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루이스 V. 거스너 Jr. 지음 | 북@북스
제1부 파악1992년 12월 14일의 일이다. 나는 뉴욕에 거주하는 최고경영자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자선 디너쇼에 RJR 나비스코 사의 CEO 자격으로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한 지 채 5분도 못 돼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아파트 관리인이었다. "버크 씨가 오늘 밤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가능 한 빨리 말입니다." 이 늦은 시간에 만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버크 씨가 누구며,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정말로 오늘 밤에 만나고자 하는지를 물었다. "위층에 살고 계신데요. 정말로 오늘 밤에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답니다."
나는 짐 버크라는 사람을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약퇴치운동과 존슨 앤 존슨 사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지도력에는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또한 몇 해 전 타이레놀 독극물 투입 사건을 잘 처리하여 비즈니스계의 전설이 된 인물이었다. 전화를 걸자, 그는 곧장 내려왔고 본론을 꺼냈다. "당신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CEO로 복귀할 거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더 큰 기회가 있을 것도 같으니까요." 그는 IBM의 최고 경영자 자리가 곧 공석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 직책을 한번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문 지식도 부족한 데다 IBM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IBM의 판매고와 수익은 놀라우리만큼 빠른 속도로 줄고 있었다. 1993년에는 손실이 무려 160억 달러였다. 『컴퓨터 전쟁』의 저자 찰스 모리스와 찰스 퍼거슨은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문제는 IBM의 생존 가능성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분석한 바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언론들은 IBM의 몰락을 예고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이후 IBM의 회장이자 CEO인 존 에이커스가 사임을 결정했고, 곧바로 후보자를 물색할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회의 장은 바로 짐 버크였다. 버크가 이끄는 위원회는 공개적으로 미국의 이름난 CEO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GE의 잭 웰치, 모토롤라의 조지 피셔, 심지어 MS의 빌 게이츠까지….
IBM의 CEO직을 수락하지 않겠다던 나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주의 주말이었다. 나는 IBM의 상황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나비스코에 내가 오래 있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있었고, 두 번째 나는 늘 도전에 매력을 느꼈다. IBM은 나를 움츠러들거나 무섭게 만들 수 있는 도전 대상이었다. 나는 버크에게 연락을 했고, 워싱턴 D.C.의 파크 하야트 호텔 방에서 비밀리에 1시간 30분 동안 회동했다. 진지한 토의가 이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내가 IBM을 구할 확률이 20퍼센트도 채 안 되었다.
발표가 있던 날, 연단에 오르고 수십 명의 사진기자들이 앞으로 몰려오는 순간, 나는 내 인생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힘겨운 도전 앞에 섰고, 사방에서 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 어항 속에서 그 도전에 맞서야만 했다. 기자 회견이 끝나자 IBM 내부 회의가 연달아 이어졌다. 회사의 최고 경영진 약 50명으로 구성된 중역회의 멤버들과 만나기 위해 넓은 회의장으로 갔다. 방 안에 있던 남자들이 모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내 셔츠는 파란색이었다(그러나 몇 주 뒤 중역회의가 열렸을 때는 나만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는 내가 기대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사람들 말처럼 IBM이 그토록 관료적이라면 관료주의부터 청산합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의사 결정권을 분산시킵시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바른 접근은 아닙니다. 의사 결정권의 분산과 중심 전략, 고객의 공통된 관심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직원 수가 너무 많다면 빨리 적당한 규모로 만들어야겠지요. 3분기 말까지는 시행하도록 합시다. 필요하다면 외부 인사를 영입하겠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할 기회는 여러분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질 겁니다. 모두가 처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과거의 성공도, 과거의 실패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내 경영철학과 방침, 90일 동안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다섯 가지 제안, 마지막으로 향후 30일 동안 해야할 과제를 내 놓았다. 부임 초기 몇 주 동안 가장 시급했던 일은 중역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얼마나 명석하게 사고하는지, 일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 그들의 지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려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현장으로 나가야 했다. 본부에 있는 사람들만 보고 회사를 이해해서는 안 되었다. 한 주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을 방문했다. 그야말로 새벽부터 자정까지 중역, 직원, 고객들을 만나고 다닌 것이었다. 이 출장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회사 내부에 있었다.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내부 절차에 관한 과도한 관심이 조직 내의 모든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또한 직원들이 비범하고, 내가 본 어떤 조직보다도 더 유능하고 무게 있는 조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렇게 탁월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혼란 상태를 조장했을까?'
워싱턴 D.C.에서 가졌던 비밀 회동에서 말한 것처럼 IBM의 지속 여부는 -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 메인프레임에 달려 있었다. 회사 이익의 90퍼센트가 이 거대한 '서버들'과 서버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 - system/390 - 에서 나왔다. 나는 곧 메인프레임 사업의 상황을 보고 받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히타치, 후지쯔, 암달이 우리보다 30~40퍼센트 낮은 가격을 책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뻔한 질문을 했다. "왜 우리는 가격을 낮추지 않는 겁니까? 그러면 동네북 신세를 면할 수 있을 텐데." 이유는 그것이 IBM의 중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재 돈을 짜내고 있는 그 가격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를 더욱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장기적으로 볼 때 회사의 중요한 자산을 파괴하고, 마침내 회사 자체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상 회사 수익의 전부를 내고 있는 제품의 가격을 파격적으로 인하하는 도박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기술팀은 system/390의 기술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가격은 낮아지고 경쟁력은 극적으로 높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하지 않았다. 유럽과 미국 연구소의 귀재들 덕분에 이 계획은 성공했고, 이들은 새로 태어난 IBM의 영웅이 되었다. 당시 63,000달러이던 메인프레임의 가격은 7년 뒤 2,500달러까지 낮아졌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회사의 잠재 수입 수십 억 달러가 증발하여 파산의 위험이 높아진 셈이었지만, 이 계획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나는 회사의 파멸을 조장한 CEO - 마지막 황제 - 가 되었을 것이다.
4월 말, 1/4분기 경영 실적을 발표했는데 몹시 우울한 내용이었다. 총매출은 7% 감소, 총이윤 폭은 10% 이상 하락, 세전 손실이 4억 달러에 가까웠다. 1993년 7월, 어서 빨리 조치를 취하라는 압력이 거세어졌다. 포괄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재무수치는 점점 불길한 징조를 보였다. 직원들은 새 리더가 어떤 식으로든 방향을 제시해주기를 바랐다. 언론은 인내심을 잃고 있었다. 고객, 직원, 업계 리더들을 두루 만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주말 내내 생각했다. 나는 네 가지 중대 결정을 내리기로 결심했다. 첫째, IBM을 분리하지 않는다. 둘째, 수익 모델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셋째, 사업 방식을 다시 짠다. 넷째, 생산성이 낮은 자산을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한다.
나는 곤경에 처한 회사를 회생시키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가장 먼저 배운 교훈 중 하나는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어도 해야 할 일이라면 신속하게 하고, 모두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알리는 것이다. 나는 7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나의 방식을 발표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은 뭔가를 기대하고 있을 여러분 앞에서 이 발표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과연 IBM의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에 대해 무수한 추측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IBM에 가장 쓸모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비전입니다." 기자들이 놀라서 눈을 끔벅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IBM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개개의 사업에서 과감하면서도 시장을 중시하고 고도로 효율적인 일련의 전략, 즉 시장과 주식 가격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전략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일은 급한 불을 끄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회사의 근본 전략을 다시 세워야 했다. 지난 6개월 동안 내가 이야기했던 전략, 고객들을 위해서 모든 부분을 통합하는 IBM만의 강점이 앞으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전략은 나의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객들을 위해서 통합하기 전에 먼저 IBM 자체를 통합해야만 했다. 그래서 전략팀이 장·단기 계획 수립에 심혈을 기울일 때 나는 세 가지 영역에 관심을 돌렸다. 잘못할 경우 통합 전략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는 그 세 가지는 바로 '조직', '브랜드', '보수 체계'였다.
IBM은 정부를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IBM의 모든 사람들이 IBM의 실제/잠재 고객이라는 점과 과거 10년 동안 그랬듯이 앞으로 10년 동안에도 수천 개의 새로운 경쟁자들이 튀어나오는 산업의 성격 때문이었다. 거대한 전 지구적 시장과 다양한 고객층과 부단히 변화하는 기술 기반을 앞에 둔 상태에서 IBM을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끊임없는 과제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IBM은 경영자와 노동자로 구성된 조직이 아니라 30만 명 이상의 전문가가 모인 집단으로 모두가 명석하고 집요하게 파고들고, 저마다 자신의 의견이 있다는 점이었다.
IBM은 이 다양한 목소리를 취합하여 지난 세월 동안 두 방향으로 뻗어 왔다. IBM의 전 지구적 사업을 관장하는 강력한 제후국들과 근간이 되는 기술력을 관장하는 강력한 제품 사업부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체계에서 빠진 것은 다름 아닌 고객의 의견이었다. 각 지역의 영주들은 대개의 자신의 봉토를 지키고 그 영지 안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했다. 기술사업부는 고객의 필요나 우선순위는 안중에 없이 그들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역별 제후국 체제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나는 세계경영팀 중심으로 회사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즉각적인 반응은 거부였다. "이 방식은 결코 먹히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회사를 말아먹을 작정이군요!" 새로운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자원을 대거 재배치하고 시스템과 절차를 바꾸어야 했고, 그 계획을 시행하고 정착시키는 데는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한편 IBM을 구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 감원과 리엔지니어링, 전략 구상과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시도, 그 밖의 모든 시도들은 IBM이라는 브랜드의 가치가 떨어지게 될 경우 모든 헛일이 될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기업이 성공하려면 고객과 시장을 중심에다 두어야 하고, 또 강력한 마케팅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전 지구적인 기업을 만드는 두 번째 단계로 IBM의 마케팅 방식을 개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까지 IBM에는 진정한 의미의 마케팅 책임자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이밖에 보상 체계의 정립도 IBM에 시급한 사안이었다. '옛 IBM'은 보수에 대해 매우 고정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내가 부임할 당시의 모든 직급에서 보수는 주로 봉급으로 이루어졌고, 보너스나 스톡옵션으로 받는 보수는 거의 없었다. 또한 보수 체계에 거의 차별이 없었다. 다만 각종 혜택이 크게 강조되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보수 체계에 주요한 변화를 도입했다. 그 변화 뒤에는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이 놓여 있었다. 이 새로운 체계는 '차별화'로 요약될 수 있다. 개인 실적과 시장에서의 보수에 따라 연봉 인상에 차이를 두는 것이다. 또한 사업 실적과 회사에 대한 개별적 기여에 따라 보너스에 차등을 두고 개인의 중요한 기술과 경쟁에서의 손실 리스크에 따라 스톡옵션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부임 첫해는 1993년 12월 토마스 왓슨 2세의 죽음과 함께 슬픔 속에 막을 내렸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9개월 동안 우리가 도입한 엄청난 변화와 그 변화에 대한 회사 안팎의 다양한 - 긍정과 부정이 뒤섞인 - 반응들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했다.
제2부 전략1990년대 초 컴퓨터 산업에서 선두주자들의 성공은 어떤 식으로든 모두 PC와 연관돼 있었다. 거기에는 물론 델, 컴팩 같은 PC 제조사들도 포함돼 있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두주자는 누가 뭐라해도 데스크탑 운영체제를 장악한 MS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든 인텔 사였다. 앞 시대의 컴퓨팅을 선두하며 컴퓨터 산업의 중요한 기술들을 수도 없이 발명한 바 있는 IBM은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데스크탑 컴퓨팅계의 동료들에 의해 계속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음을 깨닫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업계에 두 세력이 출현하는 걸 지켜보면서 전혀 다른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많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다른 시각의 컴퓨터 산업에 회사의 명운을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그 도박의 첫 번째 힘은 고객으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1980년대에 생겨난 클라이언트/서버 모델을 통합하는 것에 도박을 걸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고객들은 솔루션 - 다양한 공급자들이 만들어 낸 기술을 통합하고, 나아가 그 기술들을 한 기업의 전체 절차에 통합시키는 - 을 제공할 수 있는 회사를 높이 평가할 것이다. 도박을 걸게 만든 두 번째 힘은 1994년의 PC 지배 세계를 대체할 네트워크 모델 컴퓨팅의 부상이었다.
초기에는 서비스 부서와 IBM 내 다른 몇몇 부서 사이에 일주일에 한 번씩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비스 부서에서 경쟁사의 제품을 끼워 넣은 제품 솔루션을 제안할 때마다 브랜드 담당 임원과 판매 책임자들 다수가 탄환을 퍼붓곤 했다. 몇 번은 이 사람들이 내 사무실까지 찾아와 서비스 분야의 배신자들에게 욕을 해댔다. 하지만 내 대답은 한결 같았다. "서비스 팀에서 우리 제품의 상대적 강점을 파악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을 제품의 구매자로 보세요. 우리의 경쟁자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전 세계의 서비스 조직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 그런 서비스 조직이 수십 개 있었는데, 절차와 가격, 제공 서비스, 조건, 브랜드 명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나는 통일된 조직 - 판매 부서의 하나이지만 전 세계적 차원에서 아웃소싱과 네트워크 서비스를 선도할 수 있는 조직 - 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이는 실로 막중한 과제였다.
만일 IBM 글로벌 서비스를 세우려는 노력이 실패했다면, 그와 더불어 IBM - 적어도 나의 IBM 비전 - 은 실패로 막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1992년에 서비스 부문은 IBM에서 73억 달러 사업이었으나, 2001년에는 300억 달러 사업으로 급성장하면서 회사 전체 인력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수백억 달러 사업체 중 이런 속도로 성장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IBM이 서비스에 치중하기로 했을 때, 나는 일종의 육감으로 밀고 나갔다. 하지만 정보기술 산업과 우리 회사의 미래를 예측하면서 서비스 주도형이 될 거라고 말한 것은 사실 육감이 아니었다. 1993년 IBM의 재무 구조조정이 시작된 이래 서비스 부문은 회사 전체 총수입 증가액의 약 80%를 창출해 냈다.
지난 9년 동안 우리가 감행해 온 전략적 대도박과 그 결과를 돌아보니, 상충되는 두 가지가 머리를 스친다. 한 차원에서는 IBM의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으며, 또 다른 차원에서는 달라진 게 거의 없다는 것이다. 1993년과 2002년의 IBM 사업 내용을 가볍게 둘러보면, 처음엔 달라진 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10년 전 우리는 서버, 소프트웨어, 서비스, PC, 저장장치, 반도체, 프린터, 파이낸싱 사업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사업들을 하고 있다. 물론 그 사업들 중 일부는 엄청나게 성장해 왔다. 일부는 초점이 재조정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퇴장한 것은 몇몇 부문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