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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파워 리더십 : 꿈을 이룬 대통령

제임스 M. 스트록 지음 | 느낌이있는나무
서문 1909년 9월



미합중국이 기초를 세우기 시작할 20세기의 먼동이 트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실험은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중앙정부가 공화 민주주의를 설립한 것은 세계 역사상 가장 대담한 시도였으며 그 역사는 이제 겨우 100년에 지나지 않았다. 1861년부터 1865년의 기간 동안 미국을 폐허로 만든 피로 얼룩진 남북전쟁은 여전히 전쟁의 상흔을 남기고 있었으며, 20세기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미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다.

19세기는 전례 없이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고 미합중국은 주어진 운명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뉴욕타임즈」가 1900년 1월 1일자에 20세기가 보다 밝은 문명의 새로운 새벽을 가져올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1901년 5월에서 11월까지 뉴욕의 버팔로에서 개최된 범미주 박람회는 새로 시작되는 20세기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상징하고 있었다. 9월 6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 박람회 참석을 위해 버팔로 음악의 전당에 도착한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는 환호하는 청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 때 앳된 얼굴의 리온 촐고스라는 25세의 청년이 마치 혈관 속의 박테리아처럼 점점 더 늘어나는 환영인파를 뚫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대통령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었다. 수건으로 감싼 촐고스의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 나오면서, 숨겨진 권총에서 맥킨리의 복부를 향해 두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초인처럼 위풍당당했던 대통령은 입술을 악물며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부통령 루스벨트는 라 모테 섬 넬슨 피스크 전 주지사의 저택 잔디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급보를 받은 루스벨트는 즉시 버팔로를 향해 출발했다. 저격 사건이후 수일만에 맥킨리는 회복되었다. 9월 10일 화요일, 루스벨트는 맥킨리가 실질적으로 위험한 상황은 벗어났다고 믿고 버팔로를 떠나 자신의 고향인 뉴욕 주의 아디론닥스로 향했다.

9월 13일 금요일, 루스벨트는 한 호수 근처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행보를 멈추었다. 그 때 길 아래쪽에서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와 그에게 전보를 내밀었다. 전보에는 대통령이 다시 위독해져 그가 즉시 버팔로로 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밤새도록 마차를 달려 마침내 동이 틀 무렵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루스벨트는 맥킨리 대통령이 이미 서거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적 여정의 종착지를 향해 마련된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9월 14일 토요일 오후 버팔로에 도착하자마자, 루스벨트는 한 개인주택 안에서 맥킨리 행정부의 각료들에 둘러싸인 채 지방 판사 앞에서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선서를 했다.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로 대통령의 임기 중 사망으로 인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맥킨리 대통령의 사망으로 국민들은 이제부터는 완전히 다른, 다소 특이한 대통령이 행정수반으로서 권력을 행사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42세 생일을 2주 남겨놓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가장 젊은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행정부내 하급각료 자리에서 오른 지 4년도 채 안되어 마침내 백악관에 입성한 것이다. 그의 급격한 부상만큼이나 그의 인격 역시 모든 면에서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맥킨리는 1860년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 남북전쟁 세대들이 겪은 쓰라린 과거의 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반면 루스벨트는 새롭게 등장한 신세대를 대표하고 있었다. 1858년에 태어난 그는 20세기 초 미국 자체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특징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가진 최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기 자신은 자수성가한 인물로 여겼다. 그가 보여준 리더십의 대부분이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에 의해 계발된 것임을 감안할 때, 자신에 대해 내린 그의 정의는 적절하다. 루스벨트는 리더십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리더십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루스벨트가 경력을 쌓아온 궤적은, 당시로서는 전통을 벗어난 독특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루스벨트는 삶에 대하여 이미 100년 전에 오늘날 기업가와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즉 오늘날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네자신닷컴(yourself.com)'의 최고경영자가 되라는 톰 피터스의 철학을 추구했던 것이다. 리더십에 관한 루스벨트의 교훈은 리더십 역시 삶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리더가 되어라



루스벨트는 키가 5피트 9인치에 달했으며, 몸무게는 200파운드에 약간 못 미쳤다. 그는 신체가 건장했으며, 이는 오랫동안 지속해온 운동과 끊임없는 육체노동의 결과였다. 실제로 루스벨트는 강한 의지로 꾸준히 노력하여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 수도관 같이 가는 다리로 휘청거리듯 걸으며 항상 기가 죽어지내고, 너무도 허약한 나머지 불량소년들에게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던 그였지만 스페인-미국전쟁 때는 쿠바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러프 라이더(Rough Riders) 부대의 영웅적 리더가 되었다. 또한 그는 뉴욕 맨하탄의 '실크 스타킹'이라는 부유층 거주지역에서 성장하였지만, 스스로 '약골 소년'에서 거친 서부의 존경받는 목장주로, 그리고 탐험가로 변신했다. 전문가를 능가하는 자연에 대한 지식과 사랑으로 자연에 푹 빠졌던 루스벨트는, 때로는 피에 굶주린 냉혹한 승부 근성을 지닌 열렬한 스포츠광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리더십 교훈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현재 당면한 일에 있어 전력투구를 하며 미래에 대한 예측을 토대로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스벨트 당대와 현재의 비평가들은 그를 초보적이며 구태의연하고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며 무시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리더십의 힘 대부분은 단순함과 투명성에서 나왔다.

1895년, 36세에 루스벨트는 뉴욕 시 경찰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허리케인과 같은 영향력으로 부패한 관료조직을 강타했다. 당시 애송이 위원인 루스벨트는 민주당 의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화당 내에서도 만연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냈다. 그의 신랄한 공세는 부패한 정치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당시 정치적 성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후원자들과의 관계조차도 긴장감에 빠뜨렸다.

1896년 공화당의 윌리엄 맥킨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루스벨트의 관심은 워싱턴으로 쏠렸다. 상원위원 로지와 다른 친구들은 루스벨트를 해군성 차관으로 천거했다. 맥킨리 대통령은 루스벨트가 그 자리에 임명되자마자 지나치게 저돌적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루스벨트는 해군성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새로 임명된 해군성 차관인 루스벨트의 기질에 대해 맥킨리가 우려할 만도 했다. 1898년 2월 25일, 해군장관 롱이 휴가 중이어서 장관직무 대행을 하고있던 루스벨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당시 세력을 확장하려는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듀이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 전시상황에 대비하여 필리핀에 주둔 중인 스페인 함대를 막도록 명령했다. 올바른 국가 정책을 통해 국가에 헌신하는 것 이외에도 루스벨트는 조국을 위해 전쟁에 참가하여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다. 그 해 4월 마침내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이 시작되자 루스벨트는 자신의 머리뿐 아니라 신체 역시 조국을 위해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가족과 친구의 거센 반대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해군성 차관의 자리를 내던지고 쿠바에 주둔 중인 육군부대에 자원했다. 쿠바전투에서 그는 리더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도 말을 타고 무방비 상태로 공격에 노출된 채 부하들을 지휘했다.

1898년 여름 스페인-미국간의 쿠바전투를 마치고 여름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루스벨트는 국가적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의 전공은 당대의 유명기자들에 의해 언론에 자세히 보고되었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공화당은 믿을만한 주지사 후보자로 루스벨트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루스벨트는 1898년 11월에 130만 표 중 18,000표도 안 되는 근소한 차이로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공화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플래트는 새 주지사 루스벨트가 중요 정책에 대해 사전에 당과 사전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잘 지킬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결국 자기 방식대로 업무처리를 했다. 루스벨트는 고위직 인사 임명과 규제 법안 그리고 자원 보존 관련 주요 정책에 대해 플래트 및 양당의 구태의연한 세력들과 자주 의견을 달리 했다.

플래트는 서서히 그리고 아주 은밀하게 루스벨트를 뉴욕에서 쫓아내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1899년 후반 부통령 가렛 호바트가 돌연 사망하자 플래트는 루스벨트를 한직으로 몰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부통령 유고 시 그 직위의 승계에 관한 헌법조항이 없어, 부통령 자리는 1900년 선거 때까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그 당시 부통령직은 정치적으로 일종의 종착역으로 간주되었다. 부통령의 업무는 상원의원회의(1년 동안 단 몇 일밖에 열리지 않는) 의장 역할이 전부였다. 그 자리는 어떠한 제도적 기반도 없었으며 집무실도 대통령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한 부통령에게는 대통령이나 뉴욕 주지사처럼 대저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플래트의 이러한 의도에 강력히 저항했지만 결국 동부의 당 고위급 지도자들과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서부 대표들의 뜻밖의 연대로 루스벨트는 부통령후보로 지명되기에 이르렀다.

1901년 3월 4일 맥킨리의 승리로 환호에 가득 찬 대통령 취임식 퍼레이드에서 눈에 띄지 않는 들러리로 나서야 했을 만큼 부통령으로서 루스벨트의 역정은 외로운 것이었다. 플래트는 맥킨리와 루스벨트의 취임을 지켜보며 "테디(루스벨트의 애칭)가 사라지는 순간을 보기 위해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낙관적인 사고방식은 완강한 도전에 부딪힐수록 더욱 견고해졌다. "만약 내가 한직으로 떠밀린 것이라면, 적들은 내가 그 한직을 보다 유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 기간 동안 여행과 연설을 하고, 늘 그래왔듯이 집필과 서신 교환에 몰두했다.

1901년 9월 맥킨리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루스벨트는 20세기 여명에 미국인의 삶이 되어버린 질주하는 기관차의 기관사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나의 유기적 통합체로 통일되지 않고 서로 흐트러진 파편조각 같았던 그의 범상치 않았던 인생 경험들이 마침내 하나로 통합되어, 그는 새로운 모습의 국가 지도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루스벨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포함하여 어떠한 고위직 지도자 자리에서도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현재의 자리가 공직 생활의 마지막 자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루스벨트는 어떠한 자리에서든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했고 이러한 태도가 결국 그의 삶을 범상치 않은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두려움과의 작별



루스벨트는 인생을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라고 보았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인생 후반부인 1912년 독자적인 '불 무스(Bull Moose; 숫사슴)당' 후보로서 대통령에 출마한 것은 그에게 가장 힘든 전투였다.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두 거대 정당의 조직과 유능한 후보자에게 동시에 도전했던 것이다. 이들 중 한 명은 그가 직접 자신의 공화당 후계자로 지명했던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으며, 다른 한 명은 뉴저지 주지사이자 민주당 후보인 우드로 윌슨이었다.

11월 선거를 앞두고 몇 주 동안 맹렬하게 선거운동을 벌이던 백전불굴의 루스벨트도 10월 중순경에 이르자 과로로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10월 14일 유세를 위해 밀워키에 도착한 루스벨트는 오픈카를 타고 연설장으로 향했다. 루스벨트는 모자를 들어올려 군중의 환호에 답례했다.

그때 지지하는 군중 속에서 권총을 지닌 한 정신 이상자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총을 든 손이 정면에서 루스벨트를 겨냥했다… 한 발의 총성… 말에 채인 것 같은 충격이 가슴속 을 파고들었다… 한줄기 고통… 몸은 시트위로 무너져내렸고… 피와 고통과 싸늘함… 아 수라장….

차가운 죽음의 숨결이 그의 목을 엄습했다. 참모진과 가족들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며 루스벨트는 약해진 목소리로 단호한 결의를 비쳤다. "연설을 하게 해주게. 이번이 나의 마지막 연설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번 연설은 꼭 해야만 해."

유세장에 도착한 루스벨트는 피에 젖은 셔츠를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몸은 떨렸지만 정신만은 또렷한 루스벨트는 한시간 반 동안 꼬박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의 진정한 힘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연설문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온몸으로 보여준 용기에서 나왔다. 연설이 끝나고 청중들의 환호를 들으며 루스벨트는 몸을 돌려 의사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과 갈 준비가 되었으니 당신이 마음대로 하시오."

의료진은 가슴 오른쪽으로 파고들어 늑골 안에 박혀있는 총알을 찾아냈다. 다행히도 총알은 그의 연설원고와 안경집을 관통했다. 루스벨트의 반대자들도 그의 이 같은 행동에 존경심을 나타냈다. 「뉴욕 헤럴드」는 다음과 같은 제목 하에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우리는 그의 정치노선에는 반대하지만 그의 기개는 존경한다."

루스벨트는 일찍부터 '용기야말로 첫 번째 가는 미덕'이라는 윈스턴 처칠의 명언에 내포된 지혜를 깨달은 셈이었다. 용기는 다른 모든 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임을 인식한 그는 자기계발에 장애가 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로 결심했다.

항상 배움



두려움을 극복함으로써 성격을 변화시킨 루스벨트는 책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루스벨트의 이미지는 행동하는 사람 - 목장주, 카우보이, 군인, 탐험가, 사냥꾼 - 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배움에 대해 무모하리만큼 강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루스벨트는 꾸준히 하루에 한두 권, 심지어는 세 권의 책을 읽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항상 자신의 호주머니에 책을 한 권 지니고 다니거나 백악관 기둥 한 곳에 책을 감추어 놓곤 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생애를 특징 지운 행동들과 독서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내 말안장 주머니나 탄약 배낭에 항상 몇 권의 책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종종 한낮 에 나무 아래에서 쉬는 동안에 책을 읽거나, 내가 죽인 짐승의 시체 옆에서, 혹은 캠프가 설치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책을 읽곤 했다. 때로는 손 씻을 물을 구하기 어려워 책들은 피, 땀, 총 기름, 먼지로 인해 더러워졌다.

루스벨트는 독서가 인간 최고의 도덕적 본능을 강화시켜준다고 믿었다. 아마도 루스벨트는 "리더가 되려는 사람은 육체적 건강을 위해서 영양제를 섭취하는 것처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도 비타민을 섭취해야 한다."고 말한 비즈니스 컨설턴트 제임스 론과 의견을 같이 했을 것이다. 또한 루스벨트는 자서전을 비롯하여 『1812년 해전』, 『서부의 승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서를 집필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최고 지도자가 학습한 것은 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성과에 반영되어야 한다. 살아 움직이는 조직의 중심 목표는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다.

역경 속에서도 용감하게 일하기



1884년 2월 13일 지지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던 뉴욕주 의회의원인 루스벨트는 갑자기 날아 온 한 통의 전보를 받고 황급히 기차역을 향해 달렸다. 전보는 그의 아내가 출산 후유증으로 중태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아내 엘리스는 항상 딴 세상 사람인 듯한 고결함을 지녔다. 밝은 미소를 띈 그녀의 모습은 늘 온화해 보였다. 그녀의 몸가짐은 좋은 가문 출신임을 반영하듯이 교양 있고 사려 깊었으며, 백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의 빛 바랜 사진들은 여전히 그녀의 매력을 전해주고 있다. 1878년 가을 루스벨트가 첫눈에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당시 그녀는 열 일곱, 그는 스무 살이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생일인 1880년 10월 27일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당신으로 인해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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