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이인자들
데이빗 히넌 지음 | 좋은책만들기
위대한 이인자들 데이빗 히넌·워렌 베니스 지음/최경규 옮김 좋은책만들기/2000년/328면/9000원위대한 협력자 정신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이 오직 빌 게이츠에 의해 이뤄진 것처럼 암시하는 기사를 읽을 때도 우리는 성공한 조직의 중심에는 한 무리의 협력자 - 그리 큰 영광은 얻지 못했더라도 실제적인 주요 업무를 담당한 핵심 인물 - 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전 임원 에이드리언 킹은 포브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는 빌 게이츠 없이도 경영될 수 있다. 하지만 스티브 발머의 성공하려는 노력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게이츠와 발머의 경우는 리더와 협력자 간의 새로운 협력관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새로운 평등주의는 경영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상호 의존성이 높아지고 끊임없이 기술 교환이 이뤄지는 21세기의 변화된 환경에서는 전체 조직에서 긴밀한 파트너십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위대한 협력자 정신(Co-Leadership)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을 승자로 만드는 철학이다. 협력자들은 뛰어난 보좌관들로서 매우 재능 있고 헌신적이며, 많은 갈채를 받는 상관들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뛰어난 부관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협력자 정신은 지위가 아니라 '역할'임을 깨닫게 되었다. 위대한 협력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앨버트 고어와 같이 사람에게 이인자가 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최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승진가도형). 저우라이언은 스스로 리더였던 사람이 최고의 위치를 넘겨준 경우이다(후진참모형). 한편 최고 지위도 원하지 않고 그 계급으로 승진된 적도 없는 뛰어난 부관도 많다(현재 위치에 충실한 조연형).
탁월한 2인자의 용기와 창의성, 건강한 자아라는 3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부관들은 상처를 주게 된다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주어진 공식 외에 조직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2등 혹은 3등이 되려면 특별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진정한 리더십은 일인자가 아닐 때 발휘된다 - 로버트 러츠1998년 11월, 독일의 다임러 벤츠와 미국의 크라이슬러가 합병했다. 이 합병은 1990년 파산 직전이던 크라이슬러의 회생 없이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크라이슬러의 소생은 회장 로버트 이튼과 사장 로버트 러츠 사이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들의 협력은 오히려 적대적 상황 속에서 시작됐다.
1993년 러츠는 아이아코카의 뒤를 이어 크라이슬러의 회장이 되길 원했지만 외부에서 영입된 이튼이 회장이 되었다. 제트기 조종사 출신인 러츠는 거칠고 오만한 성격이었다. 주머니칼로 커피크림을 저어 그 칼날을 핥는 과격한 성품이었다. 그러나 이튼은 이인자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경영자였다. 그는 러츠에게 스타일을 수정하도록 강요하지 않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주었다.
이튼은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고 경영권을 나누어 행사했다. 주말 야유회의 분위기를 동아리 모임같이 만들었다. 아이아코카 시절의 한 사람만 얘기할 수 있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와는 달랐다. 크라이슬러는 이인자를 쓸 줄 아는 이튼의 리더십과 권한의 분배, 기업문화의 창조에 의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리더의 꿈을 실현시킨 이인자들 - 스티브 발머와 크레이그 배럿실리콘밸리 사람들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유례없는 성공이 스티브 발머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윈도 운영체제 선적부터 최고급 인재 공급까지 모든 부문을 책임지고 있으며 빌게이츠보다 더 공로가 큰 인물로 꼽힌다. 이 둘의 관계는 리더와 협력자 간의 상생관계를 잘 보여준다. 핸리 포드 시대의 "미국기업론"에서는 최고경영자가 모든 권한을 독점했지만 오늘날 글로벌 환경에서는 위대한 협력자와의 평등주의 사고가 더 필요하다.
빌 게이츠는 모든 직원들이 보낸 이메일에 개인적으로 답장을 보낼 정도로 편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리더다. 카키색 플란넬 셔츠가 캠퍼스 같은 사무실의 유니폼이고 대부분의 하급직원과 간부들은 창 없는 회의실에서 활발히 교류한다. 로데오와 록밴드로 끝나는 회사의 야유회는 모든 직급 직원들의 결속을 다진다.
마이프로 소프트는 어림잡아 80퍼센트의 직원들이 스톡옵션을 가지고 있으며, 1992년 이전에 고용된 전문가들은 거의 모두 백만장자가 되었다. 스톡옵션을 통해 공유된 소유권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성공적이었다. 20년 동안 스티브 발머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가장 뛰어난 이인자이자 투사였다. 그는 게이츠의 또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계는 인텔을 세계에서 가장 큰 칩제조업체로 성장시킨 앤드루 그로브와 크레이그 배럿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들의 사무실은 어깨 높이의 칸막이로 분리된 좁은 공간이다. 전용 주차장이나 운전기사는 찾아볼 수 없으며, 소박한 회의실에서 회의 도중 간단한 음식을 급히 먹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단추를 몇 개 끄른 셔츠와 짧은 스웨터를 입은 모습은 전통적인 정장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또 물질적인 보상 면에서 회사의 관대한 스톡옵션 계획은 1천 명 이상의 직원들을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1997년「타임」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앤드루 그로브는 유태인 대학살의 생존자이며 무일푼의 난민으로서 미국에 와 인텔을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체로 성장시켰다. 게이츠와 그로브는 현대 미국 자본주의의 성공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다. 빌 게이츠와 하버드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한 스티브 발머, 그리고 인텔의 그로브와 배럿은 이미 일인자와 이인자의 관계가 아닌 동반자가 되었다.
리더를 앞서게 하는 것은 이인자의 재능이다 - 원스롭 스미스메릴 린치, 피어스, 페너&스미스 등 유명한 증권회사에서 오랬동안 공동경영자로 일했던 윈스롭 스미스는,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찰스 메릴의 겸손한 부관이었으며, 메릴이 제대로 일하지 못했던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메릴린치를 미국 제일의 금융기관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1914년 설립된 찰스 메릴사는 다음해 에드 린치가 사업에 합류하자 회사이름을 메릴린치로 바꾸었다. 찰스 메릴의 뛰어난 선견력으로 1929년 대공황을 잘 이겨나갔던 메릴린치는, 불황기간의 장기화와 1938년 에드 린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큰 어려움을 격게 되었다. 결국 윈스롭 스미스가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다.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월 스트리트를 믿지 않았으며 주식중개인들을 대부분 정직하지 못한 내부자로 여겼다.
스미스는 정직하고 고객 지향적인 소매중개가 주식시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중 자본주의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스미스의 끈질긴 설득으로 불황기 중에 철수하였던 소매업으로 진출하였다.메릴 린치는 월 스트리트를 미국인들에게 친숙한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전국적인 홍보를 시작하였으며, '고객 최우선 정신'을 바탕으로 고객을 늘려 갔다. 메릴이 마케팅에 최선을 다하는 동안 스미스는 새로운 성장을 위한 기회를 모색하여 1941년에는 페너&빈과의 합병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1944년 4월 메릴이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전후의 증권시장 호황기에 메릴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자는 스미스였다. 처음에는 메릴과 스미스가 전략적인 결정을 함께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미스가 더 많은 일을 떠맡게 되었다. 메릴은 지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원거리 경영시스템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공동 리더들 덕분이었다. 메릴이 심장발작을 일으킨 후 스미스는 의사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러나 권력을 행사할 때 스미스는 결코 왕권을 앞지르지 않았다. 메릴보다 8살 적은 이 충성스런 이인자는 정신적인 지주이자 후원자인 메릴에게 언제나 공손했다.
오직 인민에게 봉사한 중국의 등불 - 저우언라이저우언라이는 가장 고전적이고 대표적인 이인자의 모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898년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저우언라이는 텐진의 명문중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1921년 7월 그는 상해에서 조직된 중국공산당의 유럽조직책이 되었다. 마오쩌둥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시절 저우언라이는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 구성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조직의 최고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보다 월등히 앞서 나가고 있었다.
1935년 대장정 때의 일이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에게는 없는 지도자적 자질이 마오쩌둥에게 있음을 발견했다. 특히 마오쩌둥은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과 그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또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잡한 주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능력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항상 대중의 눈높이에서 이야기했고, 그와 인민들 사이에는 친밀한 교감이 오갔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홍군 사령관으로 추천했다. 최고자리를 내주는 게 기분 좋았을 리 없지만 그런 생각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마오쩌둥만이 중국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 지도자 자질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민중을 이끌고 혁명을 완수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저우언라이의 정치적 통찰력과 겸손이 역사의 변화를 이루었다. 융통성 있는 볼셰비키로 불려지는 그는 욕심이 없었기에 당원들 사이에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저우언라이는 항상 언제 어떻게 물러나야 할지를 알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편하고 조용히 처신하며 친구를 만드는 데 능숙했던 그는 모든 상황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서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였지만 대체로 그늘에 있었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대중이 느끼지 못하게 처신했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1순위를 거부한 유일한 공산주의자였다. 중국공산당 내에서 개인적인 파당을 형성하지 않았고, 마오쩌둥과 반대되는 파벌을 만들지도 않았다.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요청을 받았지만 주석직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마오쩌둥을 반대하는 내분을 일으켜 중국에 이득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포용하는 것이 중국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1949년 10월 수립된 중국 정부의 총리가 된 저우언라이는 북경 거리의 청결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를 처리하면서도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국제 정치가이자 협상가로서 중국의 산업화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가 미국뿐임을 깨달은 그는 닉슨 대통령을 초청해 과감한 역사의 반전을 이룬다. 저우언라이는 하루에 16시간에서 18시간을 일했다. 6번 수술을 받고 위암과 싸우면서도 외국손님과 몇 시간씩 담소를 나누고 60명 이상의 외국원수 및 고위인사들과 만남으로써 중국을 세계에 알렸다. 1967년 8월 26일 홍위병의 폭도들이 저우언라이를 가택연금시킨 채 이틀반 동안 못 자게 하고 음식도 주지 않았었다. 마오쩌둥은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체 했다. 일부 공산당들은 저우언라이를 마오쩌둥의 가정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나중에 저우언라이를 버렸다.
마오쩌둥은 죽어가는 저우언라이를 방문하지 않았으며, 사망소식을 듣고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국인민들은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마오쩌둥의 그것보다 더 슬퍼했다. 1백만 명의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거리로 몰려 나왔다. 중국문제 전문가 딕 윌슨은 저우언라이를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뛰어났으며 가장 성공적이고 완벽했던 정치가라고 평했다. 저우언라이는 존경스럽고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인간적인 지도자였다.
자기 희생과 봉사에 입각한 이인자의 리더십 - 조지 마셜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낸 조지 마셜은 50세에 아직 중령이었다. 오랜 경쟁자인 맥아더가 사성장군인 데 비하면, 이인자 정도가 아니라 낙오자다. 맥아더가 육군 참모총장을 그만두고 필리핀 방위군 사령관이 된 후에야 마셜은 제대로 진급할 수 있었다. 1936년 8월 24일 55세의 마셜은 준장이 됐다. 1938년 11월의 한 회의에서 루스벨트는 1만 대의 비행기 제조를 제안했다. 루스벨트가 자랑스럽게 생각한 프로그램으로 참석자들 모두가 동의했지만, 마셜은 반대했다. 루스벨트는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나고 회의는 흐지부지되었다. 동료들은 이제 대통령에게 밉보인 마셜의 워싱턴 생활도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1939년 4월 23일 루스벨트는 33명의 다른 고참들을 제치고 마셜을 새 육군 참모총장으로 선택했다. 대통령에게 임명소식을 들은 마셜은 "저는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씀드리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종종 기분 나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라고 상기시켰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참을 수 있으며, 더불어 솔직히 말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마셜은 2차대전 초기에 많은 저항을 무릅쓰고 미군을 재정비했다. 마셜 플랜을 계획한 그는 국무장관, 국방장관을 역임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군인으로서 처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당시 여러 지도자들의 영웅이었으며 트루먼과 처칠, 아이젠하워는 마셜이야말로 최고인물이라고 말했다. 마셜은 은퇴 후 회고록을 쓰면 수백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했다. 지난날의 유명한 인물들에게 해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는 국익을 우선 생각하는 것이 마셜의 신념이었다.
'사라진 꿈'을 붙잡은 위대한 부통령 - 앨버트 고어역사적으로 미국의 공식적 공동지도자인 부통령직은 불행한 정치인이 잊혀지는 자리로 오랫동안 여겨져 왔다. 부통령의 유일한 입법적 업무는 상원의장이 되는 것과 상원에서 찬성과 반대가 동수일 경우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부통령직의 진정한 권력은 대통령이 유고·사임·탄핵 혹은 무능력할 때만 발휘된다. 무위도식하는 부통령의 이미지는 대부분의 일류 후보자들을 실망시키고 있으며, 오랫동안 조소의 대상이었다.
고어는 어떻게 이런 케케묵은 부통령의 무기력과 절망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었을까? 그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아버지 앨버트 고어 1세,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 등의 조언을 받아 부통령이라는 직위의 명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 내기 시작했다.
백악관에서 고어가 발휘하는 영향력은 상관과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데 기인하기도 한다. 고어는 항상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할 준비가 돼 있었지만 위대한 협력자들이 그렇듯 상반된 의견을 대통령에게 어떻게 개진할 것인지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많은 전임자들과 달리 고어는 협력자의 임무에 관해 깊이 인식하고 이인자로서의 역할을 즐기는 듯하다. 훌륭한 공조체제팀은 서로 다르지만 보완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다. 모순적인 인물로 알려진 클린턴에 비하여 변덕스럽지 않은 고어는 대통령의 의사결정에 크게 기여한 훈련된 체계적인 사색가다. 클린턴과의 공조체제의 일환으로 고어는 기술과 환경, 자유무역과 복지개혁을 포함한 몇몇 국가적 관심 영역에 대해 일차적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면서도 고어 부통령은 되도록 주목받는 것을 피한다. 개인적 야망에도 불구하고 충성심 있고 자기과시를 하지 않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주목받지 못해도 너무나 중요한 사람 - 윌리엄 거스릿지상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협력자로서의 코치들이 맣다. 30년동안 윌리엄 거스릿지는 대학 농구에서 가장 승률이 높은 승부사인 노스캐롤라리나 대학 딘 스미스 감독의 오른팔 역할을 해왔다. 거스릿지는 대학 스포츠에서 가장 성공적인 협력관계를 이룩했음에도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것이 그가 좋아하는 방식이다. 기꺼이 보조 역할을 하는 그는 승진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몇 번의 승진 기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거절하였으며, 1977년 스미스가 은퇴할 때 노스캐롤라이나의 부코치로 은퇴하는 것에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