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경영하라
도몬 후유지 지음 | 경영정신
친화경영 - 호조 소운 (1432-1519)호조 소운은 '국도(나라를 훔친 도둑)' 또는 '효웅(사납고 용맹스러운 영웅)'으로 불렸던 인물로서 지역적 기반이나 간판 없이 맨주먹으로 다이묘에 올랐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백성을 위하는 애민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전국시대에 다이묘(넓은 영지를 소유한 무사)가 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슈고(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의 직명으로 각 지방의 경비, 치안유지를 담당했으나 뒤에 강대해져 영주화됨), 슈고다이(슈고가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대신 사무를 본 사람, 슈고의 대리), 또는 가로(다이묘, 쇼묘, 슈고 등의 중신으로 집안 일을 총괄한 직책, 가신 중의 우두머리), 지토(중세의 장원에서 조세 징수, 군역, 수호신등을 맡았던 관리자) 등 무로마치 막부의 상, 하급 지방 관료들이 득세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무런 신분적 배경도 없이 거의 빈손으로 전국 시대 다이묘가 된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사이토 도산과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호조 소운이 그들이다. 아무런 지지 기반이 없는 인물이 갑자기 다이묘가 되었을 이유는 없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이 능력은 자신들이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세 가지 조건, 즉 '천시(天時 - 하늘이 내려준 시기)', '지리(地利 - 지리적 요건)', '인화(人和 - 인간적 배경)'를 확보하게 도와주었을 것이다.
호조 소운은 '국도', 즉 나라를 훔친 도둑으로 묘사되곤 한다. 나라를 훔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어느 지역의 주민과 토지, 그리고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을 송두리째 훔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호조 소운의 정치적 이념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그는 "농민을 위한 정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편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직접 농지를 경작하는 농민이라고 생각했고, 생산을 관리하는 농민이야말로 최대의 아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그의 애민정치를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살펴보자. '이즈'에 '호리고에'라는 아시카가 가문의 친족이 있었는데 그는 농민에게는 폭압적인 정치를 자행했으며, 스스로는 사치와 유흥에 빠져있던 원성이 자자한 영주였다. 소운은 이 점에 착안하고 농민을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농민이 적으로 여기는 적을 제거하면 자신의 인기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병사를 이끌고 호리고에를 급습, 살해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농민들은 소운 역시 호리고에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줄 떠돌이 출신의 사내라고 여기고 모두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젊은이들이 떠난 마을에는 병들고 늙은 노인들만이 남았는데 소운은 병사들을 시켜 그 늙은 환자들을 정성껏 간호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자신은 직접 산으로 올라가 약으로 쓰일 만한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질병이 치유된 노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소운의 덕을 칭찬했고 이윽고 산으로 도망친 젊은이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소운은 연소자와 연장자, 여성을 존중하고, 비폭력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담은 푯말을 마을 입구에 세웠다. 마을 사람들은 기대감에 사로잡혔고, 실제로 소운은 푯말에 쓴 내용대로 마을을 경영했다. 뒷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소운이 다스리던 영지가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고 한탄하기까지 했다.
고대 중국의 '봉래사상'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던 소운은 현대인들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가지고 평화와 풍요가 넘치는 이상향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진취적인 정치가였다.
"사람 각자가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가치관에 자신감을 가지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인 정을 받음으로써 사회전체가 향상되어 간다. 그 속에서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간다."
심리경영 - 오타 도칸 (1432-1486)오타 도칸은 에도 성을 축성한 인물이다. 뒤늦게 배운 한시를 전술에 적용하여 전투를 승 리로 이끌 정도로 총명하고 영리했다. 탁월한 판단력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그에게 위협과 질투를 느낀 주군 사다마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에 차있던 소년이었다. 그의 아버지 스케키요는 아들의 거만한 태도를 고쳐주기 위해 사찰에 보내기도 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어느 날 도칸의 아버지는 아들의 거만함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종이에 글을 써서 도칸의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교만한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아버지는 도칸이 이 글을 보면 어느 정도 마음을 고쳐먹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외출에서 돌아온 도칸은 책상 앞에 붙어있던 글을 보고 미소를 짓더니 붓을 들어 몇 글자 덧붙이기 시작했다. "교만하지 못한 자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 후 아버지는 자신도 도칸에게 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들의 거만함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러나 도칸은 나중에 자신의 재능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 일을 겪게 된다.
에도 성의 주인이 된 도칸은 시와 풍류도 함께 즐기라는 측근들의 충고를 무시한 채, 오로지 무술과 전략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사냥을 즐기던 어느 날, 도중에 비를 만난 도칸은 근처 농가의 처마 밑으로 들어가 젊은 여자에게 비옷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잠시 후 그 젊은 여자는 매화 나뭇가지를 들고 나오더니 그 매화가지를 도칸에게 건넸다. 도칸은 그 젊은 여자를 정신병자 정도로 생각하고는 그대로 비를 맞으며 귀가를 서둘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도칸의 측근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농가의 처녀가 옛 시를 잘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옛 시에, '백화가 만발해도 매화 열매 하나 여물지 않는구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도롱이를 '미노'라 하고 열매를 '미'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백화가 만발해도'를 '다른 집에는 흔한 도롱이'에 비유한 것이고, '매화 열매(미) 하나 여물지 않는구나'를 '우리 집은 도롱이(미노) 하나 없다.'에 비유한 것이지요. 즉 다른 집에는 흔한 도롱이가 우리 집에는 없으니 정말 죄송하다는 뜻이지요. 옛 시를 인용하여 집안 사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도칸은 자신의 무지함을 깊이 반성하고 시(詩)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와 고전문학을 두루 섭렵한 그는 유머와 풍류로서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천을 읊은 시(詩)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를 읽고 있는 문학을 실무와 전투에 그대로 응용했다.
취미로 익힌 시의 폭과 깊이를 실무에 응용하던 뛰어난 리더 도칸은 그의 군주 사다마사에게는 큰 호감을 얻지 못했다. 사다마사는 도칸의 명성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살해했다. 사다마사를 믿지 말라는 부하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도칸은 욕조에서 기습을 당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 자신의 영리한 머리만 믿고 거만을 부리던 태도를 완전히 고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의경영 - 구로다 조스이 (1546-1604)이에야스도 경계한 히데요시의 참모. 젊은 시절 감각적인 판단으로 지적을 받은 적이 많 았으나, 후에는 부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아들 나가사마에게 정권을 이임한 후, 일부러 중신들과 충돌해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아들의 권력기반을 다져주는 치밀 함을 보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로부터 감각에 의한 결단 때문에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받았던 구로다 조스이는 '부젠성'을 인수받았다. 정보가 가지고 있는 힘을 굳게 신뢰하고 있던 그는 정보 특급 시스템을 설치했는데, '규슈'와 '아사카'의 중간 지점인 '가미노세키'에 기지를 두고 그대로 나카쓰 성으로 정보가 흘러오도록 시스템을 확립한 것이다. 조스이는 이 시스템을 기반으로 중앙의 신선한 정보를 마음놓고 확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오사카 성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주위의 다이묘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죽으면 후계자가 누가 될 것 같은지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예상하고 있던 인물들을 거론하기 시작했는데 막상 히데요시는 구로다 조스이를 지목하며 그가 자신의 후계자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정보원을 통해 히데요시의 이 말을 전해들은 조스이는 즉시 히데요시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아들 나가마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은거하고 싶습니다." 조스이는 풍부한 정보력으로 아들의 입신양명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세키가하라 전쟁이 발발하자 조스이의 아들 나가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서서 큰 공적을 세우게 되고 이윽고 이에야스는 나가사마의 손을 붙들고 머리를 숙이며 이런 말을 했다. "자네 덕분에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어. 정말 고맙네." 고향에 돌아온 나가사마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으나 조스이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에야스가 네 어느 쪽 손을 잡았느냐?" "오른손입니다." "그렇다면 왜 왼손으로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았느냐?" 나가마사는 깜짝 놀라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조스이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별할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일은 소문도 빨리 나는 법, 이에야스도 이 소문을 듣고 더욱 경계하게 되었고, 나가마사를 불러 그의 영지를 52만 석으로 늘려 주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두 배 이상에 해당하는 수입이었다.
"회의는 그 곳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지식과 능력을 기울여 언어를 이용한 싸움 을 전개하는 장소다. 따라서 누구의 말이 맞는다, 누구의 주장이 당연하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사람은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은 즉시 회의장에서 내쫓아야 한다."
구로다 조스이는 여론을 수집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회의'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모임인 이견회(異見會)를 만들도록 나가마사에게 제의했다. 회의에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의 신분은 동등하며,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모든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이견회'는 하급무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민주적인 의사 결정 도구로서 출발한 '이견회'는 회가 거듭할수록 운영상의 문제 때문에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책임감 없는 발언만 계속했고, 다양한 제안 가운데에서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나가마사의 소심한 추진력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안 조스이는 중신들을 적으로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 악역을 맡기로 한 조스이는 병상에서 지금까지 충성을 다해 구로다 가문을 일으켜 준 중신들을 욕하기 시작했고, 중신들은 자연스럽게 나가마사에게 충성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악역을 담당하면 그만큼 나가마사의 명예가 높아질 것이라는 조스이의 생각은 적중했으며 구로다 가문은 물론 나가마사 역시 명석한 결단을 내리는 다이묘가 될 수 있었다.
선택경영 -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오다 노부나가의 말고삐를 잡는 미천한 일부터 시작해 일본 전역을 통일한 인물. 뛰어난 경제 수완으로 자유 경제의 기본틀을 구축하여 일본 최대의 경기 호황을 이루지만, 만년 에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경제가 어려워져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정권이 넘어간다.
전국 시대는 하극상의 시대였다. 하극상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꺾어 누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단순히 입신출세를 위해서 상하 관계가 흐트러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극상 시대에 주군의 임무는 부하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원리를 염두에 두고 일본을 통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사나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등장하기 전에 기노시타 도키치(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젊은 시절 이름)는 출세를 위해 교토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풍류를 사랑하는 다이묘로 소문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마가와 가문의 부장인 마쓰시타 가헤를 만난 도키치는 일단 그의 밑에서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이마가와를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키치의 탁월한 경제감각을 인정한 마쓰시타는 그를 단숨에 마쓰시타 가문의 재정담당자로 임명했는데, 그러자 오래 전부터 마쓰시타 가문의 가신으로 있던 인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 거센 반발을 이겨내지 못한 마쓰시타는 충분한 퇴직금을 담보로 도키치에게 퇴직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 이유가 가문의 '융화'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마쓰시타의 설명을 들은 도키치는 퇴직금은 물론 이마가와에게 제출할 소개장까지 뿌리치고 발길을 돌렸다. 그는 간부인 마쓰시타가 무능력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간부로 고용한 주군 요시모토도 대단한 다이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했고,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 싸움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멸망시킨다. 나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이름을 바꾼 그는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집약했다.
"주군이 부하를 둘 때, 1년을 부려보고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해고해야 한다. 가신이 주군을 섬길 때, 3년을 일해보아 가능성이 없는 주군이라면 버려야 한다. 이것이 법이다."
전국 시대의 주종관계는 단순히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주군이 섬길 가치가 있는 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주군의 인격적인 면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본체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회사 제품이나 서비스의 차이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분중화(分衆化 - 대중이 부분화된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덕경영 - 후쿠시마 마사노리 (1561-1624)히데요시와 같은 고향 출신의 무장. 히데요시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도량이 크고 인정 이 많아 이에야스가 패권을 잡은 후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도 그를 섬기려는 부하가 끊이 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나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새 주군을 모시라."는 유언을 남기 고 64세에 자살했다.
마사노리는 거의 대부분 히데요시와 함께 행동했는데 시코쿠 정벌이 끝난 다음에는 이요(에히메 현)에서 11만 3200석의 봉록을 받는 다이묘가 되었고, 이어서 오와리 기요스 성의 성주로 임명되어 24만 석의 봉록을 받기도 했다. 히데요시는 마사노리를 누구보다 신뢰했으며, 마사노리 역시 히데요시에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충성했다.
세키가하라 싸움이 발생했을 때, 마사노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을 들었다. 그때 이에야스는 어떤 성을 먼저 공격할 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사노리는 자신의 소신대로 오사카 성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오사카 성에 마사노리가 충성하던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사노리를 제외한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은 다른 다이묘들은 함부로 말도 못하고 이에야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만일 히데요시가 이 일 때문에 다른 계열, 즉 미쓰나리의 편에 들어서게 된다면, 현재는 이에야스를 따르지만 원래 히데요시 계열인 다이묘들이 히데요시에게 화살을 겨누게 될 운명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주변의 다이묘들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생각이냐고 묻자 마사노리는 "이에야스 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저는 오사카 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히데요리 님에게서 등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덟 살밖에 안된 아직 어린 그가 미쓰나리 편에 들 이유가 없으며, 히데요시 또한 작은 일로 대의(大義)를 그르칠 소인배가 아니므로 마음놓고 오사카 성을 공격해 미쓰나리를 쓰러뜨려도 좋습니다."라고 진언(眞言)을 올렸다. 그의 충성심과 강직함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의 인자한 성품은 적장 미쓰나리를 생포한 후 그에게 베푼 온정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하며 미쓰나리의 군사를 혹독하게 공격했던 마사노리는 막상 미쓰나리를 생포하자 온갖 험한 말과 행동으로 미쓰나리를 괄시하던 자신의 부하와 동료들을 오히려 호되게 야단쳤다. 비참한 모습의 미쓰나리에게 다가간 마사노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운이 없어 이런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는 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그런 오기로 어떻게든 끝가지 살아남도록 하시오." 미쓰나리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마사노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사노리는 따뜻한 성품으로 모든 싸움에 있어 미쓰나리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