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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이룬 독일총리들

귀도 크놉 지음 | 한울
영감,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에 실시된 설문조사는 초대 총리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 국민들이 아데나워를 처칠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독일에서 누가 가장 큰 업적을 이루어냈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3%가 아데나워라고 대답했고 비스마르크는 8%로 2위를 차지했다. 말솜씨도 별로 없고 항상 직설적인 표현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던 아데나워가 어떻게 국민의 마음 한 구석을 독차지할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바로 그의 정치적 성공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친 서방정책과 시장경제, 정당 민주주의와 유럽통합 등 아데나워가 국시로 확립해 놓은 정책은 지금까지도 그의 후임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한번도 후임자에 의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거나 반대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는 정치사에 있어서 매우 드문 일이다. 아데나워는 독일의 어떤 정치가보다도 그리고 그가 국제무대에서 만났던 어떤 파트너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무덤에 갈 나이인 73살에 총리가 되었다. 이처럼 나이가 많은 것은 그에게 권위와 명망을 주기도 했지만 주위 사람들이 그를 과소 평가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49년 8월, 이미 독일 분단은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현실이 되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3개국이 점령했던 서쪽 지역에서는 독일인들이 만든 잠정적인 헌법을 갖춘 민주국가가 출범했다. 이때 아데나워는 이미 독일의 기민당 의장이었으며, 당내 보스로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총선은 사회시장경제에 대해 국민의 찬반을 묻는 성격을 지녔는데 기민당은 31%를 득표하여 29%를 얻은 사민당을 근소한 차이로 앞질렀다.

기민당 내의 총리후보 선정 과정에서 한 참석자가 아데나워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고 하자 아데나워는 이에 반대하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총리입니다. 나는 73살이며, 주치의가 앞으로 2년밖에는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지만 짧은 기간이라도 총리직을 맡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추천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이 노인네가 총리 후보로 나서자 당원들은 매우 놀랐지만 과거 바이마르공화국의 내각이 대부분 단명했고 이 노인네의 나이를 고려할 때 기껏해야 과도기 총리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여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 그가 14년간이나 독일을 통치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총리로 선출된 지 일주일 후, 그는 군정청으로 와서 각료를 소개하고 처음 제정한 연방법을 서명 받았다.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 대표는 그를 환영하기 위해 양탄자 위에 서 있었다. 독일 사람들은 양탄자를 밟지 말고 서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사실을 무시한 채 양탄자 위에 섰으며 준비한 문구를 읽기 시작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원대하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추구한 목표는 독일도 강대국이 앉는 '양탄자'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독일의 친 서방정책과 유럽통합, 그리고 방위분담을 제시했다. 이를 달성하는 길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때로는 우회로를 선택해야만 했고 때로는 고독했다. 아데나워는 1955년까지 총리와 외무부 장관을 겸임하면서 이 정책을 수행해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이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있을 때, 아데나워는 군사 재무장 문제를 가지고 군정청과 접촉했으며 80개 사단 규모의 독일군 창건을 제안했다. 7만 명이나 되는 동독의 '인민경찰'을 언급하면서 동독으로부터의 침략을 막는 문제를 진지하게 거론했다. 결국 한국전쟁으로 공산군의 침략에 놀란 미국과 영국은 독일의 재무장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 독일도 방위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되었다.

「뉴욕타임즈」에 조심스럽게 실린 독일 재무장에 관한 총리의 인터뷰 기사는 독일을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은 반대 여론으로 들끓게 만들었으며 아데나워의 인기도는 20%까지 떨어졌다. 총리는 집요하게 국민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뉴욕에서 열린 회의에서 독일의 재무장 요구는 프랑스의 반대로 통과하지 못했다. 독일 외교정책의 열쇠는 프랑스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1951년 4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아데나워는 얼마나 길고 긴 협상을 벌여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 각료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를 환영하러 나오지 않았으며 외무부의 일부 관계자만 공항에 나와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 이후 모두 26번이나 파리를 방문했으며 방문 회수만으로도 독일 외교정책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했다. 그가 두 번째로 자주 방문한 곳은 워싱턴으로 10회를 기록했다.

1953년 4월 아데나워 총리는 미국을 처음 방문하고 알링턴 무명용사 묘지 앞에 헌화했다. 미 성조기가 서독의 흑, 적, 황 삼색기 옆에서 펄럭였다. 아데나워는 이 순간을 회고록을 통해 "미 군악대가 독일 국가를 연주했다. 수행원 중 1명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으며 나도 가슴이 뭉클했다. 전쟁 후 나라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부터 1953년 이 순간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라고 묘사했다. 그의 이 미국 방문은 독일이 패전국에서 주니어 파트너로 도약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드디어 1955년 5월 점령조례가 폐지되고 독일은 나토에 동등한 자격을 지닌 국가로 가입했다.

1955년 6월에 소련은 아데나워 총리에게 "두 나라간의 관계를 정상화하자."라고 제안함으로써 본 전체를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모스크바에 동독 대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대사를 교환한다는 것은 동독을 간접적으로 승인한다는 의미였다. 본이 이제까지 독일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주장했는데 이 주장이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총리는 아직도 억류되어 있는 포로 문제 때문에 크렘린으로 가고 싶어했다. 소련은 조건 없는 국교수립을 희망했지만, 아데나워는 포로 관련 협상을 독일문제와 고집스럽게 연계시켰다. 결국 소련 측이 양보함으로써 공식 문건을 발표하지 않고 포로를 석방하는 대신 대사를 교환하자는 수정안을 내놓았으며, 아데나워는 소련측 안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독일통일의 문제는 다시 한번 뒤로 후퇴해야 했으나 총리가 독일에 돌아왔을 때 그의 지지도는 최고에 달했다. 독일 국민들은 오늘날까지도 '1만 명의 포로 귀환'을 총리의 '최대업적'으로 여기고 있다.

독일인들이 초대 총리를 얼마나 존경하는지를 말하고자 할 때면 의례 '슈타인 부인' 이야기를 꺼낸다. 이 할머니는 라인강 하류에 살다가 총리가 사는 뢴도르프 인근으로 이사왔다. 궂은 날씨에도 총리 집 부근의 바위에 앉아 먼발치에서 집주인을 볼 수만 있으면 기뻐했다. 총리가 죽은 후에 그녀는 총리 무덤에 매일 장미꽃을 들고 와서 참배했다. 장미꽃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묘지 관리인은 슈타인 부인의 무덤이 새로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낙관주의자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1948년 독일의 국가형태가 조금씩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에르하르트는 통합지대 행정평의회 경제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에르하르트는 처음부터 시장경제의 도입을 옹호했다. 계획과 강제, 그리고 집단주의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이 경제의 틀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화폐개혁과 동시에 경제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를 위해 소비재에 대한 가격통제를 철폐하고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조정장치인 가격 자유화를 시행하였다.

에르하르트는 경제부 장관으로 재직중에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독일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기호황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독 경제가 갑작스럽게 호황을 누렸다. 생산성이 계속해서 급증했으며 독일은 수출에서 세계 1위, 그리고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회자되었고 에르하르트는 기적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경제기적'이라는 개념을 부정했다. "지난 6년 간 독일에서 일어난 일은 기적이 아닙니다.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창의성과 자유, 그리고 에너지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은 독일 국민들의 성실한 노력 때문입니다."라고 서독경제의 성장 원인을 분석했다.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 총리와 함께 서독의 중요한 창건자이다.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의 정책에 경제적인 안전장치를 제공해주었다. 복지국가의 지속적인 성장 없이 독일의 민주주의는 결코 그렇게 조용하고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공보처 장관이었던 권터 딜은 "아데나워가 정치의 틀을 형성하였고, 에르하르트는 내부 뼈대를 제공해주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자신의 후임으로 에르하르트를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1963년 봄에 아데나워의 모든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민당은 에르하르트를 아데나워의 후계자로 공식 결정했다. 아데나워는 퇴임연설에서 "물러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에르하르트가 총리로 있을 때 기민당의 당내 혼란은 점점 가중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당은 에르하르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에르하르트는 당을 장악하지 못했다. 독일에서 아무런 정당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정치인은 총리로서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권좌에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다. 1966년에 에르하르트는 이 사실을 뼈아프게 체험했다. 에르하르트의 허약한 리더십이 곧 드러났다. 그의 총리 취임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에르하르트는 경제부 장관으로서 분명한 개념과 논리정연한 정책을 갖고 국민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는 이 정책을 두려움을 갖지 않고 끈질기게 밀고 나갔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야당이나 이익단체 혹은 아데나워 총리가 반대하더라도 이를 추진했다, 그러나 총리로서 에르하르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새 직책에서 그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일에 떠밀리고, 치이는 미약한 모습을 보였다.

에르하르트는 이익단체에 대한 투쟁에서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취임하자마자 총리는 전쟁 희생자들의 보상요구에 직면했다. 총리는 연금 지급을 인상해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에르하르트 자신도 상이용사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보상금과 관련해 내린 결정에 대해 비난을 모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만 명이 넘는 시위자들이 본 거리를 휩쓸었다. 결국 에르하르트는 굴복하였으며 이미 내린 결정을 수정했다. 총리는 스타일이 구겨지기 시작했으며 이런 일은 전화요금 문제에서도 계속되었다.

독일 연방체신청은 수년간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체신청은 수입 가운데 6.5%를 국고에 납부하고 있었으며 이 국고 납부액을 없애지 않은 상태로 전화요금을 올려 적자를 보전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전화요금을 통화당 4페니히씩 올리기로 했다. 언론의 집중적인 포화 속에 야당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연정파트너인 자민당의 도움으로 에르하르트는 야당인 사민당이 요구한 전화요금 인상철회를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다.

그냥 여름날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에르하르트의 돌연한 방향전환이 문제가 되었다. 총리는 전화요금 인상을 부분적으로 철회한 것이다. 즉 4페니히가 아니라 절반인 2페니히를 인상되는 선에서 종결지었다. 이 일로 총리의 이미지는 더욱 훼손되었다. 연방의회 토론에서 강력하게 에르하르트 편은 들었던 슈미트 의원은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이때 느낀 심정을 표현했다. "당신이 전화요금을 다시 내렸다고 해서 내가 웃음거리가 된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일 때문에 당신의 정치적 지도력에 대한 나의 믿음과 당신의 리더십이 얼마나 약해졌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에르하르트의 총리시절에 문제가 되었던 부분 중의 하나는 외교부문이었다. 아데나워 총리가 물러나기 몇 달 전에 엘리제궁에서 독, 불 우호조약에 서명한 후 아데나워와 드골이라는 2명의 거인이 포옹하는 장면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와 드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엘리제궁에서 회담을 시작하였으나 쟁점에 대해서 아무런 의견 접근을 보지 못했다. 에르하르트나 드골 모두 공통점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타입이었으며 정치적 입장도 상충되었다. 무엇보다도 유럽통합과 미국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드골은 독일과의 밀접한 동맹을 통해 프랑스를 서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시했고, 동등하고 자유로운 유럽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옹호했다.

서독이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과 국교를 정상화하려고 했다는 점이 아랍국가들의 비위를 거슬렸다. 아랍국가들은 동독의 수상인 울브리히트가 이집트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본이 이스라엘을 승인할 경우 동독을 승인함으로써 독일의 2국가 체제를 인정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1965년 모든 외교 전문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국교수립을 발표했다. 이번만은 총리로서 리더십이 있음을 증명했다.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은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에르하르트의 총리재직 시절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업적이다.

1965년 9월 5대 총선이 치러졌고 결과는 박빙의 선거결과가 예측되었던 기민당이 47.6%를 얻어 승자가 되었으며 사민당은 39.3%에 그쳤다. 에르하르트가 '선거전의 기관차'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외견상으로는 그가 화려한 승리자로 보였으나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은 예상외로 복잡해져갔고 압승을 거두었음에도 그의 권력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그의 총리 취임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1966년 12월 마침내 에르하르트는 총리에서 해임되었으며 키징거가 연방의회에서 총리로 선출되었다. 에르하르트는 총리로서 많은 이유 때문에 실패했다. 에르하르트가 당을 분열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당을 화합시키거나 최소한 당내 여러 파벌의 세력관계를 조정하지 못했다.

중재자 쿠르트 게오르그 키징거



갈색 단발머리에 깔끔한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은 총리의 따귀를 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베를린에 왔다. 그녀는 기민당의 전당대회 날, 남편인 프랑스 기자의 출입증을 재빨리 꺼내 보인 후 입장하였다. 그리고는 기민당원들의 행렬을 비집고 들어가서 의장석에 앉아서 서명하느라 바쁜 키징거 총리의 뒤로 다가가서는 "나치, 나치!" 하면서 갑자기 그의 뺨을 힘껏 갈겼다.

사건 자체는 사소한 일이었다. 이 따귀사건은 총리에게 그리 심각한 모욕을 주지 않은 경미한 '찰싹!'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따귀사건은 독일 3대 총리의 재임기간과 총리 자신을 둘러싼 갈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아들 세대가 아버지 세대에 반항을 했다. 전후세대가 전쟁세대 전부를 거부했다. 많은 시위학생들이 어두운 과거를 지닌 채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증오를, 그리고 전후 청산을 못한 부모들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쏟아냈다. 총리로 독일 최고의 권력자 위치에 있던 키징거는 이런 아버지 세대의 전형으로 보였다. 그는 1933년 나치에 가입했으며 전쟁기간 중 외무부 라디오 정책국 부국장으로 일했다.

키징거가 총리 후보로 추천 받은 결정적인 계기는 연방의회에 진출해 있는 기민당/기사당 의원의 1/5을 차지하고 있는 기사당 의원들의 표였다. 기사당 총재인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당의 지지가 없었다면 키징거는 감히 총리직에 도전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자신이 킹메이커 역할을 하는 것에 아주 만족했다. 그러나 키징거가 권력의 길을 가는 데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언론의 방해가 도사리고 있었다. 과거 그의 나치 경력이 장애물이 되어 「노이에취리히차이퉁」지가 처음으로 전 나치당원이 총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발표했다. 「워싱턴포스트」지가 키징거는 나치스 돌격대 장교였고 히틀러 군대에서 정치위원으로 일했다고 오보를 했을 때는 모든 것이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신랄한 비난에 흔들린 키징거는 "도저히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다."면서 백기를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그를 격려했다. 미국 존슨대통령도 워싱턴에서 키징거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냈다. 마지막 순간에 「슈피겔」지의 부편집장이던 콘라트 알러스가 히틀러의 친위대 관련 문서를 뒤지다가 당시 자신이 반역죄 혐의를 받았을 때 키징거의 보호를 받고 살아난 것에 대한 감사를 표시한 편지를 찾아내어 키징거가 나치로부터 결백하다는 점을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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