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벨트 파워 리더십 : 꿈을 이룬 대통령
제임스 M. 스트록 지음 | 느낌이있는나무
그때 지지하는 군중 속에서 권총을 지닌 한 정신 이상자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총을 든
손이 정면에서 루스벨트를 겨냥했다… 한 발의 총성… 말에 채인 것 같은 충격이 가슴속 을 파고들었다… 한줄기 고통… 몸은 시트위로 무너져내렸고… 피와 고통과 싸늘함… 아 수라장….차가운 죽음의 숨결이 그의 목을 엄습했다. 참모진과 가족들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며 루스벨트는 약해진 목소리로 단호한 결의를 비쳤다. "연설을 하게 해주게. 이번이 나의 마지막 연설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번 연설은 꼭 해야만 해."
유세장에 도착한 루스벨트는 피에 젖은 셔츠를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몸은 떨렸지만 정신만은 또렷한 루스벨트는 한시간 반 동안 꼬박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의 진정한 힘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연설문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온몸으로 보여준 용기에서 나왔다. 연설이 끝나고 청중들의 환호를 들으며 루스벨트는 몸을 돌려 의사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과 갈 준비가 되었으니 당신이 마음대로 하시오."
의료진은 가슴 오른쪽으로 파고들어 늑골 안에 박혀있는 총알을 찾아냈다. 다행히도 총알은 그의 연설원고와 안경집을 관통했다. 루스벨트의 반대자들도 그의 이 같은 행동에 존경심을 나타냈다. 「뉴욕 헤럴드」는 다음과 같은 제목 하에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우리는 그의 정치노선에는 반대하지만 그의 기개는 존경한다."
루스벨트는 일찍부터 '용기야말로 첫 번째 가는 미덕'이라는 윈스턴 처칠의 명언에 내포된 지혜를 깨달은 셈이었다. 용기는 다른 모든 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임을 인식한 그는 자기계발에 장애가 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로 결심했다.루스벨트는 평생을 살면서 본보기의 효과 - 좋은 본보기이든 나쁜 본보기이든 간에 - 를 깊이 받아들였다. 항상 인격을 중시하고 그 인격은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행한 선택에 의해 형성된다고 믿은 루스벨트는, 자신의 생활도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본보기가 되도록 노력했다. 루스벨트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영웅으로 숭배하는 사람들 -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로 루스벨트 자신의 아버지, 워싱턴, 링컨 - 을 본받고자 했다. 그들은 항상 그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했을 때 루스벨트는 자신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전쟁영웅들을 존경해 왔던 루스벨트는, 쿠바전투에서 그 영웅들의 미덕을 몸소 보여주었다.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서 그는 나태한 장군들을 불러 등산을 하게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위급 장교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3일 동안 90마일을 달리도록 지시했다. 당연히 불평과 함께 독재자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이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단 하루만에 말을 타고 100마일을 주파함으로써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으로서 신변의 안전도 개의치 않고 새로 발명된 잠수함을 타고 한 시간 이상 잠수하기도 했다. "내가 잠수함을 탄 가장 큰 이유는 내 자신이 시도하기 꺼리는 일을 장교들이나 사병에게 시킨다고 오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1917년 미국이 마침내 3년 동안 유럽을 뒤흔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루스벨트는 국회가 승인한 지원병으로 구성된 사단 중 한 부대를 지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윌슨은 루스벨트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실망한 루스벨트는 대신 자신의 네 아들을 유럽 전장으로 보냈다. 딸 에텔도 프랑스에서 간호사로 복무했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 퀀틴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온 세계를 통틀어 국가를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봉사한 것으로 알려진 리더는 마지막까지 모범을 보여주었던 것이다.루스벨트는 1880년 봄 대학 졸업을 준비할 무렵 종합검진을 받은 결과 심장이 약한 것으로 진단 받았다. 의사는 앞으로 너무 심한 육체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며 직업선택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의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박사님이 금하시는 것을 전부 하려고 합니다. 내가 박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야 한다면 삶이 짧다고 해서 안타까울 일도 없을 겁니다." 루스벨트는 변신을 꾀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벽에 부딪혔다고 자포자기하기보다는 '60세까지만 철두철미하게 내 삶을 끌고 가자.'고 침묵으로 맹세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저서 『전력 투구하는 삶』은 바로 자신의 인생철학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언급했다. 루스벨트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만들어가고, 동시에 마음과 정신세계를 강건하게 하여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세상적인 업적들 때문에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정을 결코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찬사라고 여겨질 만한 칭찬을 덧붙였다. "아이들이 책 보다 더 좋다."
6명의 자녀 중 5명을 출산한 두 번째 부인 에디스도 나름대로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강인한 성격은 루스벨트를 현실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나가고, 남편 동료들의 성격을 예리하고 빈틈없이 평가하는 것은 종종 그녀의 몫이었다. 에디스는 '소박한 삶이 건강한 삶이다.'라는 남편의 신념을 어떤 의구심도 없이 공감하고 있었다. 루스벨트 부부는 그들의 사회, 경제적 위치라면 의당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유혹들을 한 점 아쉬움 없이 떨치고 중류층의 평범한 삶을 고수했다.
두 번째로 대통령이 되었을 때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이란 일종의 긴 전쟁이다. 한 전투에서의 승리는 단지 또 다른 전투를 위한 기반을 제공할 뿐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국 모든 사람은 패배를 맛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간의 승리가 의미 있는 것이었고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면, 마지막 패배인 죽음이 그 동안 이룩했던 값진 승리를 퇴색시키지도 않고 퇴색시켜서도 안 된다."
1918년 10월 27일 일요일 루스벨트는 60세를 맞이했다. 그의 정치 역정도 서서히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되자, 국민들은 다시 루스벨트의 덕목에 감사하게 되었다. 외롭게 징병을 주장한 그의 선견지명이 옳은 것이었음이 입증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참전을 주장한 그의 노력뿐 아니라 가족들의 노력에 의해 더욱 부각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분위기를 충격적으로 보여주듯 공화당은 11월 5일 총선에서 10년만에 처음으로 상/하 양원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시 루스벨트를 1920년 대선의 확실한 공화당 후보로, 그리고 금번 총선에서 가장 혁혁한 공로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수년동안 너무나 심하게 혹사당한 루스벨트의 몸은 이제 쇠약해지고 시각과 청각도 장애가 생겼다. 1919년 1월 5일 일요일 루스벨트는 몇 개의 사설을 쓰고 다듬는 등 하루종일 집필 작업에 몰두했다. 그 날 저녁 에디스와 함께 화로 앞에 앉은 루스벨트는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사가모어 언덕(루스벨트의 생가가 있는 곳)을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에디스라는 인생의 화롯불 앞에서 양손을 따뜻하게 데우고, 루스벨트는 다음날 아침 새벽 4시가 지날 무렵 잠든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정적이었던 부통령 토마스 마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도 루스벨트를 그가 잠들어 있을 때 데려가야 했다. 그가 깨어 있었더라면, 한 바탕 대전투가 일어났을 것이다."
1월 8일, 수요일, 오이스터 베이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루스벨트가 늘 바랐던 것처럼 간소한 예식이었다. 음악도 찬사의 말도 없었다. 하객들은 가족과 친구,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몇몇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것이 전직 미국대통령의 장례식임을 보여주는 유일한 암시였다. 성조기로 덮인 떡갈나무관은 근처 영스 묘지로 옮겨졌다.
전력 투구하는 삶에 대한 루스벨트의 본보기는 바로 즐거운 마음으로 도전하는 데 있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비범한 리더십과 가정 생활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삶과 일을 묶어주는 공통 요소는 봉사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믿고 있었다. "우리는 봉사하지 않는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동기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면, 당신은 부서진 조각들 밖에 얻지 못할 것이며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꿈을 이룬 대통령, 루스벨트의 리더십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가 이룬 업적보다는 오히려 그의 인격에서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서문 1909년 9월당신이 어디에 있든 리더가 되어라두려움과의 작별항상 배움몽둥이 휘두르기!부당한 비판에 대응하기1884년 2월 13일 지지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던 뉴욕주 의회의원인 루스벨트는 갑자기 날아 온 한 통의 전보를 받고 황급히 기차역을 향해 달렸다. 전보는 그의 아내가 출산 후유증으로 중태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아내 엘리스는 항상 딴 세상 사람인 듯한 고결함을 지녔다. 밝은 미소를 띈 그녀의 모습은 늘 온화해 보였다. 그녀의 몸가짐은 좋은 가문 출신임을 반영하듯이 교양 있고 사려 깊었으며, 백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의 빛 바랜 사진들은 여전히 그녀의 매력을 전해주고 있다. 1878년 가을 루스벨트가 첫눈에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당시 그녀는 열 일곱, 그는 스무 살이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생일인 1880년 10월 27일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당신으로 인해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자정 직전에야 집에 도착했다. 그는 아내의 침상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내는 완전히 혼수상태였고 다음 날 오후 마침내 운명하고 말았다. 그 때 그녀는 겨우 스물 둘이었다. 루스벨트는 2월 14일 일기에 'X' 자를 크게 그리고 단 한 마디만 적어 넣었다. "내 삶에서 빛은 사라졌다." 다음 날인 2월 15일 일기는 텅 비어 있었다.
엘리스를 잃고 난 뒤 그는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그는 일생 동안에도 이러한 삶의 태도를 견지했다. 예컨대 1918년, 1차 세계대전에 미국 조종사로 참전한 그의 아들 퀀틴의 전사 소식을 들은 주간에도, 루스벨트는 공화당 전당 대회 연설을 포함한 모든 일정을 예정대로 고수했다. 이러한 태도는 루스벨트가 스스로 끌어낸 역경을 치료하는 해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한 개인이 역경과 자신의 과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가가 역경이나 과오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역경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역경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때로는 잔인하리만큼 모진 태도로 인해 비난을 면할 수 없겠지만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로지 최선을 다해 순간의 삶에 충실하려는 그의 진취적인 태도는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다.루스벨트는 인생을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라고 보았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인생 후반부인 1912년 독자적인 '불 무스(Bull Moose; 숫사슴)당' 후보로서 대통령에 출마한 것은 그에게 가장 힘든 전투였다.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두 거대 정당의 조직과 유능한 후보자에게 동시에 도전했던 것이다. 이들 중 한 명은 그가 직접 자신의 공화당 후계자로 지명했던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으며, 다른 한 명은 뉴저지 주지사이자 민주당 후보인 우드로 윌슨이었다.
11월 선거를 앞두고 몇 주 동안 맹렬하게 선거운동을 벌이던 백전불굴의 루스벨트도 10월 중순경에 이르자 과로로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10월 14일 유세를 위해 밀워키에 도착한 루스벨트는 오픈카를 타고 연설장으로 향했다. 루스벨트는 모자를 들어올려 군중의 환호에 답례했다.행동, 행동 그리고 또 행동리더십 -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행동을 말로 표현하기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미합중국이 기초를 세우기 시작할 20세기의 먼동이 트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실험은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중앙정부가 공화 민주주의를 설립한 것은 세계 역사상 가장 대담한 시도였으며 그 역사는 이제 겨우 100년에 지나지 않았다. 1861년부터 1865년의 기간 동안 미국을 폐허로 만든 피로 얼룩진 남북전쟁은 여전히 전쟁의 상흔을 남기고 있었으며, 20세기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미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다.
19세기는 전례 없이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고 미합중국은 주어진 운명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뉴욕타임즈」가 1900년 1월 1일자에 20세기가 보다 밝은 문명의 새로운 새벽을 가져올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1901년 5월에서 11월까지 뉴욕의 버팔로에서 개최된 범미주 박람회는 새로 시작되는 20세기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상징하고 있었다. 9월 6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 박람회 참석을 위해 버팔로 음악의 전당에 도착한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는 환호하는 청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 때 앳된 얼굴의 리온 촐고스라는 25세의 청년이 마치 혈관 속의 박테리아처럼 점점 더 늘어나는 환영인파를 뚫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대통령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었다. 수건으로 감싼 촐고스의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 나오면서, 숨겨진 권총에서 맥킨리의 복부를 향해 두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초인처럼 위풍당당했던 대통령은 입술을 악물며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부통령 루스벨트는 라 모테 섬 넬슨 피스크 전 주지사의 저택 잔디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급보를 받은 루스벨트는 즉시 버팔로를 향해 출발했다. 저격 사건이후 수일만에 맥킨리는 회복되었다. 9월 10일 화요일, 루스벨트는 맥킨리가 실질적으로 위험한 상황은 벗어났다고 믿고 버팔로를 떠나 자신의 고향인 뉴욕 주의 아디론닥스로 향했다.
9월 13일 금요일, 루스벨트는 한 호수 근처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행보를 멈추었다. 그 때 길 아래쪽에서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와 그에게 전보를 내밀었다. 전보에는 대통령이 다시 위독해져 그가 즉시 버팔로로 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밤새도록 마차를 달려 마침내 동이 틀 무렵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루스벨트는 맥킨리 대통령이 이미 서거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적 여정의 종착지를 향해 마련된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9월 14일 토요일 오후 버팔로에 도착하자마자, 루스벨트는 한 개인주택 안에서 맥킨리 행정부의 각료들에 둘러싸인 채 지방 판사 앞에서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선서를 했다.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로 대통령의 임기 중 사망으로 인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맥킨리 대통령의 사망으로 국민들은 이제부터는 완전히 다른, 다소 특이한 대통령이 행정수반으로서 권력을 행사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42세 생일을 2주 남겨놓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가장 젊은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행정부내 하급각료 자리에서 오른 지 4년도 채 안되어 마침내 백악관에 입성한 것이다. 그의 급격한 부상만큼이나 그의 인격 역시 모든 면에서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맥킨리는 1860년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 남북전쟁 세대들이 겪은 쓰라린 과거의 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반면 루스벨트는 새롭게 등장한 신세대를 대표하고 있었다. 1858년에 태어난 그는 20세기 초 미국 자체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특징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가진 최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기 자신은 자수성가한 인물로 여겼다. 그가 보여준 리더십의 대부분이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에 의해 계발된 것임을 감안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