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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움직인 16인의 리더

게리 월스 지음 | 작가정신
유권자보다는 숙녀를 사로잡는 데 신경을 쓴 명문가의 아들적과 싸우기보다 피하기에 급급한 '서부의 젊은 나폴레옹'선거정치 지도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VS 아들라이 스티븐슨

난롯가 대화로 국민들의 안방까지 파고든 장애인 대통령유태의 랍비도 인정할 행정의 마술사카리스마의 반대말은 관료주의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관료주의라는 주제를 탐구하고 있는데, 카리스마를 이론화했던 막스 베버는 관료주의도 함께 다루었다. 분석가들은 지금도 베버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관료주의를 현대 법적 제도의 합리화와 연결시켜 연구한다. 그러나 베버는 관료주의가 모든 복합 사회들의 기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관료주의의 사레 중에는 솔로몬의 통치에 관한 것도 있다.그에 반해 위풍당당한 조지 매클렐런은 운명적으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고 매클렐런 자신은 더욱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군대와 사업이라는 두 가지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으로 웨스트 포인트 졸업생이었다. 그는 멕시코 전쟁에서 명예롭게 싸웠고, 정부가 보낸 군사참관인으로서 크리미아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오하이오와 미시시피철도의 사장이 되어 당시 성장산업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매클렐런은 웨스트버지니아의 리치마운틴에서 전과를 올린 덕분에(하지만 그는 싸우기보다는 전투를 지켜보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서부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렸다. 사실 겉보기에는 그런 비교가 어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매클렐런에게서 수적우세라는 명제는 꼼짝달싹 못하는 마비의 원칙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훈련되고 장비가 구비된 충분한 수의 병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군대가 그렇게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위대한 전쟁이론가인 클라우제비츠는 적의 병력은 아군의 두려움 때문에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라고 말했는데, 매클렐런은 이러한 경향을 최대화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병사들이 바친 충성에도 불구하고 군사지도자의 목표인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그는 병사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추종했고, 측근들과 함께 서로를 칭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사실상 매클렐런은 자신이 결코 참여하지 않을 전투를 준비하면서 전쟁기간을 소비한 것이나 다름없다. 위풍당당한 용모, 고상한 수사, 철저한 준비, 운명에 대한 감각 등이 '지도자의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클렐런에게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을 어떤 목표를 향해 동원하지 못한다면 그런 자질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외딴집으로 숨어버린 비운의 천재 철학자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싶을 뿐인 뛰어난 엔터테이너1978년 마돈나 루이즈 베로니카 치코네가 그레이엄의 무용방법을 가르치던 그레이엄 무용단의 스타 펄 랭의 교습을 받기 위해 등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하지만 랭이 그레이엄에게서 배운 혹독한 훈련은 이 참을성 없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녀는 그레이엄식 무용을 배우려고 왔지만 사실은 나이트클럽 스트립댄서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는 자신의 긴 이름을 마돈나로 바꾸고 여러 조그만 록그룹들을 전전했다. 그녀는 가수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기 전에 드럼도 배웠다. 이 모든 분야에서 그녀는 다른 드러머들이나 무용수, 가수, 작곡가들에 비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 뛰어나지 않은 재주에 그녀의 공격적인 쇼맨십과 세일즈맨십이 결합되자 그녀는 록 문화의 여신이 되어 버렸다.



마돈나는 자신의 예술적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했다. 즉 "나 자신이 즐기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바흐가 대위법을, 드뷔시가 조성을 중요시했다면 마돈나에게 중요한 것은 '충격'이다. 그레이엄과 마돈나 두 사람 모두 육체를 이용하여 관객을 상대했지만 마돈나는 예술가이긴 하지만 예술가 지도자는 아니다. 공연하는 가수로서 마돈나는 나름의 재주와 규율을 지니고 있으며, 관객들에게 예술적, 역동적 만족감을 준다. 사업가로서 지금까지 그녀는 현명하고 성공적이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다재다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레이엄과 달리 어떤 학파를 결성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예술 형식을 개발하지도 않았으며, 어떤 명분을 위해 운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레이엄은 무용을 공연했을 뿐만 아니라 나름의 미학을 설파했다. 물론 예술가에게 창조행위가 우선이긴 하지만, 만약 예술 부문에서 '리더십'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마돈나가 아니라 마사 그레이엄을 살펴보아야 한다.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종종 소크라테스와 비교되며 사실 두 사람은 몇 가지 놀라운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무아지경에 가까운 놀라운 집중력으로 지식을 탐구했고, 지식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으며 순수한 언어와 순수한 인생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현대철학을 상징하는 본보기나 다름없다. 그는 바로 그러한 분리를 한탄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공공장소에서 시민들을 만나 철학적인 자기검토를 했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몇 안 되는 학생들과도 자주 만나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자들조차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또한 그는 가르칠 때마다 자신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몇 안 되는 학생들을 이끌지도 못했다. 심지어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 중 일부는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간호사와 막노동꾼이 되기도 했다. 그는 지식인 지도자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처럼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고자 했으나 그의 이론과 방법은 그의 의도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사상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인생을 실패로 이끌었다. 소크라테스가 인생의 한복판에서 바쁘게 움직인 사람이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사회의 변경에 서서 말문이 막힌 채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카리스마적 지도자: 다윗 왕 VS 솔로몬

신에게 선택받은 게릴라 전사지식인 지도자: 소크라테스 VS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비뚤어지게' 이끈 괘씸한 철학자20세기 들어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대통령이 있다면, 바로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비평가들이 그를 완벽한 통치자라고 찬양하거나 혹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기회주의자로 폄하하는 혼란스러운 평가를 해왔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일까? 루스벨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921년 그에게 찾아온 척수성 소아마비가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에게 그런 장애가 없었다 해도 그는 대통령이 되었겠지만, 아마 위대하고 훌륭한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루즈벨느는 장애인이 되기 전에도 온화하고 사교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지나치게 안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병마가 닥친 후, 다시 걷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단련시켰다. 그는 그 싸움에서 항상 패배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다리는 사라졌지만, 허리 위쪽은 연약한 애송이에서 강인한 남자로 변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고난 덕분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루스벨트의 고난은 그를 사람들로부터 떼어놓기는커녕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으며,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조정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만들었다. 즉 사람들이 루스벨트의 장애를 불편하게 생각했으므로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이 선호하는 주제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그가 첨예한 불안 속에서도 끊임없이 평안을 가장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한마디로 완벽한 배우였다.



자신의 신체 장애로 인한 위험은 항상 존재했다. 강철로 된 보조기구를 단 나무토막 같은 다리는 언제라도 한 순간에 꺾일 수 있었다. 그리고 한번 넘어지면 힘센 장정들 없이는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법무부 건물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운전사 혼자 힘으로는 그를 일으킬 수 없어서 다른 두 사람을 불러야 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구하러 온 사람들에게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루스벨트가 사고나 수치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능한 한 자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는 사실은 칭찬 받을 만하다. 그는 장애 때문에 유권자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때면 사람들을 안으로 불러모았다. 다시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난롯가 대화'를 개발해 세계가 자기 책상 앞으로 모이도록 했다.



대통령을 배우라고 부르면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정치가들에게는 배우의 자질이 필요하다.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유권자들을 환영하고, 속으론 싫어도 동맹관계에 있는 다른 정당과 협력하고, 밉지 않은 사람에게도 분노를 표시하는 척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연기력은 저급한 정치인이 아니라 훌륭한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어떤 것이 추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지는 물론, 그런 호소력을 이끌어내려면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루스벨트는 사람들의 반응을 감지하는 능력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조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루스벨트가 다른 사람의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 재능은 그가 설립한 웜 스프링스 병원에서도 증명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가족들이 그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아이를 밖에 내보내는 것조차 꺼려했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만든 웜 스프링스는 사회가 소아마비 환자들에게 강요한 기준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에서 다른 곳과 달랐다. "처음부터 루스벨트는 소아마비 환자의 갱생이 의학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문제임을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곳에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장애를 숨기려고 노력했던 그가, 웜 스프링스에서 만큼은 자신이 약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다른 환자들과 똑같은 스케줄에 따라 함께 운동하고, 장애와 관련된 농담을 나누었다. 웜 스프링스를 제외하고 자신의 장애를 그대로 드러낸 또 한 번의 예는 2차 대전 중에 병원에 있는 병사들을 위문할 때인데 그는 휠체어를 타고 병사들의 침상 사이를 돌아다녔다.



루스벨트는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을 본받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길이 있었고, 그 길은 남들에게 그 무엇이든 강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길을 따랐다. 루스벨트는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이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기는 사람이었다. 위대한 리더십이란 결코 제로섬게임이 아니며 지도자가 얻는 것은 추종자들로부터 빼앗은 것이 아니다. 지도자와 추종자는 모두 줌으로써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워싱턴, 링컨, 루스벨트 같은 위대한 대중적 지도자들의 미스터리인 것이다.195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선망하며 자라온 자유주의자들은 아들라이 스티븐슨이 루즈벨트의 합당한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루스벨트가 올버니의 주지사 관저에서 워싱턴으로 향했듯이, 스티븐슨 역시 스프링필드의 주지사 관저에서 워싱턴으로 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스벨트가가 뉴욕의 저명한 가문이었다면 스티븐슨가는 일리노이주에서 이름난 가문이었다. 루스벨트와 스티븐슨은 섬뜩할 정도로 유사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자식에게 열성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고, 루스벨트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학위를 얻지 못했고 스티븐슨은 성적이 나빠 하버드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각각 사회적으로 어울리는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을 했고,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질 무렵에는 아내와의 사이가 소원해졌다. 두 사람은 작가도 아니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러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고 또 그들이 써준 훌륭한 연설문을 읽었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는 않았지만 좌익 자유주의자로 불릴 만큼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1952년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은 '거의' 옳았다. 사실 스티븐슨은 '거의' 루스벨트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슨과 루즈벨트는 달랐다. 스티븐슨에게는 소아마비와 같은 고난이 없었고, 그것이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들었다. 그는 대중과 거리를 두고 몇몇 인텔리들만이 알아채는 심도 있는 코멘트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는 그의 측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또한 스티븐슨은 자기가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유권자들이 자기에게 다가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치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매일같이 대사관에서 파티를 즐겼고 결국 런던에서 65세에 사망했다. 루스벨트 역시 63세의 나이에 이른 죽음을 맞이했지만 오랫동안 힘든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2차 대전이 진행되던 네 번째 임기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다.군대에서 리더십은 매우 쉬워 보일 수 있다. 군인들은 상관에게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추종자가 추종을 거부할 경우에는 총살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전투지휘자들을 찬양하는가? 워싱턴 D.C에 있는 수많은 동상들은 대부분 연단 위에 선 정치가가 아니라 말에 올라탄 장군들이다. 군사지도자가 맞이하는 어려움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이라면 국가가 맡아서 수행한다. 군사 지도자는 존경받을 만한 결정을 통해 바로 앞에 있는 무장한 추종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지자들(정부와 국민)을 확실하게 장악해야만 한다. 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효과적인 명령을 전달하는 것, 다시 말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추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군사지도자는 자신의 예지를 침착하게 유지해야만 추종자들을 유지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임무는 과장할 필요도 없이 매우 힘든 것이다.



나폴레옹은 초기 공세에서 자신의 군대와 적군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파악하고 적을 물리치는 데 그 한계를 이용했다. 예전에 유럽 열강들의 전쟁은 안정구도 속에서 가끔 일어나는 제한된 발작 같은 것이었다. 교전 당사자들마저도 그 구조 자체를 뒤흔들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왕들은 이런 저런 목적으로 싸움을 벌였지만 왕권 자체를 전복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혁명군은 사정이 달랐다. 혁명군은 그들이 맞선 군대뿐만 아니라 그 군대를 보낸 정치체제까지도 파괴하려고 했다. 이는 가능한 한 많은 적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결과 역사상 보기 드문 형태의 잔인한 살육전이 나타났다. 18세기까지 전쟁의 기술은 진형, 진지구축, 전개 등을 꾸미는 정교한 예술과 같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목표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단숨에 파괴해 버렸다.

그 전까지 대부분의 장군들은 빠른 전투를 기피하도록 교육을 받았으나, 나폴레옹은 바로 그것을 추구했다. "일단 싸우고 나서 주위를 둘러 보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일단 상대편의 일부가 무너지면 다른 부분들 역시 금방 곤경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헐벗고 굶주린 부하들에게 공격할 목표를 가리키며 그곳에는 음식과 신발과 옷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빨리 공격하여 점령할수록 궁핍에서 벗어나는 것도 빠르며, 보상을 얻을 기회가 온다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부대는 징발과 약탈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양태를 보이게 되었는데, 이 역시 혁명정치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아군이 수적으로 우세할 때만 싸웠으며, 각 교전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위장, 매복, 협공, 복합전개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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