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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

도몬 후유지 지음 | 지식여행
1. 변화와 개혁을 위한 토양을 구축한 료마



사카모토 료마. 그는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고 말했다. 즉 료마는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자신의 말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 개혁해 나갔다. 자기변화와 개혁은 끝없는 탈피 행위다. 료마는 어제의 자신에게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았고, 그것을 버린다고 해서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연속성이 있는 탈피정신이 료마를 료마답게 만들어 주었다.

료마의 생애를 구분하는 네 가지 시기는 '탈피 이야기'와 부합시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제1 시기에 해당하는 검술시대. 당시 무사들이 일본을 지키기 위해 무술수행에 힘쓴 것처럼 료마도 끊임없이 검술을 수행했다. 제2 시기인 단검시대는 암살시대다. 대투옥의 실행자인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을 당하자 일본은 과격주의를 경험하게된다. 이 때 이른바 탈성(脫城)이라는 형식에 의해 지사로 불리는 계층이 탄생했다. 료마도 이때 도사성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지사가 되었다. 제3 시기는 외국의 무기와 문명에 놀라고 당황하던 시대다. 이어 찾아온 제4 시기는 이런 고뇌들을 총괄한 형식으로 새로운 일본국의 모색과 구상이 논의되는 시기였다.

료마의 일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장대한 발상은 독창적이라기보단 대부분 다른 사람의 사고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료마는 독창적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응용형 인간이었다. 우수한 인재들을 만나는 것에 의해 료마의 발상은 연마됐던 것이다. 유연한 사고력을 갖게 해준 것에는 그의 제3위 신분도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의 가문은 도사의 쵸닌향사였다. 쵸닌향사는 상인임과 동시에 무사라는 뜻이다. 쵸닌향사의 가문에 태어났다는 것은 료마의 인간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바로 경제를 중시하는 사회적 견해를 지니게 되었고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누렸다는 점을 통해 드러난다. 료마는 가에이 6년 3월, 19세의 나이로 에도로 향했다. 오케쵸의 치바 도장에서 열심히 검술을 수행한 료마는 나날이 실력이 향상되어 안세이 5년 정월에 수료증을 취득했다. 그러나 료마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사상에 눈을 떴다. 료마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것은 이후에 발생한 이이 나오스케 암살사건과 좌막파의 리더격인 다케치 즈이잔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던 것이다. 료마가 탈성, 즉 성을 탈출한 것은 분큐 2년 3월 24일, 그의 나이 28세때였다. 당시의 탈성은 중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료마는 그런 희생까지 각오하고 왜 성을 탈출한 것일까? 막부 말기에 성을 탈출한 자가 밟게 되는 전형적인 길은 직업적인 테러나 거병이었다. 그러나 료마의 탈성은 처음부터 목적이 달랐다. 테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곳으로 비상하려는 자의 몸짓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료마는 성을 탈출하고 막부의 신하인 가쓰 가이슈를 만나 그의 심복으로 입문, 항해술을 배우게 된다. 탈성에 의해 료마의 사상과 행동은 엄청난 자유를 얻었다. 탈성은 그에게 새로운 출발이 돼주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탈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일본의 회사는 대부분 종신고용제를 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막부시대의 체제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회사에 귀속되어 있으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회사라는 작은 틀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계발하려면 회사의 입장과 동떨어진 관점을 가질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현대사회에서의 탈성은 사물에 대한 견해에만 그치지 않는다. 타부서로의 자리 이동이나 전근도 사상이나 행동을 자유롭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료마의 탈성을 통해서 적어도 사고의 전환 정도는 기꺼이 배워야 할 것이다.

과연 료마는 어떤 학설의 영향을 받았을까? 도쿠가와시대에 살았던 지식인들은 중국의 유교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료마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행동을 추정해 보면 아무래도 그가 노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의 말을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는 『영장비결』을 보면 묵자의 사상이 물씬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제 료마는 노자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자연당(自然堂)이라고까지 불렀다. 이런 점에서 료마의 도저한 허무주의를 느낄 수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인간은 무 또는 공안에 존재해야 비로소 그 존재의 의의를 가질 수 있다. 나는 그 공이 될 것이다."

료마는 노자의 이런 사상에 가장 많이 이끌렸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이룩한 거대한 업적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이타주의, 즉 일종의 투철한 인도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다.

2. 독창적인 인간관계를 확립한 료마



료마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활방식의 비결 중에 무욕과 자기부정의 정신이 있다. 달리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의 평가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또는 다른 사람의 평가엔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 료마는 다른 사람의 평가따위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낱 유랑자의 신분이면서도 가쓰라, 사이고 등 각 성의 실력자들을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었다. 게이오 3년, 료마가 고토 쇼지로에게 제시한 선중 팔책의 경우에도 료 마는 자기가 만든 것이라는 식으로 자만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구구한 평가를 기대하지않았기에 자유로웠던 료마였지만 단 한사람 자신의 존재와 궤적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혈육의 누이, 오토메다.

한낱 하류층 유랑 무사이면서도 한때 정국의 주도권을 움켜쥐고 있던 료마의 이미지에서 피비린내나는 권모술수의 어두운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밝은 바다와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서 엿보이는 천진난만한 명랑함 때문일 것이다. 료마는 자신의 행위를 기억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정신적 지주인 누이 오토메 가슴 속에 숨겨 두었을 것이다. 즉 료마의 마음이 평생 흐트러지는 일 없이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토메라는 의지의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료마가 세계의 바다로 눈을 돌린 계기가 된 것은 같은 고향의 무사인 가와다 쇼류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그리고 해양에 대한 원대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가쓰 가이슈 덕분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해도 시기와 인재를 얻지 못하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 반대로 천재와 천재가 만나게되면 두 사람의 재능은 상호보완적으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켜 그 꿈을 대중 앞에서 실현시킨다. 가이슈와 료마는 바로 그런 천재들이었다. 료마가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에 둘도 없는 군사학자 가쓰 가이슈 대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자신감에 가득차 생활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다. 가쓰 가이슈는 일찍이 미국을 방문하여 근대자본주의 국가의 실상을 파악하고 일본의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피부를 통해 현실적으로 간파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외정세를 꿰뚫어 본 결과 고베 해군 조련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고베 해군 조련소는 요즘과 비교하면 국립 해군대학이라 말할 수 있는 곳이다. 소장인 가이슈의 방침에 따라 생도들은 신분의 차별이 전혀 없었고, 료마를 비롯한 성을 탈출한 인재들을 입교시켰다. 가이슈는 청년들의 순수한 에너지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가 해군 조련소를 만든 것은 일본의 국력증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함이었다. 료마는 가이슈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했다.그리고 가이슈의 추천을 받아 고베 해군 조련소의 사감이 되었다. 이 고베 해군 조련소는 일본 민족의 에너지를 통일시키겠다는 자세로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당을 이루어 존황양이를 부르짖으며 가능성 없는 칼과 총으로 대포와 소총을 상대하는 단순한 발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화롭게 항구를 개방하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의미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료마는 진정한 현실주의자, 또는 실증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군 조련소는 불과 몇 개월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가이슈의 좌절은 그를 믿고 따르는 료마의 좌절이기도 했다. 그 이후 다시 일어난 료마의 해군은 초슈, 도사 각성과 교류하면서 군사상사로서 독립하여 가메야마샤추, 해원대라는 가시밭길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그것은 곧 료마가 가이슈의 품안에서 벗어나 막부와 성을 초월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해원대라는 군사상사를 경영하게 된 료마는 경제, 재정운영의 성패가 새로운 정부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열강의 간섭에 대해 일본을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지, 료마가 이상으로 생각해온 자유로운 사회를 실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었다. 지금 고베에는 닻 모양을 한 조련소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돌비석에 기록되어 있듯이 고베항은 천연의 요충지다. 조련소는 폐쇄되었지만 가이슈와 료마의 해양에 건 꿈은 그 후로도 부풀어 올라 국제적인 항구로서 우리 앞에 남겨진 것이다.

3. 경제적 관점을 중시한 료마



우리의 예측과는 달리 료마는 오히려 경제를 더 중시한 듯하다. 즉 료마에게 있어서 도막투쟁은 정치투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제투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한다면 당시의 막부가 독점하고 있던 무역권을 모든 성이 탈취하려는 투쟁이었다. 료마는 막부가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역권이 일본의 각 성에 나누어지지 않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졌다. 따라서 료마의 도막투쟁은 이 무역권(경제권력)을 도쿠가와 막부의 독점상태에서 빼앗아 해체, 재편성하는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료마의 도막투쟁은 막부의 경제 독점권을 해체시켜 각 성에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고베 해군 조련소가 폐쇄된 것은 가쓰 가이슈뿐 아니라 사감인 료마의 입장에서도 엄청난 타격이었다. 유랑자인 료마는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거리를 방황해야 할 형편에 놓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신변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즈음 막부는 유랑자 사냥에 광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엔 하나의 예정된 법칙이 있었다. 그것은 정권의 하강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거대한 파도도 몰아치고 작은 물결도 일어난다. 막부 말기도 그러한 상황이었다. 거대한 파도는 일본의 혁신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작은 물결은 보수와 혁신 사이를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 거대한 물결은 정치권력적으로 보면 도막, 근왕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봉건 영주제에서 근대자본주의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료마는 상식적 경험을 독창적 비약의 토대로 삼았다. 그것은 곧 고베 해군 조련소의 폐쇄라는 재앙을 활용하여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만든 료마의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막부의 유랑자 사냥을 피해 사쓰마성으로 들어왔지만 단순한 식객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그 동안의 선박과 관련되어 축적된 해양지식을 활용하여 대외적으로 자주적인 비즈니스를 전개했다. 더구나 그것을 기초로 해외와 상거래를 하고, 가메야마샤추가 회사로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을 기반으로 료마가 정치가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이 시기 료마를 둘러싼 특징적인 상황 변화였다.

마침내 가이슈의 손을 벗어난 료마. 그는 정치적 입장을 독자적으로 확립시켜 나갔다. 그는 천부적인 육감과 정보에 의지해 다가오는 근대자본주의 경제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군함과 무기에 의지했으며 막부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회사에 의지하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료마는 경제적 기반을 확립했기에 사상과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선 상업을 천시하는 기풍이 있었다. 따라서 무사가 장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료마는 스스로 의식의 장벽을 과감히 허물고 미래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이런 독창적인 길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료마의 입장에서 상식은 그럴듯해 보이는 마음의 장벽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스스로 그 상식을 몸소 경험한 뒤에 그 틀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곧 그 속에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실증적 정신은 단선적인 무사의 정신이 아니라 복합적인 상인의 정신이었다. "상식적 경험을 독창적인 비약의 토대로 삼는다." 이것이 곧 료마의 행동철학이었다.

4. 자신의 매력을 스스로 만들어 낸 료마



료마는 대부분 자신의 자본 없이 다른 사람의 자본으로 몇 가지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다. 과연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그의 독창적인 인간관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중시하고, 만나는 사람을 선별한다. 곧 일류 인물만을 만난 것이다. 그는 사회의 인맥설정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상황에 따라 사람을 버릴 수도 있는 비정한 속내를 지닌 사람이었다. 또한 료마는 언변도 뛰어났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데도 진지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료마를 상대하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료마는 증폭시켜 자신의 것으로 실현시켰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 료마에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료마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 속엔 언제나 시민 정신이 흐르고 있었으며, 에너지가 넘쳐났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와 개혁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으로부터 탈피를 모색했다. 오만한 듯 보이지만 실제론 매우 겸허하고, 휴머니즘을 관철시킨 료마. 이런 매력들이 료마의 인간상을 당시의 일본인들로부터 동떨어진 위치에서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더구나 료마의 겸허함은 형식적인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겸허함이었다. 그가 한낱 유랑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베 해군 조련소의 사감이 되고, 선중팔책을 근거로 다이세이 봉환을 실현시키는 등 한 사람의 행위로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업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정책 현안에 대한 탁월한 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료마가 갖추고 있는 인간적인 매력이 강력한 무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료마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일화는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혁명가들이 흔하게 가지기 쉬운 오만은 찾을 수 없었고 그 일생은 소박한 휴머니즘과 인간애로 관철되어 있었다. 즉 상식의 산물인 사람 사이의 인정을 베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가 그토록 료마에게 이끌리는 이유는 그의 이런 참으로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료마의 여성관은 어떠했을까? 료마에게는 여성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꽤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이른바 세속의 염문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료마의 우수에 찬 듯한 서늘한 눈매와 따뜻한 가슴은 여자들의 이상형에 가까운 폭발제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오료와의 사랑, 에도치바 도장의 사나코와의 연정, 그리고 나가사키의 기생 오토모와의 애정 등이 있다. 그밖에 누이인 오토메를 비롯한 사카에 등과의 다채로운 사랑들이 그의 젊은 날 속에 숨어 있다. 그러면 여성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료마의 매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여성에 대한 료마의 태도에서 그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여성의 직업의 귀천을 가리기는커녕 지능의 정도, 용모의 미추, 그 밖의 모든 면에서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는 여성을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했다. 당시 봉건적인 사회 풍토 속에서 무사 출신이 그런 사고방식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내 오료와의 관계는 게이오 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료마가 교토 후시미의 데라다야에서 백명에 이르는 적들에게 포위됐을 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오료가 욕실에서 알몸으로 2층으로 올라와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해준 것에 의해 결정적으로 가까워졌다. 료마와 오료와의 일화 속에서 우리는 요즘의 신혼여행을 시도한 듯한 근대적인 감각과 여성과 자연스럽게 친구로 지내는 개방적인 성격 등을 료마에게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료마가 여성인 오료에게 보여준 따뜻함은 그가 혁명가이고 반골이었음에도 결코 반사회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인간적인 안도감을 느끼게 해준다. 바로 이런 점이 료마가 여성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료마는 이처럼 사람을 사랑하는데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 특히 여자들을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순수한 존재를 무엇보다 사랑했다는 뜻이며, 나아가 천하를 사랑하는 의미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았고 그 때문에 스스로의 생명도 단축한 사람이었다. 감히 비교해 보건대 그는 자신을 철저히 버리고 33년의 공생애를 산 예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육신을 온전히 바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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