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대통령의 7가지 리더십
데이비드 거겐 지음 | 스테디북
버나드 맬라머드는 언젠가 한 야구선수의 이야기를 다룬 『내추럴(The Natural)』이라는 소설을 썼다. 그 책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했던 영화는 수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물 흐르듯이 세상을 살아가며 팀 동료들처럼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지만 영화가 절정에 이른 순간 통쾌한 장외 홈런을 터뜨린다. 역대의 다른 대통령들과 확연하게 비교될 수 있는 그 같은 본능과 직관을 타고났던 테오도어 루즈벨트나 프랭클린 루즈벨트처럼 로널드 레이건은 정치에 있어서 바로 그런 내추럴(타고난 천재)이었다. 두 명의 루즈벨트처럼 레이건도 남들 눈에는 어려워 보이는 일들조차도 쉽게 처리하는 마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레이건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세부적인 아주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몽상적이거나 부주의한 경향이 있어서 드라마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는 또한 1920년대 이래 정책 자체에 대해 가장 무관심한 대통령이었다. 일상 업무에서는 참모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너무 컸고, 그 때문에 결국 큰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균형감각을 가진 연구자라면 그의 정책에 대해 찬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가 아주 유능한 대통령이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내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로 백악관의 가장 탁월한 리더를 꼽는다면 단연 레이건이다. 지도자의 척도는 얼마나 많은 흔적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신경제를 도입한 대통령, 냉전 종식에 기여했던 대통령, 정부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이 나라의 태도를 변화시킨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로 그처럼 긴 흔적을 남긴 대통령이 레이건 외에 누가 있었겠는가?3월 초, 그가 대통령 집무실을 차지한 지 여덟 주가 안 되어 우리는 레이건의 입지가 급격하게 약화되기 시작했음을 감지했다. 아무리 그 같은 상황을 막으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허니문 기간이 끝나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1981년 3월 30일 그에게 결정적인 전기가 찾아왔다. 이 결정적인 순간은 레이건 정권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그날 오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몇 블록 정도 떨어진 워싱턴의 힐튼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다는 소식이 백악관으로 날아왔다. 세계의 모든 언론들은 그 사건이 발생하고 몇 분 안 되어 일제히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동시에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것이다.
비밀검찰부 요원 제리 파의 몸 아래 숨은 채로 대통령 전용 리무진을 타고 쏜살같이 조지 워싱턴 병원으로 후송되는 동안 레이건 자신도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가벼운 상처를 입어 갈비뼈가 약간 아픈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레이건은 자동차에서 나오면서 수행원들의 부축을 뿌리쳤고 본능적으로 상의 단추를 잠갔다. 그런 그의 모습은 대통령으로서의 감각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는 한 흐트러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나서 병원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쓰러지고 말았다. 총알이 심장 바로 옆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레이건은 물 흐르는 듯한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그는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의사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당신이 철저한 공화당이길 바라오." 또한 아내 낸시에게는 "허니, 내가 고개 숙이는 법을 잊어버려서 총을 맞았나 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레이건 정권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국민들은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레이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전과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근로 계층의 사람들에게 이제 그는 총탄 세례까지 받은 대통령으로 인식되었고, 국민들은 그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는 국민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정책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심지어는 당장 몇 달 후에 경기침체가 찾아와 국민들 사이에 부정적인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조차도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헤밍웨이식으로 표현하여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보여 준 대통령이라는 그의 새로운 명성을 손상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임 후 첫 7개월 동안 그는 말보다는 행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굳혔다. 국민들에게 일관성과 힘이 있는 고아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점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내적인 강인함을 갖고 있었으며, 국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용기가 있었고, 그의 말과 행동은 엄격한 원칙을 고수했다. 따라서 신념을 가진 지도자로 비춰질 수 있었으며,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대부분 성공한 지도자들처럼 레이건도 집권 전에 이미 핵심적인 신념체계를 발전시켰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지만 수십 년간의 광포한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 같은 신념체계를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진부하고 단순한 체계였지만 레이건은 여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신념을 갖고 있고, 그 신념을 고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최종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은 유연하게 바꿀 수 있지만 지도자는 궁극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반드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레이건 또한 집권기간 8년 동안 잠시 노선을 바꾸기도 했지만 항상 확고한 방향성을 유지했다.
레이건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선택받은 나라다. 둘째, 미국은 일등이어야 한다. 이등은 허용될 수 없고, 어느 나라에게도 뒤져서는 안 된다. 일등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미국의 힘만이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 넷째, 미국은 국민들이 노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을 때, 즉 최대의 자유를 보장받을 때 비로소 강해진다. 다섯째, 미국의 실험은 개인의 자유와 전통적인 가치의 배양이라는 두 가지에 의지하고 있었다. 레이건 역시 어린 시절부터 그 같은 가치를 호흡하며 자랐으며, 줄곧 그런 가치들을 고수해 왔다. 그렇지만 그런 가치들은 현대 사회의 삶에 의해 얼마나 많이 파괴되고 있는가? 그는 그 같은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레이건의 핵심적인 사상을 요약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들이 너무 친숙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1970년대 후반기의 관점에서 미국인들은 광포한 군중들에게 지쳤으며, 전통적인 가치의 회복을 열망하고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레이건은 그 같은 시대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대변해 주었다. 나아가 자신의 믿음을 일관되게 견지함으로써 사람들은 레이건 자체가 그 자신의 신념과 동의어라고 믿게 되었다. 사상과 개성이 융화됨으로써 지도자로서는 더없이 강력한 무기를 얻었던 것이다.클린턴은 자신의 약점에서 영구적인 선거전 체계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윤리적 실책에 대해, 그리고 회피를 위해서도 거짓말을 했다. 기사의 사전조율에 대한 의존까지 더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일관된 맥락이 클린턴 시대를 관통해 왔다. 그것은 1998년 클린턴의 도덕적 권위가 붕괴됨으로써 끝이 났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관계와 뒤이은 거짓말들이 들통남으로써 지도력과 명분이 추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의회와 언론을 비롯한 다른 권력 중심으로부터 표출된 분노의 폭발은 또한 여러 해 동안 축적되어 왔던 강력한 반발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클린턴을 지지했고, 집권 2기의 클린턴에 대한 지지율은 심지어 레이건을 능가했지만 벨트웨이 사람들은 그에게 넌더리를 쳤다.
1960년대에 노이스탯이 했던 말이 정곡을 찌른다. 대통령의 힘은 대중적인 인기와 그리고 전문가적인 명성에 의존한다는 것. 통치를 하기 위해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하지만 또한 반드시 워싱턴 정가에서 명성을 얻어야 한다. 클린턴은 한 가지는 성취했지만 다른 한 가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럼으로써 지도력을 상실한 것이다.
워싱턴 바깥에 사는 사람들은 워싱턴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쉽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반드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워싱턴에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일련의 이상을 갖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하거나 간에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또한 워싱턴은 본질적으로 한 마을이나 다름없으며, 단 하나의 기관, 즉 백악관만이 그 중심 광장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워싱턴 사람들은 자녀들이 자신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만큼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영예로운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새로 온 사람들이 터줏대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그들의 규칙을 깨려고 한다면 설사 그가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클린턴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다. 1998년 샐리 퀸이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했던 한 편의 기사는 클린턴 부부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테지만 이러한 워싱턴의 정서를 잘 포착했다.
그녀가 인터뷰를 했던 백 명의 워싱턴 사람들 중에 백악관 출입기자단 대표인 데이비드 브로더는 이렇게 말했다. "클린턴은 이곳에 와서 그 자리를 망쳤고, 이곳은 그가 있을 곳이 아니다." 국내 정치에 대해 클린턴에게 자문을 했으며, 널리 명성이 알려진 교수 출신의 빌 갤스턴은 또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 사람들의 대부분은 존경할만한 사람들이며,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 이들은 클린턴의 행동이 지극히 정상이고, 모든 워싱턴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비춰진다는 것은 평생 동안 갖고 있던 영예로운 공직생활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이 더렵혀지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여기에 더해 나는 워싱턴의 규칙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둥지를 더럽히지 말라."케슬린 홀 제이미슨은 『전자시대의 웅변』이라는 책에서 당시에 내가 주목하지 못했던 레이건의 연설 내용을 크게 부각시켰다. 사실 오늘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공동체적인 경험은 대부분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서 보는 시각적인 영상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레이건은 자신의 연설 속에서 그런 공통의 시각적 경험을 불러 내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 경험들을 다시 삶에 적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가미시켰다. 공보보좌관이었던 나는 레이건이 스크린에 나오는 스토리를 즐겨 얘기하는 것은 그의 배경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리고 제이슨의 분석을 접하고 나서야 나는 그 같은 접근법이 갖는 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해석의 달인으로 거대한 사건의 의미를 대중적인 의식에 맞추어 훌륭하게 재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가장 통렬한 예는 챌린저호 사건이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1986년 1월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발사된 직후에 공중 폭발했다. 탑승자는 여섯 명의 미국인과 우주비행을 위해 선발된 최초의 학교 선생님 크리스타 맥올리프였다. 맥올리프는 아이들을 위해 "인간적인" 우주를 만들고 싶어했고, CBS와 「뉴욕타임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40%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생중계로 발사 장면을 시청했다고 한다. 전례 없이 생생한 화면으로 포착되었던 폭발 장면은 강력한 국민적인 슬픔을 촉발시켰다. 이에 레이건은 최고의 연설문 집필 보좌관이었던 페기 누넨과 함께 난국을 수습해 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어린 학생들을 위로해 주어야 했다.그의 정권을 돌이켜 보건대 클린턴은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일찍 대권을 얻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결심하고 내 집으로 전화를 걸었던 1991년 어느 날 밤, 그의 목소리는 결코 승리에 대한 확신에 차있지 않았다. 그 당시 클린턴의 계산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1992년에 있을 선거는 워밍업에 불과하고 먼 길을 가기 위한 티켓을 얻고 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았던 것은 확실하다. 틀림없이 그는 마리오 쿠오모가 민주당 후보지명전에 가세하면 쿠오모가 근소한 차로 승리를 하여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이고 최종 선거에서 부시에게 패배할 것이다. 그런 다음 1996년 선거전에서는 그 결과를 토대로 이런 논리를 구성했다. 먼데일과 마이클 듀카키스, 쿠오모, 이 세 사람의 후보가 구시대의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민주당을 연패로 몰고 간다. 이쯤 되면 신민주당 시대가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이미 공화당 대통령에 싫증이 났을 테고 그러면 자신이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되면서 국민들에게 구체적인 정치일정을 승인받을 수 있다.
그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훨씬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996년까지 클린턴은 내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4년이라는 시간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보다 튼튼한 지반 위에 설 수 있었을 테고 보다 자제력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며, 벼랑 끝으로 걸어 가려는 충동도 훨씬 잦아들었을 것이다. 아마 힐러리와의 관계도 훨씬 균형 있는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들의 사생활이 공적인 활동에 미치는 파멸적인 영향력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그는 대통령의 권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더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1996년 아서 슐레진저는 부친이 시작했던 전통에 따라 32명의 동료 역사학자들에 대한 설문을 바탕으로 역대 대통령에 대한 점수를 매겼다. 워싱턴과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또 다시 수위를 달렸으며 제퍼슨과 잭슨, 포크, 테오도어 루즈벨트, 윌슨, 트루먼은 "위대함에 근접한 대통령"으로 간주되었다. 놀라운 점은 트루먼 이후로 대통령들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트루먼의 뒤를 이은 세 사람의 후임자들,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존은 고작해야 "중상위" 점수를 기록했다. 그 후로 나머지 여섯 명의 대통령은 중하위를 기록했다. 포드와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은 "평균 이하"의 점수를 기록했고, 닉슨은 "실패자"로 낙인찍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왜 우리는 최근의 대통령들로부터 리더십에 관한 교훈을 얻어야 할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하나의 나라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훨씬 고단한 일이 되었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무한히 많아졌지만 행동의 폭은 훨씬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백악관은 세계에서 최소한 여섯 군데 이상의 분쟁지역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하고, 세계 경제의 원활한 흐름을 도와야 하며, 나아가 테러와 폭력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뭔가가 잘못될라 치면 굶주린 언론들의 무자비한 추적이 시작된다. 또한 의회의 당파주의자들은 내각의 각료들을 줄줄이 의사당으로 호출할 것이다. 게다가 로비스트들은 대중적인 캠페인을 조직하여 대통령의 행동을 막기 위해 수백만 달러의 돈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현대의 대통령들을 연구해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떤 정책적 목표가 효력을 발휘했고, 어떤 정책이 실패했으며, 그 후임자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 내야 하는 것이다.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를 정복하는 필수적인 요건이기 때문이다.① 리더십은 안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난 30년 동안 가장 재능 있는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리처드 닉슨과 빌 클린턴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남달리 총명했으며 풍부한 독서를 했고 정치적 감각이 가장 탁월했던 인물들이었다. 또한 두 사람은 똑같이 권력을 만끽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자기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장본인이었다. 닉슨은 자기 안의 악마를 밖으로 불러 냈으며, 클린턴은 스스로 인격의 도덕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세상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부단한 자기 관리를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