 보상이 주어졌다.

직원 개개인의 회사에 대한 기여도를 평가하는 새로운 고과제도는 예전처럼 부장 한 명이 1년에 한 번씩 부하직원들의 업적을 평가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평가 대상 직원과 함께 일하는 여섯 명의 동료 직원들을 무작위로 선발하여 전자식 질문지를 보낸 후 그 직원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그 여섯 명이 누구인지는 해당 부서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새로운 고과 제도를 도입하면서 업적 평가 방식에도 변화를 주었다. 4단계로 나뉘어져 있던 등급을 상․중․하 3단계로 줄였으며, ‘하’의 등급을 받으면 업무에 열의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상’이나 ‘중’의 등급을 받은 직원들은 부서장이 해임할 수 없었으며,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정리해고를 한다면 ‘하’ 등급을 받은 직원들 중에서 골랐다. 또한 등급에 따라서 보너스의 지급규모가 달라졌다.

새로운 고과제도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다. 맥거번은 “고과 제도라는 것은 우수한 직원과 조직에 해를 끼치는 직원을 골라내는 것이 목적인데, 새로운 제도는 일정 비율에 의해 상․중․하를 매기다 보니 중간 등급의 폭이 너무 넓게 나타납니다. 고과는 비율에 의해 적당히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직원의 성과에 대해 행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라고 항변하고 있다.

일정 비율의 직원들은 반드시 최저 수준의 보너스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효율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조직 문화를 도입하기 위한 거스너의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보너스가 과다하게 지급될 일은 절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물론 완벽한 것은 없다. 특히 IBM 정도의 규모를 가진 기업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도 IBM은 분명 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임직원들 역시 새로운 변화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나중에 더 좋은 결과가 되어 돌아올 것을 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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