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싱크탱크들
이저 월로치 지음 | 홍익
나폴레옹의 싱크탱크들
이저 월로치 지음
홍익출판사 / 2001년 7월 / 376쪽 / 12,000원
제1부 새로운 세기의 시작
1. 혼돈의 종식과 새로운 희망
18세기의 마지막 해가 저물 무렵, 당시 프랑스는 여러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국고는 텅텅 비어 있었고, 재정적인 어려움은 모든 면에서 정부의 발목을 잡았는데, 특히 군대의 보급능력에서 가장 그랬다. 더구나 정부의 졸속외교로 인해서 해외에서는 새로운 반 프랑스 연합세력이 형성되어 3개의 전선에서 전쟁이 발발했는데, 전쟁 초기에 적국인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연이어 패배하면서 언제 그들이 파리 시내까지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떨고 있었다. 여기다 농촌을 중심으로 약탈이 빈번했고 백주 대로에 강도 사건들이 난무하는 등 사회불안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것이 18세기 마지막을 보내는 프랑스의 얼굴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저 위대한 시민의 힘은 이제 물거품이 되었고 무능한 정부에 의해 이끌려 가는 프랑스 역사는 마치 거꾸로 가는 시계바늘처럼 구시대의 혼란으로 회귀하는 듯했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이자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지주였던 엠마누엘-조제프 시에예스는 1799년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적어도 두 가지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이 혼란의 시기에 얼마 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참신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비교적 국외자로서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당시의 혼란이나 첨예한 파벌 싸움에 초연한 입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789년에서 1790년까지의 프랑스 정치체제를 정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시에예스는 아직도 당시의 명성은 지속되었지만 영향력은 거의 없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
1799년 10월, 나폴레옹은 넬슨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의 해상봉쇄로부터 빠져나와 막 프랑스로 돌아와 있었다. 엄밀히 따진다면, 보나파르트는 상부의 명령 없이 자신의 군대를 이집트에 남겨두고 혼자 이탈했기 때문에 즉결처형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그와 대결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도리어 어디를 가든 영웅대접을 받았다. 2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거둔 연전연승 덕분에 그는 이미 불멸의 영웅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회를 통한 쿠데타를 염두에 두고 있던 시에예스에게 보나파르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보나파르트에 대한 대중들의 추종은 거사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헌법개정을 위한 이번 거사에서 성공을 거둔다 하더라도 자기가 주역으로 떠오르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성급하고 독단적인 야심가에게 정권이 주어졌을 때, 그 정부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잘 아는 시에예스는 고민에 빠졌지만 이제 와서 다른 선택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 해 10월, 의회는 시에예스를 필두로 개혁주의자들이 앞장서서 코르시카 출신의 루시앙 보나파르트를 500인 회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브뤼메르 쿠데타를 위한 치밀한 사전 포석임과 동시에 그의 형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대해 경의를 표시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시에예스와 보나파르트가 주동이 된 쿠데타 음모자들은 이 거사에 합헌(合憲)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꾸몄다. 시에예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원로원 내에 뜻을 같이 하는 의원들을 꾸준히 영입함으로써 세력을 키워나갔다. 원로원의 수장인 르메르시에, 원로원 내 사무감독관, 500인 회의 임원들, 10월에 선출된 양원의 거의 모든 간부들이 혁명의 우산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이미 거사가 성공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쿠데타 세력들은 자신들의 거사를 은폐하고 의회장소를 옮기기 위한 목적으로 신 자코뱅파와 공포정치인들이 연대하여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렸다. 다음날 열린 원로원의 임시 회의에서, 그들은 양원의 차기 개회장소를 파리 외곽에 있는 생클루로 옮길 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했고 보나파르트 장군을 파리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생클루에 새로 마련된 임시 의회가 마침내 개회되었다. 갑작스런 소집 통지서를 받고 생클루에 온,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대부분의 의원들은 뭔가 대단히 스산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음을 직감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자코뱅파의 음모’, ‘비밀 집회’, ‘군대 동원’ 등을 운운하며 개혁파 의원들의 연설이 진행되면서 신 자코뱅파 의원들은 서서히 불안에 빠졌다. 한 중도파 의원의 말을 빌리면 그들의 살기 등등한 연설은 하도 불시에 터져 나온 말들인지라 신 자코뱅당 의원들은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그들은 파리 시내에서 훨씬 벗어난 생클루에 철저히 격리된 데다 수천 명의 병력에 둘러싸인 나머지 눈에 띄게 동요했고, 쿠데타임이 분명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브뤼메르의 거사를 통해 출현한 새로운 인물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몇 안 되는 온건파 공화주의자 중 시에예스나 불레를 비롯한 입법부 의원들이 거사에 참여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보나파르트라는 새로운 존재는 시민들에게 커다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국민적 기대와 불안이 엇갈리는 가운데 임시정부의 3명의 통령 중 한 사람이 된 보나파르트는 이제 고작 30세 정도였다.
국민들은 시에예스와 보나파르트 등 3인의 통령이 이끄는 임시 정부에 지지 의사를 나타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보나파르트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가 주도하는 새로운 정부는 프랑스 혁명의 위대한 유산을 계승하면서 참된 국민 주권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고 확신했고, 프랑스는 이제 유럽의 열강으로서 거기에 걸 맞는 위상을 확보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2. 보나파르트의 포용과 화해정책
프랑스 혁명이 있은 지 근 10년이 가까워 오는 동안의 그 혹독한 정치적 혼란을 통해서, 프랑스 정계는 수많은 유능한 인물들을 배출하는 역설적인 현상을 낳았다. 혁명과 반혁명, 입헌군주제와 공포정치, 총재정부와 브뤼메르 쿠데타 등 고비가 있을 때면 거의 매번 겪었던 정치적 소요상태 속에서 그때마다 등장했던 새로운 인물들은 비교적 젊고 패기에 찼으며 무엇보다도 국가를 위해 무엇인가 일해보려는 의지가 강했다. 보나파르트를 비롯한 브뤼메르 쿠데타 핵심 동지들은 자신들의 영구 집권 계획을 추진하고 새로운 프랑스 건설을 이루기 위해 이들 중 유능한 인재들을 포용과 화해 정책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보나파르트는 집권하자마자 국외로 추방되었던 구시대 인물들을 대부분 불러들이는 용단을 내렸고 이들에게 정치 활동을 전면 허용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화해와 포용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심었다. 그래서 통령정부 출범 1년 만에 국무위원회가 소집되었을 때는 흡사 지난 몇 년 동안에 프랑스에는 아무런 소요나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프랑스의 새로운 입법을 논하는 탁자 주위에 과거 총재정부가 들어서면서 숙청 대상 1순위였던 바르브-마르부아, 베네제크, 에므리, 플뢰리외, 페티에, 포르탈리스, 뢰데레, 티보도 등이 앉아 있는가 하면 그 건너편에 숙청의 열성 지지자들이었던 베를리에, 베르나도트, 불레, 프랑수아 드 낭트, 레알이 나란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내무장관 샤프탈이 표현한 바와 같이, 보나파르트는 정부 수반이 되었을 때 프랑스 내 모든 정당을 재 결집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몰리앙의 회고록에 의하면,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에 보나파르트 추종자들조차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빨리 안정을 회복할 줄은 몰랐다며 깜짝 놀랐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어떤 반대 세력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 의견이 모든 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불레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서 보나파르트의 집권초기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당에 넘치는 선의(善意)와 동료를 아끼는 분위기이다. 나이, 경험, 정치적 신념이 다양한 인재들이 함께 일하고, 토론을 향해 전문적 지식과 설득력을 발휘하면서 연이어 일어나는 문제들에 관해 해결점을 찾거나 제1통령과 의견의 합의를 이루는 과정은 너무도 흥분되었다.”
보나파르트가 파리의 중앙정부를 탈정치화하고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가운데, 각 지방의 지사들은 보다 위압적인 방법으로 지방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그의 첨병 역할을 해나갔다. 보나파르트는 정부의 모든 분야에서 선거에 의한 선출직 공무원을 없애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선거를 국가 개혁을 위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제도로 보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지사단(知事團)으로, 이들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통령정부 내의 그 어떤 집단보다도 보나파르트와 뜻이 잘 맞아서 그의 중앙집권적 추진력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고, 나아가 국가를 안정시키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3. 반동과 억압으로의 회귀
1800년 12월 24일 저녁, 제1통령과 그의 당원들은 근위기마병의 1개 분대를 대동하고 오페라 극장을 향해 떠났다. 보나파르트가 탄 마차의 마부는 생니케즈 거리로 서툴게 마차를 몰고 들어오는 한 상인을 피해 길 옆으로 빠르게 질주해갔다. 그런데 마부가 말트 거리에 막 들어서려는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마차를 뒤흔들었다. 기병들은 하마터면 말에서 퉁겨나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유리 파편 속에 처박힐 뻔했다. 그들 뒤로 8명이 죽고 2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2채의 집이 파손되었고, 근처 건물의 유리창 수백 장이 산산조각 났다.
단 몇 초의 차이로 보나파르트는 폭탄 테러를 모면했다. 그러나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터에 나가 있든 파리에 있든 언제나 자신의 신변 안전을 운명에 맡기는 담대한 성격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를 쉽게 관철시킬 수 있었던 만큼 그는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태연자약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성급하게 행동한 적은 있어도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 테러분자들은 보나파르트를 파멸시키지 못한 대신, 보나파르트 일파가 오랫동안 증오해왔던 자코뱅파의 잔당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빌미는 충분히 제공할 수 있었다. 보나파르트의 핵심 측근들로 하여금 무제한적인 포용과 화해 전략에서 벗어나 이제 피의 보복과 냉엄한 숙청의 칼을 뽑아들게 만들어 준 것이다.상황의 심각성은 속속 보고되고 있었다. 치안장관 푸셰가 전국적으로 심어놓은 스파이들은 보나파르트를 직접 처단하겠다고 서약한 몇몇 급진주의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수개월에 걸쳐 올렸는데 이런 위협은 파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푸셰의 스파이들은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보나파르트를 폭사시킬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보고했다. 연이은 보고에 푸셰는 ‘경찰의 감시가 무정부주의자들의 기를 꺾어놓기는커녕 담력과 대담성만 키우는 것 같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동지들을 실망시키면서까지 고집스럽게 추진돼왔던 포용과 화해 정책은 이제 사라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체제의 구축과 완성을 위해,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꿈꿔 온 대륙 정복의 야망을 위해 이제는 포용 대신에 응징이, 화해 대신에 압제가 필요한 때였다. 그런 것들을 통한 힘의 축적만이 야망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보나파르트는 잘 알고 있었다. 전국의 보나파르트 추종자들이 자코뱅과 무정부주의자들이 폭탄 테러를 계획했다는 보고에 자극을 받아 이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부터였다.
국민들 대부분이 무정부주의자(자코뱅파 당원)들을 이 같은 무자비한 테러 행위의 주동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을 악마시하며 배척했다. 이런 식의 여론몰이에 보나파르트의 핵심 측근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했다. 부르주의 시장이 다음과 같이 격분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희생자들의 피로 뒤덮인 거리에서, 그 포악한 무리들이 왜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인간의 탈을 쓴 저 괴물들은 천벌을 받을지어다!”
이런 와중에서, 수많은 작가들과 청원자들이 제1통령이 과거에 취했던 여러 차례의 관대한 조치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은 너무 광범위한 과거의 관용 조치로 인해 적들이 처별을 면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들에게 주어졌던 면죄부를 즉각 거두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용이나 사면, 폐지된 추방법과 같은 예방책이 아니라 철저한 감시와 숙청을 통한 가혹한 복수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나파르트는 용의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이며 앞으로 음모의 재발을 어떻게 방지할 지에 대해 국무위원회에 자문을 구하였다. 위원회는 이미 고려 중이던 특별재판소의 관할권을 더욱 확대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제1통령은 이들의 제의가 반사회적이며 불법적인 음모를 꾸미는 많은 테러분자들로부터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에 크게 못 미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당신들이 말하는 특별재판소의 대응은 너무 느리오! 더 과감한 복수가 필요하오. 마치 발포처럼 신속한 것 말이오. 피를 흘려야 하오! 희생자들이 생긴 만큼 범인들을 총살해야 하오. 그리고 더 이상 해악을 끼치지 못하는 곳으로 200명은 더 추방되어야 하오!” 보나파르트는 150명에서 200명 정도의 전 공포정치 시대 정치인들과 급진 공화파 투사들을 재판 없이 국외로 추방하는 법안을 의회에 요구했다. 보나파르트는 한발 더 나아가 푸셰에게 무정부주의자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재판도 거치지 않고 추방한다는 것은 그 희생자들에게, 대개 바다 멀리 수천 마일 떨어진 불모지에 유배되어 서서히 죽어 가는, 즉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종의 치명타였다. 아무튼 그 끔찍한 폭탄 테러 사건 이후에 내려진 보나파르트의 조치는 표면상으로는 다수의 목소리를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조치는 합법성이라는 시각으로 볼 때 제1통령으로서 그의 첫 번째 위법 행위였다. 그리고 보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으로 상원의 역할이 변질되어 보나파르트에 대한 잠재적인 견제 세력이라기보다는 그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이다.다분히 왕당파적 성향을 지녔던 황제의 젊은 충복 바랑트가 그의 회고록에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회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추방법은 법이나 사법적 판결이라 할 수 없었으며 제1통령이 상원을 이용해 행사한 절대 권력의 결과물이었다. 이후로 상원은 법률과 헌법의 위헌이나 변질 행위가 자행되어도 그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을 따름이다. 보나파르트가 국무위윈회를 은근히 협박하고 상원을 조정하여 둘 다 공범자로 만드는 가운데 브뤼메르 정부는 이제 강요된 협력체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4. 영광의 정점까지
종신통령으로
1802년 3월 25일,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영국의 콘왈리스 경은 그 동안 어렵게 끌어왔던 협상을 타결하고 아미앵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0년에 걸친 유럽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 결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제1통령 나폴레옹은 군사적 승리와 전통적인 카톨릭 종교의 부활, 망명자들의 귀향, 시민의 평등권 침해 문제 해결과 영주제 철폐, 국유지 이전 문제 등 국가 현안을 원만하게 해결함으로써 평화를 실현하고 프랑스의 위상을 세계 만방에 드높인 인물로 더욱 부각되었다.
아미앵 조약 체결 후에, 호민관과 원로원은 앞다투어 제1통령에 대한 국민적 지지의 뜻을 표명하는 데 앞장섰다. 먼저 호민관의 우두머리가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국민적인 감사와 보상의 뜻을 밝힌다.’고 선수를 쳤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분분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보나파르트는 마음속으로 종신직 임명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러한 속내를 절대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보나파르트의 열렬한 지지자인 라세페드가 엉뚱한 제안을 했다. 헌법상 통령에게 10년의 임기를 임명할 권한이 원로원에게 있다는 사실을 안 그가, 국민적 감사의 뜻으로 지금 당장 제1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자 또 다른 원로는 라세페드의 주장에 한 술 더 떠서 이번 기회에 헌법 개정을 해서라도 보나파르트의 임기를 아예 종신으로 하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보나파르트가 원하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