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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

도몬 후유지 지음 | 지식여행
료마는 대부분 자신의 자본 없이 다른 사람의 자본으로 몇 가지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다. 과연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그의 독창적인 인간관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중시하고, 만나는 사람을 선별한다. 곧 일류 인물만을 만난 것이다. 그는 사회의 인맥설정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상황에 따라 사람을 버릴 수도 있는 비정한 속내를 지닌 사람이었다. 또한 료마는 언변도 뛰어났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데도 진지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료마를 상대하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료마는 증폭시켜 자신의 것으로 실현시켰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 료마에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료마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 속엔 언제나 시민 정신이 흐르고 있었으며, 에너지가 넘쳐났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와 개혁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으로부터 탈피를 모색했다. 오만한 듯 보이지만 실제론 매우 겸허하고, 휴머니즘을 관철시킨 료마. 이런 매력들이 료마의 인간상을 당시의 일본인들로부터 동떨어진 위치에서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더구나 료마의 겸허함은 형식적인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겸허함이었다. 그가 한낱 유랑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베 해군 조련소의 사감이 되고, 선중팔책을 근거로 다이세이 봉환을 실현시키는 등 한 사람의 행위로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업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정책 현안에 대한 탁월한 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료마가 갖추고 있는 인간적인 매력이 강력한 무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료마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일화는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혁명가들이 흔하게 가지기 쉬운 오만은 찾을 수 없었고 그 일생은 소박한 휴머니즘과 인간애로 관철되어 있었다. 즉 상식의 산물인 사람 사이의 인정을 베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가 그토록 료마에게 이끌리는 이유는 그의 이런 참으로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 아니었을까?그렇다면 료마의 여성관은 어떠했을까? 료마에게는 여성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꽤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이른바 세속의 염문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료마의 우수에 찬 듯한 서늘한 눈매와 따뜻한 가슴은 여자들의 이상형에 가까운 폭발제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오료와의 사랑, 에도치바 도장의 사나코와의 연정, 그리고 나가사키의 기생 오토모와의 애정 등이 있다. 그밖에 누이인 오토메를 비롯한 사카에 등과의 다채로운 사랑들이 그의 젊은 날 속에 숨어 있다.



그러면 여성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료마의 매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여성에 대한 료마의 태도에서 그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여성의 직업의 귀천을 가리기는커녕 지능의 정도, 용모의 미추, 그 밖의 모든 면에서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는 여성을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했다. 당시 봉건적인 사회 풍토 속에서 무사 출신이 그런 사고방식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내 오료와의 관계는 게이오 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료마가 교토 후시미의 데라다야에서 백명에 이르는 적들에게 포위됐을 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오료가 욕실에서 알몸으로 2층으로 올라와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해준 것에 의해 결정적으로 가까워졌다.



료마와 오료와의 일화 속에서 우리는 요즘의 신혼여행을 시도한 듯한 근대적인 감각과 여성과 자연스럽게 친구로 지내는 개방적인 성격 등을 료마에게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료마가 여성인 오료에게 보여준 따뜻함은 그가 혁명가이고 반골이었음에도 결코 반사회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인간적인 안도감을 느끼게 해준다. 바로 이런 점이 료마가 여성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료마는 이처럼 사람을 사랑하는데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 특히 여자들을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순수한 존재를 무엇보다 사랑했다는 뜻이며, 나아가 천하를 사랑하는 의미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았고 그 때문에 스스로의 생명도 단축한 사람이었다. 감히 비교해 보건대 그는 자신을 철저히 버리고 33년의 공생애를 산 예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육신을 온전히 바친 것이다.복안 사상은 잠자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뜻이다. 즉 복안 사상이라 함은 모순되는 좌우 눈을 통합 관리하는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료마만큼 복안 사상을 유지한 사람은 없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한쪽 눈과 손으로 다이세이 봉환을 추진하면서 다른 쪽 눈과 손으로 무력을 이용한 막부타도 계획을 추진한 것과 한쪽 손과 눈으론 권력에 접속하면서 다른 쪽 손과 눈으론 반권력과 연대한 점들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면 도저히 통일시키기 힘든 복잡한 문제인 것이다.

일반적으론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 일쑤다. 그러나 료마는 어떤 일을 추진하는 모토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제3의 길이 있음을 알아 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료마의 유연한 사고와 민첩한 행동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위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가 쉬웠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A와 B라는 양극단적으로 대립된 사고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료마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A극과 B극,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료마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굽히지 않고 유연한 사고와 민첩한 행동력에 의해 자신이 파생시킨 제3극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그것은 일본의 전통질서에서 벗어나 세계를 규모로 삼는 일본인의 생활환경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료마의 사상과 행동력은 부당하게 평가받고 차별당하며 소외당한 존재를 모두 해방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즉 도쿠가와 막부가 시행해 온 중농천상주의를 버리고 중상주의로 정책 전환을 하는 것에 그의 거대한 행동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료마는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위한 세력을 결집시켰다. 료마는 조정보다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존황양이보다 한 걸음 더 진전된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었다. 천황의 권위에 의한 통일국가 ->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항 -> 일본의 독립유지라는 것이 료마의 프로그램이었다. 료마에게 있어서 천황은 다만 구미열강에 대항하는 통일국가 형성을 위한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료마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가 막부의 봉건제를 먼저 타파하지않고서는 막강한 구미 열강에 맞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하다. 3백년 동안 이어져온 막부의 관료체제는 무력도 그야말로 무력하게 만드는 태평성대였다. 외국과의 교섭능력도 없었고 쇄국에 의해 만들어진 태평성세에서 소극적 통치만이 있을 뿐이었다. 난세에 대항하는 실력주의 정치체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그 새로운 정치기구가 국민공화제이고 양원제의 의회정치였다. 료마에게는 일본이라는 국가적 개념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막부의 파벌주의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서양식 의회정치를 그 누구보다도 먼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디지털 인간과 아날로그 인간이란 말이 있다. 인간의 대뇌 중 좌반구가 언어적, 분석적 운영체이고, 우반구가 음악적, 전체론적이라면 좌반구는 지적인 디지털형이고, 우반구는 전체를 파악하는데 뛰어난 아날로그형이 된다. 료마는 해운술 등의 디지털 기능에도 뛰어났지만 그 이상으로 아날로그 인간으로서의 자질도 갖추고 있었다.



료마는 신분이 낮은 향사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세계의 해양을 향해 자신의 꿈을 활짝 펼쳤다. 생활에 있어서도 봉건적인 기풍이 남아 있는 사회 안에서 오료와 신혼여행을 가는 등 근대적인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료마는 어떻게 이처럼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보낼 수 있었을까? 아마도 나름대로의 인간적인 비결이 있었을 것이다. 료마의 정신적 자유의 근원은 무욕(無慾)과 자기부정이었다. 자기부정이 있어야 비로소 창조가 있다는 것이다. 경제에서 말하는 스크립 앤드 빌드. 파괴가 있어야 건설이 있다는 원리의 정신적인 해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이세이 봉환 때 료마가 보여준 행동도 바로 이런 정신에서 연유한다. 다이세이 봉환 직후 료마가 내놓은 메이지 신정부의 각료 명부에는 료마 자신의 이름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묻자 료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끄는 해원대를 세계의 해원대로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료마의 무욕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사욕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료마는 창조적인 삶을 자유로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게이오 3년 11월 15일 찬바람이 부는 날, 료마는 나카오카, 도키치 등과 함께 순식간에 자객의 손에 쓰러졌다. 장소는 기름을 파는 가게인 오우미야. 가게 앞에는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당한 장소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료마가 그렸던 프로그램에 의한 다이세이 봉환은 이 사건이 발생하기 한달 정도 전에 실현되었다. 도사성의 입장에선 사쓰마성과 쵸슈성에 뒤쳐진 상황을 단번에 만회하여 유신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료마가 암살당하면서 유신은 다시 도사성의 손을 떠나 사쓰쵸 연합의 주도로 돌아갔다.



시대가 메이지대로 바뀐 뒤에도 정치와 사회의 격렬한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 시절 자유민권 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던 사카자키 시란은 유신에 있어서 료마의 역할에 주목, 『한혈천리구』라는 료마의 전기를 저술했다. 그는 료마를 자유민권운동에서 하나의 거성으로 받아들였다. 즉 료마의 대중화는 자유민권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료마의 사상은 료마가 죽은 후에도 독자적인 길을 밟고 있는 것이다.



후세를 살고 있는 우리가 료마를 평가할 때 그것은 곧 메이지 유신에 대한 평가라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료마를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사회를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도사의 맑은 가을 하늘처럼 사무치도록 그리운 인간 료마의 능력과 매력은 오래도록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 그는 언제 우리에게 다시 오는가?그렇기 때문에 료마는 성을 탈출하고 막부의 신하인 가쓰 가이슈를 만나 그의 심복으로 입문, 항해술을 배우게 된다. 탈성에 의해 료마의 사상과 행동은 엄청난 자유를 얻었다. 탈성은 그에게 새로운 출발이 돼주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탈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일본의 회사는 대부분 종신고용제를 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막부시대의 체제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회사에 귀속되어 있으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회사라는 작은 틀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계발하려면 회사의 입장과 동떨어진 관점을 가질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현대사회에서의 탈성은 사물에 대한 견해에만 그치지 않는다. 타부서로의 자리 이동이나 전근도 사상이나 행동을 자유롭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료마의 탈성을 통해서 적어도 사고의 전환 정도는 기꺼이 배워야 할 것이다.



과연 료마는 어떤 학설의 영향을 받았을까? 도쿠가와시대에 살았던 지식인들은 중국의 유교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료마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행동을 추정해 보면 아무래도 그가 노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의 말을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는 『영장비결』을 보면 묵자의 사상이 물씬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제 료마는 노자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자연당(自然堂)이라고까지 불렀다. 이런 점에서 료마의 도저한 허무주의를 느낄 수 있다.료마는 노자의 이런 사상에 가장 많이 이끌렸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이룩한 거대한 업적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이타주의, 즉 일종의 투철한 인도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다.2. 독창적인 인간관계를 확립한 료마3. 경제적 관점을 중시한 료마마침내 가이슈의 손을 벗어난 료마. 그는 정치적 입장을 독자적으로 확립시켜 나갔다. 그는 천부적인 육감과 정보에 의지해 다가오는 근대자본주의 경제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군함과 무기에 의지했으며 막부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회사에 의지하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료마는 경제적 기반을 확립했기에 사상과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선 상업을 천시하는 기풍이 있었다. 따라서 무사가 장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료마는 스스로 의식의 장벽을 과감히 허물고 미래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이런 독창적인 길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료마의 입장에서 상식은 그럴듯해 보이는 마음의 장벽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스스로 그 상식을 몸소 경험한 뒤에 그 틀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곧 그 속에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실증적 정신은 단선적인 무사의 정신이 아니라 복합적인 상인의 정신이었다. "상식적 경험을 독창적인 비약의 토대로 삼는다." 이것이 곧 료마의 행동철학이었다.사카모토 료마. 그는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고 말했다. 즉 료마는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자신의 말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 개혁해 나갔다. 자기변화와 개혁은 끝없는 탈피 행위다. 료마는 어제의 자신에게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았고, 그것을 버린다고 해서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연속성이 있는 탈피정신이 료마를 료마답게 만들어 주었다.



료마의 생애를 구분하는 네 가지 시기는 '탈피 이야기'와 부합시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제1 시기에 해당하는 검술시대. 당시 무사들이 일본을 지키기 위해 무술수행에 힘쓴 것처럼 료마도 끊임없이 검술을 수행했다. 제2 시기인 단검시대는 암살시대다. 대투옥의 실행자인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을 당하자 일본은 과격주의를 경험하게된다. 이 때 이른바 탈성(脫城)이라는 형식에 의해 지사로 불리는 계층이 탄생했다. 료마도 이때 도사성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지사가 되었다. 제3 시기는 외국의 무기와 문명에 놀라고 당황하던 시대다. 이어 찾아온 제4 시기는 이런 고뇌들을 총괄한 형식으로 새로운 일본국의 모색과 구상이 논의되는 시기였다.



료마의 일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장대한 발상은 독창적이라기보단 대부분 다른 사람의 사고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료마는 독창적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응용형 인간이었다. 우수한 인재들을 만나는 것에 의해 료마의 발상은 연마됐던 것이다. 유연한 사고력을 갖게 해준 것에는 그의 제3위 신분도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의 가문은 도사의 쵸닌향사였다. 쵸닌향사는 상인임과 동시에 무사라는 뜻이다. 쵸닌향사의 가문에 태어났다는 것은 료마의 인간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바로 경제를 중시하는 사회적 견해를 지니게 되었고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누렸다는 점을 통해 드러난다.



료마는 가에이 6년 3월, 19세의 나이로 에도로 향했다. 오케쵸의 치바 도장에서 열심히 검술을 수행한 료마는 나날이 실력이 향상되어 안세이 5년 정월에 수료증을 취득했다. 그러나 료마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사상에 눈을 떴다. 료마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것은 이후에 발생한 이이 나오스케 암살사건과 좌막파의 리더격인 다케치 즈이잔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던 것이다.



료마가 탈성, 즉 성을 탈출한 것은 분큐 2년 3월 24일, 그의 나이 28세때였다. 당시의 탈성은 중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료마는 그런 희생까지 각오하고 왜 성을 탈출한 것일까? 막부 말기에 성을 탈출한 자가 밟게 되는 전형적인 길은 직업적인 테러나 거병이었다. 그러나 료마의 탈성은 처음부터 목적이 달랐다. 테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곳으로 비상하려는 자의 몸짓이었던 것이다.료마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활방식의 비결 중에 무욕과 자기부정의 정신이 있다. 달리 표현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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