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이룬 독일총리들
귀도 크놉 지음 | 한울
1948년 독일의 국가형태가 조금씩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에르하르트는 통합지대 행정평의회 경제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에르하르트는 처음부터 시장경제의 도입을 옹호했다. 계획과 강제, 그리고 집단주의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이 경제의 틀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화폐개혁과 동시에 경제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를 위해 소비재에 대한 가격통제를 철폐하고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조정장치인 가격 자유화를 시행하였다.
에르하르트는 경제부 장관으로 재직중에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독일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기호황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독 경제가 갑작스럽게 호황을 누렸다. 생산성이 계속해서 급증했으며 독일은 수출에서 세계 1위, 그리고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회자되었고 에르하르트는 기적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경제기적'이라는 개념을 부정했다. "지난 6년 간 독일에서 일어난 일은 기적이 아닙니다.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창의성과 자유, 그리고 에너지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은 독일 국민들의 성실한 노력 때문입니다."라고 서독경제의 성장 원인을 분석했다.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 총리와 함께 서독의 중요한 창건자이다.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의 정책에 경제적인 안전장치를 제공해주었다. 복지국가의 지속적인 성장 없이 독일의 민주주의는 결코 그렇게 조용하고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공보처 장관이었던 권터 딜은 "아데나워가 정치의 틀을 형성하였고, 에르하르트는 내부 뼈대를 제공해주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신의 후임으로 에르하르트를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1963년 봄에 아데나워의 모든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민당은 에르하르트를 아데나워의 후계자로 공식 결정했다. 아데나워는 퇴임연설에서 "물러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에르하르트가 총리로 있을 때 기민당의 당내 혼란은 점점 가중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당은 에르하르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에르하르트는 당을 장악하지 못했다. 독일에서 아무런 정당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정치인은 총리로서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권좌에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다. 1966년에 에르하르트는 이 사실을 뼈아프게 체험했다. 에르하르트의 허약한 리더십이 곧 드러났다. 그의 총리 취임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에르하르트는 경제부 장관으로서 분명한 개념과 논리정연한 정책을 갖고 국민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는 이 정책을 두려움을 갖지 않고 끈질기게 밀고 나갔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야당이나 이익단체 혹은 아데나워 총리가 반대하더라도 이를 추진했다, 그러나 총리로서 에르하르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새 직책에서 그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일에 떠밀리고, 치이는 미약한 모습을 보였다.
에르하르트는 이익단체에 대한 투쟁에서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취임하자마자 총리는 전쟁 희생자들의 보상요구에 직면했다. 총리는 연금 지급을 인상해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에르하르트 자신도 상이용사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보상금과 관련해 내린 결정에 대해 비난을 모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만 명이 넘는 시위자들이 본 거리를 휩쓸었다. 결국 에르하르트는 굴복하였으며 이미 내린 결정을 수정했다. 총리는 스타일이 구겨지기 시작했으며 이런 일은 전화요금 문제에서도 계속되었다.비전의 정치가 빌리 브란트선장 헬무트 슈미트총리는 외교정책에도 몰두했다. 그는 독일이 동구권과 서방세계의 중개기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친미를 주장하는 '대서양주의자'와 친 프랑스의 '드골주의자' 간의 대립을 완화시켜 독일이 두 동맹국 모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의원들을 설득해 나갔다. 그는 한편으로는 프랑스가 유럽의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함을 인정했다. 키징거는 첫 외국방문으로 에르하르트 때 소원해진 프랑스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드골을 예방했다.
미국과의 관계에 항상 장애가 되었던 쟁점은 독일 주둔 미군을 위해 독일 정부가 워싱턴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대금을 미국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지불유예를 요청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냉정하게 거절당한 바 있었다. 키징거는 이제 독일 주둔 미군 문제를 반대급부로 무기를 구입하는 선에서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핵 확산 방지조약을 계기로 두 강대국은 핵무기를 갖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 비확산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에게 포괄적인 협상을 요구했다.
키징거 총리는 독일 정책의 금기시되는 부분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즉 할슈타인원칙을 깨기 시작했다. 과거 서독은 할슈타인원칙을 근거로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주장했고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국교를 단절하겠다고 위협했었다. 그러나 키징거는 1967년 루마니아와 국교를 맺었으며 체코 프라하에 무역대표부를 세웠다. 당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키징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고와도 국교를 수립했다.
동베를린은 키징거의 고립화 전술에 크게 놀랐으며 모스크바도 이 정책을 철의 장막에서 개별 국가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1968년 8월 소련 탱크가 프라하 시내로 들어가 '프라하의 봄'을 싹부터 잘라버렸을 때 키징거의 긴장완화 노력도 불운한 날을 맞게 되었다. 냉전의 차가운 입김이 다시 독일과 소련 관계에 스며들고 있었다. 독일이 무책임하게 행동했다는 드골의 비난은 문제의 핵심을 꿰뚫었다. 이런 주변의 여건이 총리의 계속되는 행보를 마비시켰다.
이런 일련의 정책 수행과정에서 대연정 파트너들은 서서히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기민당과 사민당은 공통점이 없는 것 같았다. 슈트라우스와 쉴러는 도이치 마르크의 평가절상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였고 총선이 다가오자 기민당/기사당과 사민당은 더 이상 연립정부를 계속 끌고 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경쟁적 동맹관계로부터 전후 독일역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전이 전개되었다.
선거결과 기민당/기사당은 46.1%, 사민당은 42.7%, 자민당이 5.8%의 득표를 하였다. 총리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절대과반수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정 가능성을 열어주게 되었다.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재는 자민당의 쉘 총재와 연정에 관한 막후 협상을 진행하였으며 TV카메라 앞에서 총리가 되고 싶다고 선언했다. 드디어 사민당과 자민당 연정의 주사위가 던져졌다. 키징거는 권력 유지에 필수 불가결한 '막후교섭'에 실패함으로써 정권을 사민당으로 넘겨주게 되었다.브란트 시대는 선거 당일의 극적인 사건과 함께 시작되었다. 1969년 9월 본의 정치무대는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투표가 끝나고 최초의 출구조사 결과가 TV스크린에 발표되었을 때 기민당/기사당은 분명히 사민당을 앞질렀으며 거의 절대과반수에 접근하고 있었다. 오후 9시쯤 컴퓨터는 기민당/기사당이 50% 이상을 득표하리라고 예측했다. 전 총리이자 또 한번 새로이 총리가 될 키징거가 미소를 지은 채 축하전화를 받았다. 자민당도 선거패배를 시인했다.
그러나 오후 9시 30분부터 컴퓨터가 뒤바뀐 결과를 토해냈다. 기민당/기사당이 선두에서 밀려났다. 사민당이 표를 만회하기 시작했다. 오후 10시 반 사민당과 자민당이 과반수보다 6석을 더 확보했다. 빌리 브란트는 전화 수화기를 들고 자민당에게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것임을 공식 발표하겠다고 통보했다. 빌리 브란트는 마이크 앞에 서서 말했다. "저는 자민당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빌리 브란트는 1969년 10월, 4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건국 후 처음으로 사민당 국회의원이 총리가 되었다. 브란트는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걸어왔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본의 최고 자리를 차지하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계급주의 정당의 냄새를 떨쳐버리기 위해 사민당은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었고, 젊고 박력 있는 새로운 인물인 빌리 브란트가 영원한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의 아성을 물리칠 수 있는 후보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브란트는 아데나워를 꺾고 총리에 오를 수가 없었다. 브란트가 주재하는 각료회의는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브란트는 측근들의 토론을 존중했고 의견을 경청했다. 때때로 강한 지도자의 면을 보여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브란트는 "책상을 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소?"라고 대꾸했다.
1969년의 정권교체는 주역이나 관찰자 모두에게 중요한 역사의 한 단락으로 여겨졌다. 처음으로 한 정당이 자유선거로 다른 정당을 교체했다. 이로써 신생독일은 의회민주주의의 시험대를 통과했다. 정권교체는 이를 옹호했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의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신호탄이었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오랜 재직시절을 "실험은 안 되지."라는 표제어로 장식했다. 그러나 이제 빌리 브란트는 "실험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표어를 내세웠고 이 말이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취임연설에서 빌리 브란트의 가장 혁명적인 내용은 외교정책에 있었다. "새 정부는 키징거 총리가 도입한 동방정책을 계속 수행할 것입니다.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두 나라가 외국은 아닙니다. 두 나라는 특수한 관계입니다."라는 대목이다.
키징거 전 총리는 동독을 "저쪽에서 일어난 이상한 현상"이라고 불렀으며 '국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는 서독이 장벽 저쪽에 들어선 국가를 과거 수십 년간 우유부단하게 대해 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연정 시기에 약간의 궤도수정이 있었지만 이를 본질적으로 바꾸는 것은 연기되어 왔었다. 항상 케케묵은 할슈타인원칙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국제정치의 방향이 이미 오래 전부터 긴장완화 쪽으로 나가고 있는데, 본 정부가 할슈타인원칙만을 계속 고집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경우 독일은 서방진영에서 고립당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사민당과 자민당 연립정부는 과감하게 과거의 틀을 깨고 모스크바조약과 바르샤바조약 그리고 동, 서독 정상회담 등을 통해 동, 서독간 기본조약을 체결하였고, 이제 두 독일 국가는 새로운 차원으로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에 관한 키는 소련이 쥐고 있었다. 소련의 동의 없이는 동독과의 관계나 동유럽 이웃국가와의 공존도 진전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은 대연정 때보다는 훨씬 유리했다. 모스크바는 중국과 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와 긴장이 해소되기를 원했다. 1970년 1월 브란트의 특명을 받은 에곤 바르는 소련 특유의 털모자를 쓰고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물론 서방동맹국이 독일의 새로운 진로변경을 마음 편히 바라본 것만은 아니었다. 백악관은 독일의 독자적인 행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숨기지 않았다. 빌리 브란트는 미국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독립성을 보였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나는 패전국 독일이 아닌 해방된 독일의 총리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독일은 소련과 50회가 넘는 협상을 거듭하여 독, 소 관계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였고 '모스크바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모스크바조약은 두 나라가 모두 무력사용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동독을 포함하여 현재 유럽에서의 국경을 인정하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다. 브란트는 독일 국민에게 TV 연설을 통해 "이 조약은 우리가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것을 공식화했을 뿐입니다."라고 역설했다.
소련과의 협상과 병행하여 서독 협상단은 예민한 촉수를 동독으로도 내밀었다. 동방정책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두 독일간의 화합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었다. 동·서독간의 정상회담은 동독의 튀링겐 주에 있는 에르푸르트 시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서 동독의 빌리 슈토프 총리가 서독의 카셀을 답방했다. 그 이후 두 독일간의 협상은 계속되었다. 협상단의 레벨은 낮춰졌지만 보다 효율적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토대에서 방문과 서신교환을 원활히 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이는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마침내 1972년 11월 동독과 서독간에 기본조약이 서명되었다. 이 조약은 두 개의 독일이 유엔에 가입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고 규정했다. 계속해서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실천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문제를 논의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학문과 경제, 기술, 문화, 스포츠, 환경보호 그리고 몇몇 분야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협약이 뒤따를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동독과의 기본조약은 분단을 공고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 재통일에 대한 요구를 명확히 했고 두 독일 시민간의 상호 만남을 통해 재통일의 가능성을 더 잘 느끼게 해주었다.
모스크바조약은 동구권 이웃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는 브란트가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 꿇어 사죄했을 때 절정을 이루었다. 브란트의 이 행동은 순간적인 영감에서 떠오른 행동이 아니라 의도된 행동이었지만 진솔한 의미에서 사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독일 국민들은 언제까지나 속죄를 피할 수는 없고, 한 번은 진솔한 사죄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야당은 협상과정 전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쳐다봤다. 슈트라우스는 브란트를 "재고정리 염가대매출 총리"라고 불렀다. 기사당 의원인 구덴베르크는 연방의회에서 "총리는 친서방적인 독일을 포기하고 소련 제국으로 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비난했다.
빌리 브란트의 총리재직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의미를 반감시킨 것은 아니었다. 빌리 브란트의 최대의 공적은 동구권과의 긴장완화와 화해정책이었다. 브란트는 아데나워의 친 서방정책에 갇혀 있던 독일 외교정책의 테두리를 동구권으로 확대했다. 그는 동구권으로의 문을 열어제쳤고 정치적, 경제적 협력의 길을 열었다. 유럽의 무대에서도 브란트의 정책으로 유럽통합을 가로막고 있었던 동구권과 독일의 '특수한 갈등'이 해소되었다."슈미트입니다. 들립니다." 그러자 저편의 수화기에서 "작전이 완료되었습니다. 테러리스트 3명을 사살했고 아군측 특공대 GSG-9 요원 1명이 다쳤습니다. 더 이상의 피해는 없습니다."라는 구원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총리는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0시 12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아랍 테러리스트가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했던 사건이 강제 진압된 것이다. 헬무트 슈미트는 총리실의 위기담당 참모들에게 이 승전보를 전해주었다. 강인함을 보여주었던 총리도 이런 기쁜 순간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사건이 잘 해결되었기 때문에 슈미트는 물러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종류의 시험대도 정치가 헬무트 슈미트에게는 아주 많이 있었다. 그러나 위기는 그를 권력의 자리에 앉혔고 그를 그곳에 머물게 했다. 그는 위기에 맞서 싸웠고 이를 관리했으며 이겨냈다. 정적들도 슈미트를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정치가"라고 불렀다.
1974년 슈미트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위기로 인해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그는 브란트와 인간적으로 특별히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브란트의 정책이 당에게 도움이 되는 한 그에게 항상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국내의 여론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몇 년째 개혁이 진행된 후 국민들은 이제 개혁에 지쳐 있었다. 국민은 변화 대신에 안정을 원했다. 그리고 최초의 오일쇼크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유권자들은 위기관리자를 찾고 있었다.
헬무트 슈미트가 1974년 5월 연방의회에서 발표한 취임연설문의 제목은 '연속성과 집중'이었다. "세계적인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이때 ... 우리에게 필요한 본질적인 문제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은 모두 제쳐놓읍시다."라는 것이 연설의 핵심 내용이었다. 슈미트는 실제로 연속성보다는 집중에 중점을 두었다. 신임총리는 전임자의 모든 개혁작업을 계속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실현 가능한 것만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